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2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솜옷 한 벌의 온정으로 원수를 용서하다<범수>
위나라 출신인 범수는 젊은 시절 중 대부인 수가를 섬겼다. 수가가 위나라 소왕의 사자로 제나라에 갔을 때 범수도 따라가게 되었다. 제나라 양왕은 말을 잘하는 범수에게 반하여 술과 쇠고기와 금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범수는 사신 일행 중 자기 개인만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없다하여 극구 사양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은 곧 수가에게 알려졌고,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범수가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알려주었기 때문에 선물을 보낸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신인 나를 놔두고 어찌 범수에게만 특별히 선물을 보낸단 말이냐.' 수가는 범수를 불러 술과 고기만 받고 금은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위나라로 돌아온 수가는 범수를 크게 꾸짖은 후 재상인 위제에게 그것을 고자질을 하였다. 위제는 곧 범수를 불러 매질을 가하였다.
"이실직고하렸다! 우리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말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모함이 분명합니다."
범수는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위제는 듣지 않고 더욱 매질을 가하게 하였다. 범수는 매질을 당하여 갈비뼈가 나가고 이빨이 부딪혔다. 정신을 잃고 늘어지자, 그의 몸뚱이를 멍석으로 말아 뒷간에 갖다 버렸다. 그리고 술에 취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멍석 위에 오줌을 깔리게 하였다. 정신이 든 범수는 지린내를 맡으며 온갖 치욕을 견뎌냈다. 그리고 가만히 멍석 밖으로 내다보니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몰래 감시자를 불러 말하였다.
"여보시오. 나를 좀 살려주시오. 그러면 먼 훗날 반드시 그 은혜를 갚겠소."
마침 딱하게 생각하고 있던 감시자는 위제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사람이 오줌을 깔려도 꿈쩍 안하는 걸 보면 범수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집안에서 송장이 썩게 할 수는 없지. 멀리 시구문 밖에 내다 버려라."
술에 의한 위제는 무심결에 이렇게 말하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범수는 이름을 장록이라 속이고 정안평의 집에 숨어살았다. 이때 마침 진나라 소왕이 왕계를 위나라 사신으로 보냈다. 정안평은 왕계에게 범수를 소개하여 진나라로 함께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범수가 왕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진나라로 갈 때, 마침 진나라 재상 양후가 국경 부근을 순행중이었다.
"저기 저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이 누굽니까?"
범수가 수레 안에서 살짝 밖을 엿보고 왕계에게 물었다.
"양후입니다."
"양후는 진나라 정권을 쥐고 흔들면서 다른 나라에서 객인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양후가 수레를 세우거든 제가 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마십시오."
곧 양후가 다가와 수레를 세웠다.
"혹시 위나라에서 객인을 데리고 오지는 않았겠지요? 그런 자들은 입만 살아서 남의 나라를 혼란시키게 만들뿐입니다."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양후의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으나, 왕계는 짐짓 태연을 가장하여 범수가 시키는대로 거짓말을 하였다. 양후는 다시 말을 타고 저 멀리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뒤가 걸립니다. 잠시 수레에서 내려 숨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반드시 양후가 되돌아와서 수레를 수색할 것입니다."
범수는 왕계에게 말하고, 곧 수레에서 내려 숲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런데 정말 방금 양후가 사라진 곳에서 흙먼지가 일어나며 말이 급히 달려왔다. 가까이 온 양후는 수레를 수색한 후 객인이 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가버렸다. 왕계는 범수의 비범함을 알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나라에 들어온 범수는 어느 날 소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만나줄 것을 요청하였다. 소왕은 범수를 불렀다. 범수는 소왕을 이궁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미리 그곳에 가서 기다렸다. 그때 그는 짐짓 모른 체하고 왕의 명령 없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여보시오! 감히 어디라고 무엄하게 발을 들여놓는 거요?"
환관이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요?"
범수가 물었다.
마침 그때 소왕이 나타났다.
"쉬잇! 대왕의 행차이시다."
환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범수는 모르는 척 큰 소리로 물었다.
"진나라에 어디 대왕이 있단 말이오? 진나라에는 다만 태후와 양후가 있을 뿐이오."
범수가 환관과 주고 받는 이야기를 다 들은 소왕은, 환관을 야단쳐 물러가게 한 뒤 범수에게 말하였다.
"진나라에 대왕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오?"
"감히 말씀드립 니다. 대왕께서는 지금 위로는 태후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간신들의 아첨에 미혹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궁중에 들어앉아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정사를 간신들의 손에만 맡기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해져 충신과 간신의 구별조차 못하십니다. 그것이 심히 걱정스럽다는 말입니다."
소왕은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진정으로 선생의 말이 가슴을 치는 구려. 앞으로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싶소."
범수는 이렇게 하여 진나라의 객경이 되었다. 그후 범수의 계책은 소왕에 의해 받아들여져 많은 공과를 올렸다. 범수의 충언에 의하여 실권을 장악한 소왕은 나중에 태후를 패하고 양후,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 등 정사를 좌지우지하던 무리들을 함곡관 밖으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소왕은 범수에게 응 땅을 봉지로 내리고 응후에 봉하였다. 이렇게 재상의 지위에 오르고 나서도 범수는 '장록'이란 이름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범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려고 할 때였다. 위나라에서는 곧 수가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범수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수가가 묵고 있는 숙사를 찾아갔다.
"아니, 그대는 범수 아닌가?"
수가는 깜짝 놀랐다.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래 지금은 무엇을 하나?"
"남의 집에 고용되어 품팔이를 하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지요."
"어쩐지 몹시 곤궁해 보이는군."
예전의 일로 양심의 가책을 받은 수가는 범수에게 자신의 솜옷 한 벌을 꺼내주었다.
"그런데 진나라에서는 장록이라는 분이 재상이라 들었는데, 그분에 대해서는 좀 아는가?"
"훌륭하신 분이지요."
범수는 자신이 바로 당사자인 '장록'이면서 짐짓 아닌 체하고 말하였다.
"지금 나의 일이 그분의 의중에 달려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네.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어. 그래서 그분과 연결을 해줄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도와줄 수 있겠나?"
"그런 일이라면 염려 마십시오. 저희 주인 어른께서 재상과 친합니다."
"그런데 먼길을 오느라 내 말이 병들고 수레의 바퀴가 망가졌네."
"염려 마십시오. 큰 수레와 말 네 마리를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범수는 곧 말 네 마리가 끄는 큰 수레를 직접 몰고 왔다. 수가는 범수와 함께 수레를 타고 진나라 재상의 관저로 갔다. 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범수를 보고 절을 하였다. 수가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재상의 관저에 이르러, 범수는 먼저 들어가 재상께 면회를 신청하겠다며 문 안으로 사라졌다. 한참 있어도 범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범수가 나오지 않는데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가?"
기다리다 못한 수가는 문지기에게 물었다.
"범수라는 사람은 없는데요?"
"아까 나와 함께 이 수레를 타고 온 사람 말일세."
"그분은 바로 우리의 승상 어른이십니다."
"무엇이? 그분이 바, 바로 '장록'이라는 그 승상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수가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웃옷을 벗은 채 무릎걸음으로 걸어서 단하에 이르렀다. 그때 범수가 재상의 옷차림으로 점잖게 나타났다.
"승상어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승상께서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시리라고는 예전에 미처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다시는 천하의 글을 읽지 않을 것이며, 천하의 일에 관여치 아니할 것입니다. 저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승상께서 마음대로 하십시오."
범수가 물었다.
"대체 그대의 죄가 얼마나 되기에 그러시오?"
"저의 머리털을 뽑아 그 죄를 헤아려도 모자랄 판입니다."
"내가 알고 있기에 그대의 죄는 세 가지다. 그대는 전날 내가 제나라에 내통했다고 위제에게 거짓으로 고하였다. 그것이 첫 번째 죄이다. 위제가 나를 매질하여 멍석에 말아 뒷간에 갖다 버렸을 때 그대는 말리지 않았다. 그것이 두 번째 죄다. 술취한 자들로 하여금 내 몸에 오줌을 깔리게 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
범수는 이렇게 수가의 죄를 낱낱이 열거하였다.
"죽여주십시오."
수가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대 목숨만은 살려준다."
"네에?"
죽는 줄로만 알았던 수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금 전 초라한 행색으로 가장하였던 나에게 그대가 솜옷 한 벌을 주었다. 그 솜옷이 그대를 살렸다."
범수는 수가를 용서해 주었다.
용서 : 작은 불씨가 눈을 녹이듯, 온정의 손길은 화해의 불씨가 된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라. 큰 선물은 사람을 단지 놀라게 할 뿐이지만,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들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