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와 계량
남방(南方)에 초(楚)나라가 있었다. 임금의 성씨(姓氏)는 미(薇)며 벼슬은 자작(子爵)이었다. 초에는 웅통(熊通)이 임금으로 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용력이 뛰어났고 무예를 즐겼다. 그리고 사냥이나 전쟁을 좋아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왕(王)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 싶어하는 야심 만만한 인물이었다. '천하의 주인 노릇을 해보고야 말리라.'그의 결심은 매우 확고했다. 그래서 기회를 노리며 병사를 조련하고, 산업을 장려하는 등 양쯔강 유역의 강국(强國)으로 초나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바로 그럴 때에 주환왕이 병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치다가 어이없이 패하는 일이 생겼다. 이 소식은 웅통을 매우 기쁘게 했다. 그는 왕호(王號) 사용을 결심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조로 물었다.
"과인은 앞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울까 하는데 그대들 생각은 어떠하오?"
영윤(令尹) 벼슬의 투백비(鬪伯比)가 아뢰었다.
"우리 초나라가 왕호를 사용한 적이 오래 전에 있었습니다만 그 동안 중지해 왔습니다. 이제 다시 왕호를 사용한다면 세상이 놀라 소란이 올까 걱정이 됩니다. 따라서 한동(漢東) 지방의 여러 제후들을 위력(威力)으로 굴복시킨 후 칭왕(稱王)하신다면 누가 뭐라 하지 않을 테고, 여러모로 좋을 듯합니다."
웅통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찌 해야 좋겠소?"
투백비가 거듭 아뢰었다.
"근래에 주왕(周王)이 제후 정백을 치다가 그 신하가 쏜 화살에 맞고 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후들 누구 하나 나서서 주왕을 편들어 거들지 않았습니다. 이는 정나라의 힘이 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곳 한동(漢東) 모든 나라는 수(隨)를 강국으로 모셔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공께서 사신을 보내 동맹을 맺자고 한 후 적당한 이유를 핑계로 굴복시키게 되면 주변의 작은 나라들은 모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이후 왕호를 사용한다면 누구도 이의를 내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웅통은 매우 흡족하여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대군(大軍)을 동원하여 하(瑕) 땅에 둔(屯)을 치고 마치 소수의 병력인 것처럼 꾸몄다. 이어 대부 원장을 수나라로 보내어 동맹하기를 청했다. 그때 수나라에는 한 현명한 대부가 있었는데 그는 계량(季良)이라는 사람이었다. 한편 간특한 신하가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소사(小師)라고 했다. 수후(隨侯)는 원래 아첨하는 신하를 좋아했다. 그래서 소사를 총애하고 있었다. 초나라 사자가 와서 동맹을 청하자, 수후는 계량과 소사 두 신하를 불러 상의했다. 문제는 동맹을 맺느냐 아니면 거절하느냐 하는데 있었다. 계량이 아뢰었다.
"초나라는 강성하고, 우리 수나라는 초에 비해 다소 약합 니다. 그런데 초나라가 사람을 보내어 동맹을 청하니, 그들의 진정한 속마음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응하는 체하면서 상대의 진심을 파악하고, 방어할 준비를 한다면 크게 근심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소사가 아뢰었다.
"여기에 앉아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걸 가지고 상대를 파악하고 방어할 준비를 했다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청컨대 신(臣)이 하 땅의 초나라 진영에 가서 그들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보고 돌아오겠습니다. 동맹을 할 것인지 그만 둘 것인지는 그후에 따져 보면 됩니다."
수후는 두 사람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소사에게 분부했다.
"좋도다. 그럼 경이 직접 하 땅에 가서 형편을 본 후에 초와의 동맹 여부를 정하도록 하여라."
수후는 소사의 받아들였다.
한편 초나라 진영에서 투백비는 수나라의 소사가 온다는 걸 듣고 웅통에게 아뢰었다."신이 듣건대 수나라 소사는 소견이 좁고 아첨이나 떠는 간신배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진면목을 감추고 어리숙하게 보여야 합니다. 씩씩하고 젊은 군사는 뒤편으로 돌리고 약하고 늙은 군사를 앞쪽으로 내세우시옵소서. 그러면 소사는 우리를 깔보고 경솔히 행동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수나라는 교만해지고 매사에 소홀해질 것입니다. 그들이 매사에 소홀해질수록 우리의 뜻이 빨리 이루어지게 됩니다."
투백비의 말을 듣고 있던 대부 옹솔이 참견했다.
"소사는 경망하지만 계량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눈을 속일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
투백비가 말했다.
"일단 다음 날을 위해 오늘의 허실을 보여 주자는 것입니다. 다행히 소사가 이를 모르고 경거 망동한다면 우리는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웅통은 우선 투백비의 계책대로 군사를 배치시켜 놓고 소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소사가 하 땅에 당도했다. 그는 초나라 진영의 허실(虛實)을 살피러 온 만큼 모든 걸 예사로 보지 않았다. 소사는 도열해 있는 초군(楚軍)의 모습을 보고 나서 오만한 생각을 가졌다. '늙고, 병들어 보이는 모습에 낡은 갑옷과 녹슨 창과 칼을 들고....... 이들이 싸움에 견딜만할 것 같지는 않구나.' 이윽고 소사와 웅통이 마주앉았다. 소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 두 나라는 그 동안 각기 서로의 강토를 지키며 연고가 없던 터에 갑자기 동맹을 청하니 어떤 영문이십니까? 그 까닭을 들려 주십시오."
웅통이 빙그레 웃으며 거짓말로 대답했다.
"우리 초나라에는 몇 년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 나라들이 힘을 합쳐 우리를 노린다면 어찌 당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귀국과 동맹을 맺어 친형제처럼 지낸다면 안전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뜻은 결코 없습니다."
소사는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 땅 여러 나라들은 모두 우리 수나라를 형님처럼 모시고 있으니 그런 염려는 마십시오."
소사는 한껏 우쭐대며 동맹을 맺었다. 웅통은 소사에게 거듭 굽신거리며 사례한 후 곧 영채를 뽑고 떠날 듯이 말했다.
"그럼 다음 기회에 또 뵙겠소. 군사들도 병약한데 멀리 떠나와 기일을 너무 지체했습니다."
웅통은 소사를 배웅하면서도 곧 회군하여 초나라 본국으로 돌아갈 듯이 서둘렀다. 소사는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져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수후(隨侯)에게 자랑했다.
"초군들을 살펴보니 모두가 병약하고 무기도 형편없더이다. 그들은 우리와 친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까 봐서 서둘러 동맹을 맺고자 하더이다. 우리 수나라를 몹시 두려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럴 때 주공께서 약간의 병차만 내 주신다면 곧 뒤쫓아가 모조리 잡아 바치겠습니다. 그러면 초나라는 장차 우리를 우러러보고 받들 것이 틀림없습니다."
수후는 소사의 말에 크게 혹했다. 그래서 초나라를 추격할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 이 소문을 듣고 계량이 크게 놀라 즉시 궁으로 달려왔다.
"군사를 일으킨다니 천부당 만부당합니다. 초나라는 우리와 동맹을 맺고 회군했습니다. 그들을 추격하면 안 됩니다. 만일 이긴다 해도 동맹을 파기했으니 손가락질 받을 일입니다. 신이 보건대 초나라는 우리를 유인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추격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수후는 계량의 강경한 말에 입맛이 떫었다. 그래서 태복을 불러 점(占)을 치게 했다. 점괘는 불길(不吉)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제서야 수후는 마지못해 없던 일로 했다. 웅통은 서서히 후퇴하면서 수병(隨兵)이 추격해 오기를 기다리다가 계량 때문에 중지됐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했다. 투백비가 곁에 있다가 아뢰었다.
"주공의 칭왕(稱王)은 몇 달 미뤄야겠습니다. 추후 기회를 봐서 아예 수나라를 쳐 버리십시오."
웅통은 후일을 기약하고 귀국했다. 몇 달이 지났다. 웅통이 군사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아예 수나라를 멸망시킬 작정이었다. 초군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수나라를 쳐들어가자 수후는 소사만 믿다가 변변한 싸움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항복했고, 한동 지역의 모든 나라들은 수나라 뒤를 따라서 초나라를 섬기겠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웅통은 왕호를 쓰기로 결정하고 스스로 초무왕(楚武王)으로 칭하게 되었다. 남방에서 초나라의 패권이 이렇듯 단단하게 다져지고 있을 때 중원에서는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