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2장
관포지교
1. 포숙아와의 만남 (2/2)
理財를 익히다
관중은 목표를 세웠다. 일백 금(一百金), 일백 금을 모으자. 일백 금이라면 당시 상당한 액수였다. 관중은 무엇이든 돈이 될 수 있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했다. 특히 활쏘기 대회에서 받은 상품을 금전으로 바꾸어서 모았다. 대나무 쟁반을 받으면 그릇 가게로 가져가서 금전으로 바꾸고, 비단 천을 상(賞)으로 받으면 포목점으로 가서 금전으로 바꾸어 꼬박꼬박 모았다. 한번은 포목점에 갔을 때였다. 상으로 받은 필묵을 내놓자 주인은 25전을 관중에게 주었다. 돈을 헤아려 본 관중은 평소보다 2전이 더 많이 온 것을 알고 2전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려 했다.
"셈이 잘못되었습니다."
"아니다. 필묵 값이 올랐다. 그래서 25전을 준 것이다."
주인이 웃으며 관중에게 설명했다.
"물건 값은 항상 바뀌기 마련이다. 만일에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많고 물건의 수요가 적으면 값이 오른다. 반대로 사려는 사람은 적은데 물건이 많게 되면 값이 내리게 된다. 요즘 비단 천의 생산이 크게 줄었다. 시기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값이 올랐다. 또 얼마 있으면 비단 천이 많이 생산된다. 그때가 되면 다시 값이 내리게 될 것이다."
관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유익한 말씀이십니다. 그러니까 물건이 많을 때 사두었다가 적어질 때 팔면 이윤이 많겠군요."
포목점 주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인재로다."
이런 일이 여러 번 거듭되자 저잣거리에서 관중은 영특한 소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꽤 많은 상인들이 관중의 뛰어난 산술 능력을 칭찬했다.
한편 관중을 좋아하고 따르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도 많아졌다. 대부분 활쏘기 대회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었다. 그들은 대개 사족(士族)이나 부상(富商)들의 자제가 많았기에 상당히 자유스런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신분이니 재물이니 하는 것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더구나 관중에게는 활쏘기라는 발군의 재주가 있었다. 또한 관중은 그들에게 조금도 위축되지 않을 만큼의 용돈도 쓸 수 있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그들처럼 어른들을 졸라 타낸 용돈이 아니라 당당히 제 힘으로 번 돈이다. 이런 관중에 대해 몇몇 친구는 오히려 존경스럽게 바라보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굉장한 녀석이다. 우리가 어린애처럼 용돈을 타낼 때 저 녀석은 자기 손으로 용돈을 번다. 놀랍다."
그들은 활쏘기 대회가 있는 날이면 우르르 몰려와서 관중을 응원했다. 그리고 성적이 좋은 날이면 함께 어울려 저잣거리의 호빵집으로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관중은 활쏘기 대회에서 일등을 했고, 호빵집에서 한턱을 쓰고 있을 때였다. 한 소년이 시비를 걸어왔다.
"이봐, 관중이란 친구!"
소년은 거칠게 말하면서 다가왔다. 관중은 그 소년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너, 지나치게 우쭐댄다고 생각하지 않아?"
"......."
관중은 상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활쏘기 잘하는 건 나도 알지만 그 정도로는 잘난 척하지 않는 게 신상에 좋아."
상대 소년은 관중이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자 도발하듯이 으르렁거렸다. 주위의 소년들은 곧 주먹질이 오고 가는 싸움판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관중이 의외의 반응을 나타냈다.
"잘난 척한 건 미안하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누구든 기분 상하게 해 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 난 단지 먼 시골에서 왔기 때문에 이 곳 임치성의 친구를 많이, 그리고 빨리 사귀고 싶었을 뿐이야."
'어, 이 친구 보게.'
상대 소년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손을 내밀면서 화해를 청했다.
"난 포숙아라고 한다. 사실, 너의 활솜씨에는 좀 질투심이 나더라구. 하하하......."
팽팽했던 긴장이 일순간 풀어졌다. 포숙아가 웃음을 터트리자 주변의 모든 소년들도 한바탕 웃어댔다.
"으하하하하......"
'녀석 꽤 재미있는걸.'
'멋지다. 마음에 든다.'
두 소년은 서로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두 소년은 마치 십년지기나 되는 듯이 좋아했다.
생선 장사로 싹튼 우정
"우리 장사하자."
포숙아가 불쑥 말을 꺼냈다.
"장사?"
관중이 의아해 하자, 포숙아가 말했다.
"돈 버는 장사를 하자구. 넌 일백 금(-百金)을 꼭 모아야 한다고 했잖아."
"물론 꼭 모아야 해."
관중은 정색을 하고 포숙아를 바라보았다. 포숙아는 안다. 관중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돈을 모아서 어머니에게 집을 한채 마련해 드리려 한다는 것을. 그래서 장사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물론 장사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포숙아는 이미 먼 친척 아저씨를 통해서 생선의 유통 경로와 이익분에 대해 소상히 알아 두는 것도 있지 않았다.
"돈을 모으려면 장사하는 방법 외엔 없어."
"......."
관중은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왜? 내키지 않아?"
포숙아가 재차 물어오자 관중은 난처한 기색이 되었다.
"장사하려면 밑천이 있어야 하잖아......."
"그건 염려 마. 밑천이 안 드는 장사가 있으니까!"
포숙아는 생선을 사고 파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정(鄭)나라, 위(衛)나라, 노(魯)나라, 송(宋)나라, 진(晋)나라, 진(秦)나라 등은 바다와 인접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제(齊)나라는 산동(山東)에 위치하여 황해(黃海)와 만나는 유일한 대국(大國)이었다. 제나라의 바닷가에서는 어패(魚貝)류가 많이 잡혔다. 제나라의 어획량은 처음에는 식량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것이 근자에는 그 수량이 늘어나면서 점차 내륙 지방으로 소비가 확대되었다. 포숙아가 들은 바로는, 이렇게 하여 어패류를 잡는 어부들과 이를 유통시키는 장사꾼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들 어부들과 생선 장수들이 모여서 회(會)를 조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게를 얻을 필요도 없어. 저잣거리 한쪽에 조그마한 좌판을 벌이고, 친구들 도움을 받으면 생선을 가져오거나 배달하는 데 어려움도 없을 것이고......."
관중은 포숙아의 기발한 발상에 매력을 느꼈다. 즉, 수많은 소년들의 도움을 받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이익금을 셈하여 일정 부분은 그들을 도와 주는 소년들에게 수고비로 내주면 되었다. 생선 장사는 나날이 번창해 나갔다. 그리고 상당한 이익이 남았다. 모두들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했다. 그런데 관중은 언제나 이익금의 절반을 자기 몫으로 했다.점점 장사를 돕던 소년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관중은 지나치게 욕심이 많다."
어떤 소년은 포숙아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관중이 이익금을 나누는 방식을 포숙아에게 고해 바쳤다. 그런데 소년들의 고자질을 들은 포숙아는 의외로 관중을 싸고 돌았다.
"그건 정당한 셈이야. 장사를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포숙아의 말을 듣고 난 소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관중이 많이 가져가기로 정했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관중이 이를 알게 되었다. 관중은 그날 저녁, 슬며시 포숙아를 불러냈다.
"포숙아, 미안하다. 사실......."
관중이 말하려하자 포숙아가 가로막으며 오히려 관중을 위로해 주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자. 이 장사를 시작한 이유가 너의 일백 금을 마련하는 데 있잖아. 또 우리 둘이 동업(同業)했다는 데 대해서 많은 친구들이 기대하는 바도 크고 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목적한 바나 이루자."
말을 마친 포숙아는 오히려 두툼한 전대를 관중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건 그 동안의 이익금을 모은 거야. 새로 가게를 하나 마련해 보자구."
젊은이들의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 포숙아의 생각이었다. 얼마 후, 임치성 남문 부근에 '젊은이를 위한 공간'이라는 작은 주점이 하나 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난 고지식하니까 주점 운영에는 부적당해. 네가 적당하다구."
포숙아는 이 주점의 운영마저도 극구 관중에게 부탁했지만, 관중도 이번에는 양보를 하려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모두 네 말을 들었으니까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 줘."
관중은 기어코 주점의 운영을 포숙아에게 떠맡겼다. 사실 포숙아는 일단 마음을 터놓는 상대에게는 끝없이 관대하고 편안하게 행동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는 매우 깐깐하고 대쪽같이 엄한 성품이었다. '마치 판관(判官) 같다'는 평(評)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관중은 얼핏 보기에 까다로운 듯했지만 속이 깊고,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상대가 놀리는 듯해도, '좋은 생각이다. 좋은 일이다' 하면서 얼버무리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관중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정확한 통찰력과 독창성을 갖고 있었다.
남문(南門) 거리 주점은 임치성의 명물이 되어 갔다. 그러자 점차 귀족층의 자제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자제들이 출입하기 시작하더니 제희공의 막내아들 소백(小白) 공자도 단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