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왕명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위반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먼 시골 사람들은 아무 소문도 못 듣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시골 부부가 나타났다. 여자는 쑥대로 만든 전통을 여러 개 묶어 머리 위에 이고, 남자는 산뽕나무로 만든 활을 짊어지고 성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해지기 전에 팔고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바삐 걸었다. 마침 순찰중이던 사시관이 이를 보고 달려왔다.
"이 년놈을 포박하여라!"
사시관의 수하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여자의 팔부터 움켜 쥐었다. 순간 뒤따라오던 남자는 짊어지고 있던 산뽕나무 활을 날쌔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죽어라 하고 나는 듯이 달아났다. 사시관들은 그 여자를 좌유에게 데리고 갔다. 좌유가 잡혀 온 여자와 물품을 살핀즉 아이들의 동요와 맞아 떨어졌다. 좌유는 곧 왕궁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달아난 남자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하지 않았다.
"한 여자가 법을 어기고 산뽕나무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을 팔기에 잡아왔습니다. 마땅히 참형에 처하고 이를 널리 알리겠습니다."
주선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부했다.
"그 여자를 참(斬)하고 활과 전통을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불태워 버려라."
한편 사내는 달아나면서 자기 아내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되돌아가 살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사내는 멀리 도망친 곳에서 잤다. 이튿날이 되었다. 소문이 떠돌았다.
"어떤 시골 여자가 나라에서 금지한 산뽕나무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을 팔러 가다가 북문(北門) 근처에서 사시관에게 잡혀 참형으로 죽었다네."
사내는 그제서야 산뽕나무 활과 쑥대 전통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아내는 잡혀 죽었고 자신은 도망치는 신세인 것을....... 사내는 더 멀리 도망쳤다. 얼마나 갔을까.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 그제서야 사내는 죽은 아내를 생각하면서 신세를 한탄하고 슬피 울었다. 동시에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자기 자신을 정말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해서 달아났다. 마침내 멀리 강변까지 달아날 수 있었다.
문득 한 곳을 바라보았다. 온갖 새떼들이 날며 울며 야단이었다. 사내는 이상하게 여겨 그 곳으로 가까이 갔다. 웬 갓난애가 강물 위에 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기의 등 밑에는 커다란 자라가 받치고 있었고 새떼들은 주둥이로 아기가 강물에 빠지지 않도록 잡아당기며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사내는 기겁하고 놀라 부르짖었다.
"괴상한 일이로다!"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서 갓난애를 안고 나왔다. 갓난애는 그제서야 까르르 하고 웃기 시작했다.살펴보니 계집애였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기가 왜 물에 빠졌는지 모를 일이나 온갖 짐승들이 애를 보호하려고 한 걸 보면 분명히 하늘이 내놓은 귀한 인물일 것이다. 일단 데리고 있으면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길는지도 모르겠다."
사내는 자신의 베적삼을 벗어서 갓난애를 싸고 품에 안았다. 그리고 우선 피할 곳을 생각했다. 그는 포성(褒城) 땅으로 향해 갔다.
주유왕과 미녀 포사
주선왕 다음에 주유왕(周幽王)이 뒤를 이었다. 주유왕은 천성이 난폭할 뿐더러 예의를 몰랐다. 그래서 어머니 강후(姜后)는 어질기로 소문난 신백(申伯)의 딸을 왕비로 삼고 그 사이에 난 아들 의구(宜臼)를 태자로 세운 후, 왕비의 아비 신백에게 후(侯)를 봉했다. 이는 장차 왕의 무절제에 대비하고 후사를 염려한 대책이었다. 주유왕은 왕 위에 오른 후 처음에는 별탈없이 지냈다. 그런데 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 때부터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복(喪服)을 입고도 술과 고기를 삼가하지 않았고, 추호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포성 땅 포향(褒珦)이 이런 주유왕의 어질지 못한 행동을 간했다. 그러자 주유왕은 화를 내며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그래서 포향은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 포향의 아들 홍덕은 아비를 구하고자 비단 3백 필을 주고 한 미녀를 사서 주유왕에게 바쳤다. 이 미녀의 이름이 포사(褒似)였다. 주선왕 때 산뽕나무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을 팔러 북문에 나타났다가 아내를 잃고 도망쳤던 시골 사내가 십여 년 전 강물에서 건졌던 그 계집아이가 바로 이 미녀였다. 주유왕은 홍덕이 데려온 여자를 보자 매우 흡족하여 이렇게 분부했다.
"포향을 출옥시키고, 지난날 벼슬을 내려 줘라."
그날 밤 주유왕은 포사를 잠자리에 데리고 들었다. 그 후로 주유왕은 앉으면 무릎 위에 포사를 올려놓고 일어서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실 때면 잔 하나로 마시고 식사 때엔 같은 그릇으로 먹었다. 그야말로 포사의 치마폭에 빠지고 만 것이다.
3. 포사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다
비단 찢는 소리
포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할 만했다. 주유왕이 이렇게 빠져든 것은 호색한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주유왕은 십여 일씩 아침 조례에도 나가지 않고 포사 곁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포사는 웃음이 없는 여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이제까지 웃어 본 적이 없었다.주유왕은 어느 틈엔가 포사의 웃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언연일소(焉然一笑)
'이 여자가 웃으면 그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던 중에 그녀가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가 백복(伯服)이다. 주유왕은 태자 의구를 폐(廢)하고 백복을 태자로 세웠다. 순전히 포사를 즐겁게 해주고자 함이었다. '자기 아들을 세우면 좋아서라도 혹시 한 번쯤 방긋하고 웃어 줄는지도 모른다.' 포사는 웃지 않았다. 아니 자기 아들이 태자가 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러자 주유왕은 아예 신후(申后)마저 폐하고 포사를 왕후(王后)로 세웠다. '이번에는 혹시.......' 주유왕은 포사를 살펴보았지만 역시 그녀는 웃지 않았다. 왕은 악공들을 불러 재주껏 흥을 북돋아 보도록 했다. 모두들 흥겨워하건만 포사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마침내 하도 답답해서 왕이 물었다.
"도대체 그대는 무슨 소리를 좋아하는고?"
"첩은 좋아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지난날 손으로 비단을 찢었을 때 그 찌익 하는 소리가 꽤 상쾌하게 들렸습니다. 그 외엔......."
이 말을 들은 주유왕은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이후 주나라 궁중에서는 매일같이 비단을 백 필씩 쌓아놓고 왕후(王后)인 포사 앞에서 찢는 일이 벌어졌다.그러나 포사는 웃지 않았다. 사실 포사는 비단 찢는 소리를 정말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비단 찢어지는 소리가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싫지 않은 정도였다.
실수로 오른 봉화
주유왕은 매우 답답했다. 그래서 기분 전환도 할 겸 여산(驪山)으로 행차를 했다. 여산 아래에는 별궁(別宮)이 있었다. 그 별궁에서 잔치를 크게 벌였다. 대소 신하들은 물론이고 궁지기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먹고 마시며 질탕하게 놀았다. 그날 여산에 세워진 봉화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원래 봉화대는 서쪽 오랑캐(西戎)가 번창할 때 그들이 왕성(王城)으로 쳐들어오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산 아래 20여 개 소에 장작을 쌓아놓고 대비하는 것이었다. 만일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면 봉화를 올려 인근의 제후들에게 구원을 청하고 호경(鎬京)에는 변고를 알리는 긴급 신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잔치에서 술취한 병사들이 실수하여 불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봉화가 오르자, 불빛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그 불은 1백 리 밖에서도 환히 볼 수 있었다. 모두들 호경(鎬京)에 큰 변이 생긴 줄로만 알았다. 제후들은 제각기 병사를 거느리고 달려왔다. 사면 팔방에서 구원군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오랑캐는 커녕 그저 누각 위에서는 질탕한 음악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누군가 훈련을 하다 실수라도 했는가?'
제후들은 맥이 빠졌고, 병사들은 투구를 벗어 땅바닥에 던지며 분개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아예 지쳐 쓰러졌다. 별궁 누각에서 잔치를 벌이던 주유왕과 포사가 난간에 기대어 이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랑캐의 침입은 없었소. 더 수고할 필요가 없으니 돌아들 가시오."
근방 제후들은 왕의 전령을 듣자 모두들 맥없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그 때였다. 포사가 부지중에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호......."
주유왕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웃는 포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주유왕의 혼백을 쏙 빼놓았다.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주유왕은 자신의 넓적다리를 꼬집어 보았다. 현실이었다. 분명히 생시의 일이었다. 그날, 봉화대에서 실수한 병사가 왕에게 불려갔다. 병사는 죄를 지었으니 목숨을 잃지나 않을까 겁을 냈다. 그런데 병사는 오히려 큰 상을 받았다. 병사는 영문을 몰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봉화대에 실수로 불을 질러 큰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부터 주유왕은 심심하면 봉화를 올리게 했다. 몇 번은 제후들이 달려 왔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다른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아무리 왕비를 위해서라지만 이제 그만 자제해야 되지 않는가.' 밤낮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병차를 몰고 달려오는데, 이것이 한 여자를 웃기기 위함이라니....... 마침내 봉화가 올라도 제후들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헛고생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신국(申國)에서는 주유왕에 대한 원한이 깊어졌다. 신후(申侯)의 딸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고, 외손자는 태자에서 밀려났으니 원한이 생길 만했다.
욕정(慾情)으로 지는 별
신후는 서쪽 오랑캐 군사를 움직여 호경을 치기로 했다. 사자가 신후의 서찰을 가지고, 금과 비단을 실은 수레를 거느리고서 견융에게 군사를 청하러 떠났다.
"호경만 함몰하면 부고(府庫)에 있는 금과 비단을 맘대로 가져가도 좋습니다."
이 말을 듣자 융주(戎主)는 쾌히 승낙했다. "중국의 천자가 정사를 잘못하기 때문에 국구(國舅)인 신후께서 나를 불러 무도한 주유왕을 없애고 동궁을 위(位)에 세우려 하시니 이는 평소 고대하던 바로소이다."
융주는 즉시 병차 1만5천을 3대로 나누었다. 신후도 병사를 일으켜 호호 탕탕 호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마침내 오랑캐와 신군(申軍)은 연합하여 주유왕이 있는 왕성을 치게 되었다. 신후와 융주가 이끄는 연합군은 왕성을 세 겹으로 에워쌌다. 주유왕은 이 소식을 듣고 대경 실색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느냐?"
신하들이 아뢰었다.
"여산의 봉화를 올려 구원군을 청하시옵소서. 각국의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오면 그 때 안팎으로 협공하여 오랑캐와 신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유왕은 곧 여산으로 사람을 보내 봉화를 올리게 했다. 이윽고 푸른 하늘 저편에서 불길과 연기가 끊임없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일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제후는 커녕 병차 한 대도 달려오지 않았다. 제후들은 지난 날에 봉화로 몇 차례나 희롱당했기 때문에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또 그 여자를 웃기고 싶어진 모양이군.'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강성한 오랑캐 병사들의 날카로운 공격은 밤낮없이 진동했다. 드디어 성문이 부서지고 오랑캐 병사들이 성 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며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그리고 만나는 여자마다 능욕했다. 성 안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주유왕은 다급했다. 급급히 조그만 수레에다 포사와 백복을 태우고 비밀문을 열고 달아났다. 마침 사도(司徒)인 정백우(鄭伯友)가 궁성 안으로 들어 오다가 이를 보고 달아나는 왕의 뒤를 쫓아가면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왕은 놀라지 마소서. 신이 어가를 보호하리다."
그들은 함께 여산을 바라보고 도망쳤다. 그들은 도중에 쉬다가 역시 늦게야 도망쳐 오는 윤구(尹球)와 만났다. 윤구가 아뢰었다.
"융병들은 이미 궁궐을 모두 노략질했습니다. 쓸 만한 물건을 끌어내 자기들 수레에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을 질렀습니다. 모든 궁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주유왕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주유왕이 여산에 이르자, 정백은 다시 봉화를 올렸다. 불덩어리와 연기가 구천(九天)에 솟아올랐다. 그러나 구원병은 결국 오지 않았다. 오히려 여산까지 추격해온 병사들이 여산의 별궁을 에워싸고 악머구리들처럼 소리쳤다.
"음탕 무도한 임금은 도망칠 생각을 말라. 하늘의 뜻을 알고 목을 바치거라!" 기진 맥진한 주유왕은 포사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흐느꼈다. 그 때 정백이 들어와 아뢰었다.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어가를 보호하겠습니다. 우선 오랑캐의 예봉을 피하시어 이 곳을 빠져나가 신의 나라로 가시옵소서. 그 곳에서 제후들을 모아 왕성을 회복하시는 게 상책입니다."
주유왕이 목멘 소리로 부탁했다.
"이는 모두 짐의 잘못이오. 그대 뜻을 따르겠소."
정백은 즉시 여산의 별궁 앞에다 불을 질렀다. 별궁 앞에서 불길이 솟자, 융병들은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이 기회를 틈타서 정백은 주유왕을 이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장모(長矛)를 휘두르며 앞길을 열고, 윤구는 포사와 백복을 보호하 며 주유왕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그들이 얼마 가지 못했을 때였다. 융병들은 주유왕 일행이 도망친 걸 알고 즉시 풍우처럼 달려와 앞길을 가로막았다. 융병을 거느린 자는 소장(小將) 고리적(古里赤)이었다. 정백은 크게 소리치며 직접 고리적에게로 달려들었다. 서로 어우러져 교전한 지 불과 수 합만에 정백은 날카로운 창에 찔려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정백이 죽자 고리적은 즉시 주유왕이 탄 수레를 사로잡아 융주에게로 끌고 갔다. 융주는 수레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곤포를 입고 옥대를 두른 것으로 보아 주유왕이란 걸 알았다. 그러자 융주는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았다. 훌쩍 수레에 뛰어오르더니 단칼로 주유왕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어린 백복을 찔러 죽였다. 다만 포사는 죽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융주는 포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였다. 수레의 통 속에 숨었던 윤구도 끌려나와 죽임을 당했다. 융주가 포사를 자기 수레에 싣고 돌아가 비단 방장 안에서 재미를 본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융주는 매우 흡족했다. 융주는 포사를 자신의 애첩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