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을 잔뜩 집어먹은 등통은 더욱 승상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였다. 머리로 바닥을 들이받아 이마가 온통 피로 물들었지만, 신도가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나라 문제 때의 승상 신도가는 양나라 사람이다. 그는 강한 화살을 잘 쏘았으며, 유방을 따라 항우를 쳐서 많은 공훈을 세웠다. 그리고 한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룩한 후 반란군 경포의 군대를 격파하고 나서 도위가 되었다. 문제 때 이르러서는, 예전에 고조를 따라 종군한 2천 석 이상의 봉록을 받던 관리들을 모두 관내후에 봉하였다. 그러나 이때 신도가는 겨우 5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승상 장창이 면직된 후, 문제는 황후의 동생 두광국을 승상으로 삼고 싶었다. 두광국은 어질고 덕행이 있는 사람이었다.
"광국을 좋아하지만, 아마 그를 승상의 자리에 앉히면 천하가 짐에게 사사로운 정에 얽매인다고 욕할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두광국을 승상으로 앉히지 못하였다. 당시 한나라에는 고조 시대의 대신들이 거의 다 죽었기 때문에, 승상의 자리에 앉힐만한 인물이 없었다. 문제는 적임자를 찾던 중 고심 끝에 어사대부로 있는 신도가를 승상으로 등용하고, 그를 고안후로 삼았다. 그러나 식읍은 종전대로 5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신도가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운 청탁 따위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무렵 태중대부 등통은 문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문제는 남색을 즐겨서 곱상하게 생긴 등통을 늘 가까이에 두고 여느 신하보다 특별 대우를 해주었다. 어느 날 신도가가 입조했을 때, 등통은 문제의 곁에 바짝 붙어서서 승상에 대한 예의도 차리지 않고 거만하게 굴었다. 주청할 것을 다 끝낸 후 신도가가 문제에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신하를 총애하여, 그 신하를 부귀하게 만드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예절에 있어서 엄숙하게 하지 않는 것은 기강을 깨뜨리는 일이 되니 마땅히 경계해야 할 줄로 압니다."
문제는 승상이 등통을 두고 그런 말을 하고 있다고 직감하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러나 짐이 그를 사사로이 가까이 하는 것이니 승상께서는 너무 허물을 탓하지 마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오."
신도가는 문제에게서 물러나온 후, 곧바로 승상부에 들러 등통에게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만약 오지 않으면 참형에 처하리라."
이같은 승상의 출두명령을 받고 등통은 승상부로 가기 전에 문제에게 가서 호소하였다.
"폐하! 승상이 저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잠시 생각한 뒤에 등통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염려 말라. 우선 승상의 명령이니 승상부로 가서 부름에 응하라. 짐이 이제 사람을 보내 그대를 살려주도록 조처할 것이다."
등통은 곧 승상부로 갔다. 그는 갓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조아려 신도가에게 사과하였다. 신도가는 태연하게 앉은 채 짐짓 예를 갖추지 않고서 등통을 꾸짖었다.
"대체 너는 한나라 조정을 무엇으로 아는가? 벌써 고황제의 위엄을 잊었는가? 네가 뭔데 일개 말단 신하로 황제만이 오를 수 있는 전상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며, 감히 대신들에게 희롱을 일삼는가? 이것은 고황제에 대한 대단한 불경죄다. 그 죄는 마땅히 참형에 해당한다. 형리는 지금 당장 저 죄인을 참형에 처하라."
신도가가 이미 세상에 없는 '한고조'를 들먹인 것은, 황실의 위엄은 현재의 황제인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등통에게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등통은 더욱 승상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였다. 머리로 바닥을 들이받아 이마가 온통 피로 물들었지만, 신도가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문제는 이제 승상이 등통을 어느 정도 벌주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자에게 부절을 보내어 죄를 용서하게 하였다. 사자를 통해 전한 문제의 말은 이러하였다.
"등통은 짐이 귀여워하는 신하이니 승상은 그를 용서하기 바라오."
신도가는 그제서야 참형의 명을 거두어들이고 등통을 돌려보냈다.
"폐하! 승상이 저를 거의 죽일 뻔하였습니다."
등통이 울면서 말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등통의 말을 못들은 체 하였다. 승상이 조정 군신들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그 본보기로 등통을 혼내준 것임을 내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강 : 윗사람의 권세를 빌려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은 조직의 기강을 해이하게 할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그 존망마저 위태롭게 한다. 미리 이런 사람을 처벌함으로써만 조직의 기강은 유지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