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떤 사내가 검은 말을 타고 전쟁터에 나갔다. 그러나 그 사내는 워낙 겁이 많았다. 적군이 두려워 감히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아 얼굴에 다른 사람의 피를 바르고 죽은 시늉을 한 채 시체더미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타고 갔던 말은 적군이 전리품으로 챙겨가 버렸다. 적군이 철수하자 그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겁쟁이라는 말을 듣기는 싫어 근처에 있던 죽은 말의 꼬리를 베어냈다. 자신이 타고 온 말과는 다른 흰 말의 꼬리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서는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물었다.
"자네가 타고 갔던 말은 어찌하고 걸어서 돌아왔는가?"
그러자 그 사내가 대답했다.
"내 말은 용감히 싸우다가 죽었소. 그걸 기념하기 위해 이렇게 말꼬리를 베어온 것이오."
"자네가 타고 갔던 말은 검은 말이었는데, 어떻게 그 말꼬리는 희단 말인가?"
사내는 할 말을 잃고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그 사내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백유경>
일흔일곱번째 이야기 - 오백명의 궁녀
비로택가왕은 사위국의 국왕이 된 후 석가족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때 한 불제자가 길을 가다가 비로택가왕의 군사를 만나 사정을 알게 되자 급히 부처님께 달려가 알렸다. 이에 부처님은 말라죽은 나무아래 앉아서 왕의 군사들을 기다렸다. 이윽고 비로택가왕이 군사를 이끌고 지나가다가 부처님을 보자 코끼리에서 내려 말했다.
"부처님, 왜 나뭇잎이 풍성한 나무 아래 앉아 계시지 않고 하필이면 말라죽은 나무 아래 앉아 계시는 것입니까?"
"내 종족이 곧 이 나무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을 생각하고 있었소."
비로택가왕은 부처님이 자신의 종족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심을 알아차리고 군사를 돌렸다. 그후 왕은 오백 명의 여자들을 골라 궁녀를 삼았다. 궁녀가 된 여자들은 왕을 몹시 원망하며 그를 '종의 자식'이라고 욕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왕은 크게 화를 내며 그 궁녀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을 내렸다. 병사들은 궁녀들의 손발을 자른 후 고랑 속에 던져버렸다. 그때 궁녀들은 고랑 속에서 고통을 참으며 부처님을 생각했다. 이에 부처님은 제자를 보내 궁녀들을 위해 마지막 설법을 전했다. 궁녀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듣고 모두 죽은 후 천상에 태어났다. 제석천은 바라문으로 변신하여 궁녀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화장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비로택가왕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기에 칠일 후 불에 타 죽을 것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너무나 두려웠다. 마침내 칠일째가 되자 그는 불을 피하고자 궁녀들과 함께 호숫가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 즐겼다. 그러다가 배를 탔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더니 그만 배에 불이 나서 맹렬한 기세로 번지기 시작했다. 비로택가왕은 미처 호수로 뛰어들기 전에 배 위에서 불에 타 죽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