제양공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선강의 재혼 문제도 순순히 풀렸고, 얼마 후면 노환공 부부가 오기로 했다. 노환공은 자신과 왕희(王姬)와의 혼례를 주관할 것이고, 그리고 십여 년만에 첫사랑 문강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제양공은 생각할수록 마음이 설레였다. 그럴 때에 정나라에서 제족이 친선 사절로 왔다. 제족, 이 꾀 많은 자가 어찌하여 제나라에 왔는가? 그는 정여공이 노, 송, 위나라에 보배와 구슬을 주기로 하고 구원군을 모아 정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죽을 힘을 다해 연합군을 막아냈다. 다행히 위나라에 변고가 일어나 위군(衛軍)이 본국으로 철수한 덕분에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는 노, 송나라 군대도 철수하고 잠시 평안할 때를 이용하여 국제외교를 펼 생각을 했다. 제족이 정소공에게 아뢰었다.
"제나라에 가서 친선을 맺고, 만일에 노나라와도 우호를 맺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누구도 두려워 않고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쉴 수 있습니다."
제족은 정소공이 내어 주는 많은 황금과 비단 예물을 받아 가지고 우선 제나라로 왔던 것이다. 제양공과 제족은 서로 상하(上下)의 예의를 갖춰 인사를 나누고 친선 우호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제나라 신하 한 사람이 들어와서 제양공에게 아뢰었다.
"그간 정나라에서 고거미가 정소공을 죽이고 공자 미를 군위에 세웠다고 합니다."
이 말에 제양공은 크게 놀라고 화가 났다. 평소 같았으면 곧 군사를 일으켜 한바탕 해볼 텐데 머지 않아 노환공 부부가 올 것이고 자신의 혼사도 추진해야 하는 일이 있어 꾹 참았다. 그는 제족이 급히 귀국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제양공은 자신의 혼삿일이 제대로 풀리고 나면 반드시 연합군을 구성하여 정나라 군위를 바로잡아 주겠다고 제족에게 거듭하여 약속을 했다. 한편 노나라에서 문강(文姜)은 남편인 노환공이 자기 친정 제나라로 행차하게 되자 노환공에게 매달려 사정했다.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노환공은 마침내 부부가 함께 가기로 작정했다. 그때 대부 신수가 간했다.
"예법(禮法)은 인륜의 법이 아니라 하늘의 법입니다. 어찌 이를 어기시려 하시옵니까?"
노환공은 의아했다.
"과인이 언제 예법을 어겼단 말이오."
신수가 문강의 나들이를 반대했다.
"자고로 여자는 방에 있고 남자는 집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부터 전해오는 법도입니다. 어기면 변고가 생깁니다.여자가 한번 출가하면 부모가 살아 계실 때 근친을 갑니다.지금 부인께서는 친정에 부모도 안 계십니다. 오라버니에게 근친 간다는 것은 예법에도 어긋남은 물론이려니와 말이 안 됩니다. 이번 제나라 행차에는 예법에 따라 주공 혼자 다녀오셔야 합니다."
노환공이 웃으며 대답했다.
"과인이 부인과 함께 가는 것인데 무엇이 그리 예법에 어긋난단 말이오. 너무 예법만 내세우며 주장하지 마시오."
노환공은 신수의 청을 묵살하고 문강을 데리고 함께 제나라를 향해 떠났다. 그들이 녹수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미 제양공이 먼저 와서 그들 부부를 마중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은근히 대하며 인사를 나누고 함께 임치성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노환공은 이번 혼사에 대한 주장왕의 분부를 제양공에게 자세히 전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번 혼사의 절차에 대하여도 대체적인 합의를 보았다. 제양공은 우선 왕희와의 결흔을 성사시켜 준 노환공에 크게 감사했다. 그리하여 도성에 도착한 그날 밤 잔치를 베풀고 이들 부부를 성대하게 환영했다.
회포를 풀다
잔치가 파할 무렵 제양공이 누이동생 문강에게 청했다.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왔으니 옛날 궁빈도 만나보고 싶겠지. 노후(魯侯)께서는 저사(邸舍)에서 우리 제나라 대부들을 알현하실 테니 과인과 궁으로 가자."
제양공은 문강을 데리고 궁으로 갔다. 노환공은 별 생각없이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나 제양공이 미리 은밀한 곳에 별실을 만들어 뒀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들은 궁중 밀실에 들어가서 곧바로 술상을 벌이고 우선 정부터 통했다. 십여 년만에 첫사랑과 관계를 맺으니 그들의 회포가 어떠했으리오.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 사람은 서로를 놓아 주지 않고 애무하고, 정을 통하면서 밤을 새우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서로 끼고 누워 잠이 드니 이튿날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일어날 줄 몰랐다. 한편 노환공은 저사에서 제나라 대부들의 알현을 끝내고 아내 문강을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옛 식구들을 만났으니 시간이 걸릴 테지 하고 여겼다. 그날 밤 노환공은 저사에서 혼자 싱겁게 하룻밤을 밝혔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그런데 문강에게서 계속 소식이 없자 노환공은 슬며시 의심이 생겼다. 그래서 사람을 궁으로 보내어 알아보도록 했다. 한참 후에 그 사람이 제궁(齊宮)에 갔다와서 보고했다.
"제후는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기 때문에 부인은 없고 편궁에 연씨(連氏)란 첩실을 두었는데 요즘은 잘 돌보지 않고 혼자 지내실 때가 많다고 합니다. 강부인(姜夫人)께서는 어제 제후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 오랜만에 남매의 회포를 풀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궁빈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노환공은 어쩐지 예사롭지 못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벌써 해는 중천에 떴고 곧 점심시간이 될 판이었다.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겼구나. 내, 신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큰 잘못이다.'
노환공은 마음속으로 후회하고 있던 참이었다.
"국모께서 나오셨나이다."
그때 보고가 들어 왔다. 노환공은 언짢은 기색으로 때늦게 들어오는 문강에게 꾸중하듯 물었다.
"웬 술을 마셨기에 이리 늦었소? 대체 누구와 이렇듯이 술을 마시었소?"
문강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연비와 함께 마셨소이다."
"언제 주석(酒席)이 끝났소?"
"오랜만에 만났으므로 자연 얘기가 길어졌어요. 밤이 꽤 깊었던 듯하외다."
"그 때 당신 오래비도 함께 술을 마셨소?"
"우리 오라버니는 참석하지 않았소. 술 마시는 동안에 잠시 들렀다가 한 잔 권하시고 곧 가셨소."
"그럼 주석이 파하고 어찌 내궁에서 나오지 않았소?"
"시간이 늦어 궁에서 잤어요."
"어디서 잤소?"
"별걸 다 물으시오. 내궁에 방이 몇 개인데 내 잠잘 곳이 없겠소. 내가 자랄 때 거처하던 방에서 잤소이다."
"누구와 함께 잤소?"
"궁녀들과 자지 누구와 자요?"
"네 오래비는 어디서 잤느냐?"
문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을 붉히면서 대꾸했다.
"여동생이 오라버니 자는 곳을 어찌 안단 말이오. 참으로 별소리를 다 듣습니다."
"네 오래비와 회포를 푸느라 한방에 들었다는 걸 내 아는 데 어찌 별소리라 하느냐? 과인은 다 알고 있다. 거짓말로 둘러대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
노환공은 짐짓 화난 체하면서 어깃장 놓는 심정으로 질책 하듯이 채근했다.
"누가 거짓말로 둘러댄다는 말이오?"
그런데 문강은 대꾸하면서도 자기가 한 짓이 있는지라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자고로 남녀 유별이라 했다. 그대는 친정에 와서 깨끗하지 못한 행실을 했느니라."
이 때까지만 해도 노환공은 문강이 제양공과 사통(私通) 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불미스러운 일이려니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문강이 둘러대는 서툰 짓이 수상쩍기 이를 데 없었다. 노환공은 버럭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즉시 사람을 보내어 제양공에게 귀국하겠다고 알리게 했다. 장차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문강의 행실을 확고하게 규명하고 다스릴 결심이었다. 한편 제양공은 문강이 내궁에서 나간 후에 마음을 놓지 못했다. 혹시 노환공이 눈치챌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심복 용사인 석지분여(石之紛如)를 불러 분부했다.
"너는 뒤따라가서 노후 부부가 서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래 들어 보아라."
얼마 후 석지분여가 돌아와 보고하는데 두 사람의 어젯밤 일로 서로 다투고 있다고 했다. 제양공은 크게 놀랐다. '노후가 벌써 우리 사이를 눈치챘단 말인가? 그럼 앞으로 어찌 하면 좋을까?' 제양공이 이렇게 전전긍긍 탄식하고 있을 때, 궁 한편에서는 공자 규와 소백이 장탄식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이제 매부 노환공의 얼굴을 어찌 마주한단 말인가."
어젯밤 소백은 제양공과 문강 누님, 두 사람의 예전 일을 알고 있었기에 궁중으로 들어와 혹시 변고가 있을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그런데 제양공과 문강이 감쪽같이 밀실로 사라지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궁인들을 깨울 수도 없었으려니와 모든 방을 조사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 이 천륜조차 안중에 없는 구차하고 추악한 짓거리가 어찌 우리 형제의 몫이리오.' 소백이 규에게 말했다.
"이렇게 탄식하고 있기만 해서는 대책이 안 섭니다. 우선 포숙아와 상의를 하지요."
공자 규와 소백이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궁에서 나올 때, 공자 팽생이 궁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