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열한번째 이야기 - 도둑도 도둑 나름
아주 먼 옛날에 한 삼촌과 영리한 조카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은 밤낮으로 아름다운 천을 짜서 국왕에게 바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직공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들의 생활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국왕의 창고에 주단을 바치러 갔다가, 그곳에 온갖 보물이 산처럼 쌓인 것을 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왕의 창고에는 저렇게 보물이 많구나. 우리가 한 목숨 부지하려고 이렇게 애쓰느니, 차라리 보물을 훔쳐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
의기투합한 삼촌과 조카는 사람이 없는 틈을 노려 땅굴을 파두었다가 국왕의 창고에 몰래 숨어들어가 수많은 보물을 훔쳐내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아침, 창고지기는 보물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황급히 국왕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국왕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도둑맞은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지 말라. 그렇게 하면 도둑은 우리들이 공사다망해서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줄 알고 반드시 다시 보물을 훔치러 올 게 분명하다. 너희들은 창고 속에 숨어서 그들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가, 일망타진해서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창고지기는 왕의 명령대로 했다.
며칠이 지나도 궁궐이 조용하자, 삼촌과 조카는 다시 도둑질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때 조카가 삼촌에게 말했다.
"삼촌은 연세도 많고, 몸도 허약하시니 만일 창고지기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도망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만약 삼촌이 그들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젊고 힘센 제가 반드시 복수할 테니까요."
그렇게 해서 삼촌이 먼저 앞장서서 땅굴로 들어갔다가 매복해 있던 병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뒤에 있던 조카는 일이 잘못된 것을 눈치채고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쳐버렸다. 병사들은 고함을 쳐서 창고지기를 불렀지만, 조카는 이미 흔적도 없이 도망가버린 후였다. 창고지기는 도둑 한명이 달아난 사실을 국왕이 알면 벌을 받을까 두려워 삼촌 도둑을 죽여 입을 막기로 했다.
그 다음날 아침, 창고지기는 삼촌 도둑의 머리를 국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국왕은 일개 늙은이가 감히 혼자서 그 많은 보물을 훔쳤을 리 없으므로 반드시 일당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왕은 삼촌 도둑의 시체를 사거리에 내놓고 뭇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명령하였다.
"병사들을 보내 몰래 지키고 있다가, 울면서 시체를 수습하려는 자가 나타나면 같은 패가 분명하니 잡아오도록 하라."
병사들은 하루 동안 사거리를 지켰지만, 아무런 낌새도 눈치챌 수 없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자 먼 곳에서 온 상인들이 마차에 화물을 가득 싣고 줄줄이 성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 반대 방향에서도 여러 대의 마차가 들이닥쳐 그만 사거리는 북새통을 이루게 되었다. 양쪽의 상인들은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소란을 피우다가 급기야 싸움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볏짚을 가득 실은 두 대의 마차가 쓰러지자 도둑의 시체는 볏짚 속에 보기 좋게 묻히게 되었다.
다음날, 병사들은 전날의 사건을 국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국왕은 시체를 지키던 병사들에게 모두 철수할 것을 명령하고 유능한 정탐꾼을 보내 비밀리에 지키고 있다가 볏짚에 불을 놓으려고 하는 자가 나타나면 잡아오도록 했다. 이번에 조카 도둑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몇몇의 사람들을 데리고 불춤을 추는 것처럼 위장하여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불춤을 추는 모습은 갈수록 흥겨워져 수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국왕이 보낸 정탐꾼마저 자기 임무를 잊어버린 채 불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카는 사람들이 불춤에 넋이 빠져 있는 동안 마치 실수인 것 마냥 볏짚 위로 불을 던져버렸다. 볏짚은 삽시간에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구경꾼들은 놀라서 일시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탐꾼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불춤을 추던 사람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정탐꾼이 황급히 국왕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보고하자, 국왕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더 많은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타고 남은 뼈를 수습하러 오는 자가 있는지 지키게 했다. 국왕은 분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뼈를 수습하러 오는 자는 계책에 아주 능한자가 분명하니 잡기만 하면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날 저녁 조카 도둑은 좋은 술을 많이 챙겨 성안으로 들어갔다. 뼈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며칠 동안 계속해서 근무를 했던 터라 피로해 있었다. 그래서 좋은 술을 보자 군침이 돌아 그만 도둑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대취해서 동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카 도둑은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을 모두 묶어놓고 빈 술병에 삼촌의 뼈를 담아가지고 유유히 성을 빠져 나왔다. 다음날 보고를 받은 국왕은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었다.
"그 도둑은 정말 교활한 놈이구나! 내가 그 놈을 잡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국왕은 마침내 기막힌 꾀를 생각해냈다. 그는 강변의 정원에 아름다운 신방을 꾸며놓고 수많은 병사들로 하여금 그 주위에 매복하게 한 다음 절세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자기의 딸을 곱게 단장시켜 신방에 머무르게 했다. 그리고 공주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신방에 들어오면 손을 잡고 놓지 말아라. 그리고 비명을 지르도록 해라.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 도둑을 잡을 수 있을 게야."
국왕은 속으로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내 딸이 절세미인이니, 그 도둑놈은 분명히 걸려들고 말리라.' 과연 며칠 후 한밤중에 조카 도둑이 그 부근에 나타났다. 먼저 그는 강의 상류에서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물에 띄워 보냈다. 파수를 보고 있던 병사들은 강에 이상한 물체가 보이자 불을 비추어 보았으나, 그저 통나무에 지나지 않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몇 차례 똑같은 일이 벌어지자 병사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그제서야 조카 도둑은 통나무 옆에 붙어 강을 내려와 신방 안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공주가 자다가 깨보니 옆에 생면부지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공주는 황급히 그 남자의 옷을 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자 조카 도둑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옷을 잡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손목을 잡아야 도망가지 못할 것 아니오?"
그 말을 들은 공주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옷 대신 조카 도둑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의 손목을 준비해 간 터라 공주는 그것을 잡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공주가 죽은 사람의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자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뺀 다음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 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파수를 보던 병사들이 공주의 비명을 듣고 달려왔으나, 이미 조카 도둑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날이 밝은 후, 공주와 병사들은 간밤에 있었던 일을 국왕에게 보고했다. 국왕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놈은 정말 영리해서 세상에 대적할 자가 없구나!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잡을 수가 없으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래지 않아 공주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열 달이 차자 희고 통통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에 국왕은 또 계책을 꾸며 유모에게 아이를 안고 성안의 이곳저곳을 왔다갔다 하라고 명령하면서 말했다.
"이 아이에게 입맞추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붙잡도록 하라."
유모는 국왕의 명령대로 아이를 안고 성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해가 저물었지만 아이에게 입맞추려고 하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루종일 먹을 것을 변변히 먹지 못한 아이가 큰 소리로 울면서 보채는데, 마침 근처에 우유 장수가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조카 도둑이었다. 우유 장수는 아이에게 우유를 건네주면서 자연스럽게 아이의 볼에 입맞추었다. 유모는 궁궐로 돌아와 국왕에게 말했다.
"어제 하루 종일 성안을 돌아다녔지만 아이에게 입맞추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우유를 살 때 우유 장수가 아이에게 입맞추었을 뿐입니다."
국왕이 물었다.
"그 우유 장수를 잡아오지 않고 뭘 했나?"
유모가 대답했다.
"아이가 배가 고파 울어대서 우유를 사러갔던 것입니다. 우유 장수들은 우유를 팔 때 아이들에게 습관처럼 입을 맞추곤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조건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국왕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국왕은 유모에게 계속 성안을 돌아다니도록 하고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를 따르게 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아이에게 접근하는 자는 잡아오도록 하라."
이번에 조카 도둑은 몇 병의 맛좋은 술을 가지고 갔다. 그는 유모와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술을 권했다. 유모와 그 일행들은 조카 도둑의 감언이설과 맛좋은 술의 향기에 혹해서 너 한잔 나 한잔 하면서 술을 마셔대다가 곧 흠뻑 취하고 말았다. 조카 도둑은 그틈을 타서 아이를 안고 도망가버렸다. 깨어난 후 아이가 없어진 사실을 안 유모와 그 일행은 서로 멍하니 얼굴만 쳐다보다가 안색이 흙빛이 되어 황급히 국왕에게 달려가 알렸다. 국왕은 화가 나다 못해 말도 나오지 안았다. 조카 도둑은 아들을 데리고 이웃 나라의 수도로 가서 그 나라 왕을 알현하기를 요청했다. 왕은 조카 도둑을 접견하고 나서 그가 천문지리를 비롯해 모르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은 그의 박식함에 감탄하여 그를 대신에 임명했다. 그러던 어느날 왕이 말했다.
"우리 나라에 자네만큼 총명한 사람도 없는 듯하니, 내 딸자식을 시집보내려고 하네. 이 어찌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조카 도둑은 급히 대답했다.
"대왕께서 이렇게 저를 아껴주시니 무척 송구스럽습니다만, 저는 감당할 수 없나이다. 만일 대왕께서 저를 가련히 여기신다면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사신을 조카 도둑의 본국에 보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태자가 귀국의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기를 바란다고 전하게 했다. 국왕은 이웃 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여 전언을 듣고 곧 혼사를 승낙했다. 하지만 속셈은 달랐다. '이 도둑놈이 정말로 교활하구나. 이번에도 술책을 꾸며 내 딸아이마저 빼돌리려고?' 국왕은 곧 사자를 이웃 나라에 급히 파견해서 이렇게 요구했다.
"귀국의 태자가 내 딸아이를 아내로 맞고자 한다면, 반드시 직접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국왕은 병사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고서는 구혼자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카 도둑은 그 소식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직접 간다면, 국왕이 알아차리고 당장 잡으려 들 텐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그는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자신을 비호해주는 왕에게 달려가 말했다.
"대왕께서 저를 직접 보내시려면, 부디 오백 명의 정예 기병을 대동하게 하셔서, 우리 나라의 위풍당당함을 보이게 하소서. 그래야만 제가 갈 수 있나이다."
왕은 조카도둑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결혼식 날이 되자, 조카 도둑은 예복을 차려입고 이백오십 명의 기병을 선두에 두고 나머지 이백오십 명의 기병은 후위에 배치한 채 위풍당당하게 본국으로 돌아왔다. 궁궐 앞에 이르자 그는 말을 세우고 꼼짝하지 않았다. 공주의 아버지가 궁 밖으로 나와 조카 도둑을 자세히 살펴보니 비범한 재능이 엿보여 속으로 은근히 감탄하였다. 국왕은 직접 말 앞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내게 사실을 말해주게나. 내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잡으려고 했던 도둑이 바로 자네 맞지?"
조카도둑은 말 위에서 웃으며 예를 표했다.
"맞습니다. 바로 접니다!"
국왕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천하에 자네의 총명함을 따를 자가 없네그려. 좋네! 내 딸아이를 자네에게 주겠네."
이렇게 해서 조카 도둑과 공주는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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