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序章
새로운 시대가 열리다
1. 열지 못하는 독
쏟아진 용의 거품
열지 못하는 문이라든가 열면 안 되는 칸이라는 것이 있다. 불길하다고 해서 그 곳에는 처음부터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다. 주(周)나라 궁전 창고에 오래 전부터 '열지 못하는 독'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독이란 나무 상자를 말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 하면, 놀랍게도 용(龍)의 거품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주여왕(周勵王) 말년이었다. 그 나무 상자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왔다. 궁전 내고(內庫)의 일이니만큼 즉시 왕에게 사실이 고해졌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더냐?"
왕이 궁금해 했다. 궁금해 한 것은 왕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호기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열리면 무슨 일이 생길까?' 시신(侍臣)들이 나무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심성이 없었다. 아니, 모두가 호기심으로 지켜보는 탓에 너무 서둘렀다. 그 바람에 상자 속에 있던 황금 대접이 뒤집혀져 담겨 있던 용의 거품이 바닥에 흘렀다. 그리고 용의 거품은 곧 조그만 도마뱀으로 변하여 궁중을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신하들이 도마뱀을 잡으려고 뒤쫓았으나 그 도마뱀은 후궁 쪽으로 도망쳐 달아나고 말았다. 결국 열지 못하는 나무 상자 속에서 무리하게 꺼낸 것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빈 황금 대접 하나뿐이었다. 한편 후궁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일곱 살짜리 소녀애가 이 도마뱀과 마주쳤다. 도마뱀은 어린 소녀의 치맛자락으로 뛰어들어 그 자취를 감추었다.
"에그머니나......."
이것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이 일을 알 리 없었다. 그리고 여덟 해가 지났다. 그 도마뱀과 마주친 어린 궁녀가 열다섯이 되었을 때 배가 불러왔다. 전의들이 진맥해 보고 태기(胎氣)라고 했다. 이를 보고받은 주여왕은 시집도 가지 않은 여자가 아기를 가진 것을 괴이하게 여겨 그 궁녀를 후궁의 밀실에다 감금시켰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주여왕이 붕어(崩御)했다. 태자 정(太子 政)이 그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오르니 바로 주선왕(周宣王)이다.
떠도는 말
주선왕은 북쪽 오랑캐를 징벌하려고 했다. 그래서 군대도 양성하고 무기도 많이 만들었다. 하루는 태원(太原)에서 양병(養兵)하는 것을 시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거리에서 아이들이 떼지어 손뼉치며 노래하는 걸 들었다.
月將升
日將沒
厭弧箕
幾亡周國
달이 떠오르려 하네
해는 지려고 하네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이여
주나라가 장차 망하고 마는구나
왕이 수레를 멈추게 하고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된 연유를 물어보니, 얼마 전에 붉은 옷을 입은 한 소년이 거리에 나타나 아이들을 모은 후 이 노래를 가르쳐 주고 떠났다는 것이었다. 왕은 궁으로 돌아오자 곧 삼공육경(三公六卿), 모든 신하들을 조당에 모아 놓고 거리에서 아이들이 부르던 그 노래에 대해 물었다. 대종백 (大宗伯) 소호(召虎)가 대답했다.
"염(厭)은 산에서 자라는 뽕나무(山桑)로서 활을 만드는 재목입니다. 그러므로 염호(厭弧))라고 한 것입니다. 기(箕)는 풀 이름인데 이를 엮어 화살을 담는 전통을 만듭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장차 나라에 화살로 인한 변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몹시 우려되옵니다."
주선왕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그럼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이 그런 노래를 가르쳤다는데 그 아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태사(太史) 백양부(伯陽父)가 대답했다.
"시정(市井)에 떠도는 근거없는 말을 요언(謠言)이라 합니다. 하늘이 임금을 경계(資料)하려면 형혹성(螢惑星)에게 그 뜻을 명하고, 형혹성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해서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요언을 지어 어린아이들에게 퍼뜨립니다. 그 내용은 작게는 임금 한 분의 길흉(吉兇)을 예언하기도 하고, 크게는 나라의 흥망(興亡)을 알려 주기도 합니다. 붉은 옷을 입은 어린아이는 분명히 형혹성입니다."
왕은 우울한 기색으로 듣고만 있었다. 백양부가 다시 아뢰었다.
"신이 천문(天文)을 보니, 그 징조가 왕궁 안에서 일어날 듯합니다. 화살과 활은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닐 듯합니다. 오히려 달이 떠오르고 해는 지려 한다(月將升 日將沒)라 하니 장차 여자 주인이 나라를 어지럽게 할 징조가 완연합니다. 해는 왕이며 달은 왕비를 뜻합니다. 앞으로 내궁의 주인이 나랏일에 큰 해를 끼친다는 경고입니다."
백양부의 말을 듣고 있던 왕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며 말했다.
"짐은 강후(姜后)의 어진 덕을 잘 알고 있으며 후궁의 비빈들도 다 가려 뽑은 터에 어찌 여자로 인해 재앙이 있겠소. 다만 활과 화살은 흉기이니 앞으로 만들지 말고, 있는 것은 모두 불살라 대비하야 하지 않겠소?"
백양부가 다시 아뢰었다.
"동요에서 말하고 있는 바, 떠오르고 진다는 것은 본디 당장 닥칠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상당한 세월이 지나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습니다. 위로는 왕에서부터 모든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더욱 덕을 닦아 재앙을 막을 각오를 하면 흉(兇)이 변해서 복(福)으로 되는 수도 있습니다. 굳이 화살이나 활을 불태울 것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왕은 백양부의 말에 반신 반의했다. 그리고 미심쩍은 기색으로 일어섰다.
40년 만에 태어난 아이
그날 밤, 왕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강후(姜后)에게 신하들에게서 들은 것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왕의 말을 듣고 있던 강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괴상한 일 하나를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궁중에서 생긴 일입니다."
"괴상한 일이라니...... 무슨 일이 생겼소?"
"지금 후궁 별채에 선왕(先王)때부터 있던 늙은 궁녀가 한 명 감금되어 있습니다. 그 궁녀가 십여 세 때 애를 배고 그 곳에 감금되었는데, 40년이 흐른 어젯밤에 마침내 계집아이를 해산했습니다. 40년 동안 애를 뱃속에 갖고 있다가 이제야 낳았다니 참으로 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주선왕이 크게 놀라며 강후를 다그쳤다.
"그 계집아이가 지금 어디에 있소?"
"아무리 생각해도 상서롭지 못한 일 같아서 첩이 이미 궁중 시위를 시켜 성 밖 강물에다 내다 버리게 했습니다. 아마 이제는 죽었을 것입니다."
주선왕은 즉시 그 늙은 궁녀를 불러들였다. 늙은 궁녀가 들어왔다. 왕은 궁녀에게 임신하게 된 경위를 물었다. 궁녀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그 내용이 앞서 말한 '열지 못하는 독'이 깨어지고 그 속에서 도마뱀이 나와 자신의 치마폭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 얼마 후 배가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선왕(先王)께서 천한 것이 시집도 가지 않고 아기를 가졌다 하여 깊숙한 방에다 감금하셨습니다. 그런 지 40년이 지난 어젯밤에야 배가 몹시 아프더니 계집애를 겨우 낳았습니다. 궁 지키는 무사들이 이 사실을 왕비께 아뢰온즉 왕비께서 그런 괴물은 궁 안에 둘 수 없다 하시면서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성 밖 강물에다 던져 버렸으니 이는 모두 제 잘못이고 제 허물입니다. 마땅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늙은 궁녀는 체념한 듯 머리를 조아렸다.
"이는 선조(先朝) 때 일이다. 너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물러가거라"
주선왕은 궁녀를 물리친 후 궁 지키는 무사를 불러 분부했다.
"다시 강에 가서 내다버린 계집아이를 찾아 오너라." 이튿날 아침, 왕은 보고를 받았다.
"흐르는 물에 떠내려갔는지 아니면 짐승의 먹이가 되었는지, 찾을 수가 없더이다."
주선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날, 조례 때 왕은 태사 백양부에게 명하여 어젯밤의 이야기를 해주고 그 갓난 계집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 일이 길(吉)인지 흉(兇)인지 점쳐 보게 했다. 백양부가 점괘를 맞춰 보고 나서 괘사(卦辭)를 왕에게 바쳤다.
哭又笑 笑又哭
羊被鬼呑 馬逢犬逐
愼之愼之 厭孤箕
울다가 웃다가, 웃다가 또 울도다
염소는 귀신에게 잡아먹히고, 말은 개에게 쫓기는도다
삼가하고 또 삼가하라, 산뽕나무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이로다
주선왕은 그 괘사에 대해 물었다. 백양부가 하나하나를 설명했다.
"십이지(十二支)로 미루어보면 양(羊)은 미(未)이며, 말(馬)은 오(午)입니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운다는 것은 슬픔과 기쁨을 말하는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 추측해 볼진대 요기(妖氣)가 비록 궁(宮)을 떠났으나 아직 없어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뽕나무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에 연관이 있습니다." 왕은 매우 걱정이 되었다.
"성 안이고 성 밖이고 모조리 조사하여라. 죽었거나 살았거나 강물에서 건져낸 계집아이를 바치는 자에게는 상으로 비단 3백 필을 주리라. 또한 감춰 두거나 남몰래 기르는 자가 있거든 누구든 관가에 알리도록 하라. 역시 같은 상을 내리겠노라. 만약 고의로 숨기는 자 있으면 그 집안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중죄인으로 다스려 참수할 것이로다."
왕은 상대부(上大夫) 두백(杜伯)에게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하대부(下大夫) 좌유(左儒)를 불렀다.
"사시관(司市官)들에게 명령을 내려라.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을 만들지도 팔지도 말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무조건 참형으로 다스려라."
참으로 무시무시 한 분부였다. 그래서 모든 관리들은 두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며 엄하게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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