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1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새는 나무가지를 골라서 앉는다 - 공자
"새는 나무가지를 골라서 앉을 수 있으나, 나무가지가 새를 택하여 앉게 할 수는 없다...."
공자는 자신을 '새'에, 나라를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결국 그는 평생토록 자신이 앉을 '나무'를 찾지 못한 것이다. 공자의 이름은 구이고, 자는 중니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이었으나, 나라가 망하고 노나라로 피난하였다. 이름은 흘이고, 자는 숙량인 아버지와 성이 안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공자는 태어났다. 흘은 원래 70세가 넘도록 아들이 없어 친구가 자신의 딸을 흘에게 시집보내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공자이다. 공자는 어린 시절부터 장난을 할 때도 늘 예식에 쓰이는 그릇을 차려놓거나, 예절을 행할 때 필요로 하는 행동이나 말씨를 흉내내곤 했다.
성인이 된 공자는 노나라 귀족인 계손씨 집안의 일을 다스리는 가신이 되었다. 그때 그는 창고의 곡식을 들이고 내는 일을 맡았는데, 재고량이 언제나 고르게 유지되어 넘치거나 모자라는 법이 없었다. 또 목축의 일을 맡았을 때는 가축의 번식과 성장이 눈에 띄게 번성하였다. 그후 공자는 예절에 관한 학문을 익혔으며, 많은 제자들을 계속하여 길러냈다.
노나라 정공 때 공자는 중도라는 도시의 시장이 되었다. 그가 정사를 잘 베풀자, 불과 1년만에 사방의 모든 도시에서 그의 정사를 본받았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그는 곧 나라의 행정을 관장하는 벼슬인 사공이 되었으며, 다시 나라의 법을 관장하는 대사구로 승진하였다. 어느 날 노나라 정공은 제나라 경공과 협곡이라는 곳에서 회견을 갖게 되었다. 이 회견은 명분상 두 나라가 서로 화친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으나, 그 뒤에 숨은 속셈은 제나라에서 노나라 왕 정공을 사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략을 눈치챈 공자가 정공에게 말하였다.
"이 회견은 마땅히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좌사마와 우사마를 거느리고 가셔야 합니다."
정공은 공자의 말을 듣고 곧 군사를 관장하는 장관인 사마를 좌우에 거느리고 회견 장소로 갔다. 물론 공자도 따라갔다.
"오늘은 두 나라가 친교를 맺는 좋은 날이니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나라 관원이 먼저 이렇게 말한 뒤 악사들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그런데 악사들은 손에 깃발과 무기를 들고 있었으며, 두드리는 북소리도 매우 시끄러웠다. 공자는 벌떡 일어서서 말하였다.
"이 자리는 두 나라가 친교를 맺는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저런 저속한 음악을 연주해서는 안 됩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제나라의 경공은 곧 음악을 멈추게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제나라 악사들이 북을 울리며 회견장을 시끄럽게 만들었으나, 그때마다 공자가 일어나 제지시키는 발언을 하였다. 이때 제나라가 무기를 든 악사들을 대동한 것은 시끄러운 음악으로 좌중을 혼란스럽게 한 후, 불시에 덤벼들어 노나라 정공을 포박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것을 안 공자는 말로 악사들의 천박한 음악을 제지하여, 제나라 경공으로 하여금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악사들을 물리치게 만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단호한 말과 태도로 제나라 경공을 설득하여 노나라에서 탈취해간 영토를 돌려받았다. 공자의 이러한 소문이 알려지자, 초나라의 소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초청하였다. 이에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은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만약 공자가 초나라에 가서 등용된다면 초나라는 더욱 강성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작은 나라들은 더욱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니 공자가 초나라로 가는 것을 막아야만 합니다."
진나라와 채나라는 군사를 풀어 공자 일행이 초나라로 가는 길목을 막았다. 평원에서 진나라와 채나라의 군사들에게 포위된 공자가 탄식하여 말하였다.
"시경에 이르기를 '들소도 아니요, 범도 아니면서 저 넓은 벌판에서 방황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는데, 우리들이 바로 그런 신세로다. 내가 평생 잘못한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 고난에 빠져야 한단 말인가?"
그때 제자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도리는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큰것입니다. 너무 커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들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닥친 것이니, 저들의 우매함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니 어찌 근심이 되지 않겠는가?"
공자가 다시 한탄하였다. 그러자 또 다른 제자인 안회가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근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소인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받아들여지지 않는데에서 참다운 학덕을 겸비하고, 지고한 인격을 지닌 군자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공자 일행이 벌판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초나라에서는 곧 군사를 보내어 진나라와 채나라의 군사를 물리쳤다. 그리고 공자 일행을 무사히 초나라로 안내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천하를 두루 돌면서 도와 덕을 가르쳤다. 그러나 공자를 두려워하여 어떤 왕들도 그를 높이 등용치 않았으므로, 그는 자신의 뜻을 크게 펼칠 수가 없었다. 공자가 위나라에 머물 때 경인 공문자가 장차 태숙을 치고자 하여 좋은 계략이 없는가 물은 적이 있었다. 공자는 단 한마디로 모른다고 잘랐다. 그로 인하여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새는 나무가지를 골라서 앉을 수 있으나, 나무가지가 새를 택하여 앉게 할 수는 없다...."
공자는 이렇게 자신을 '새'에, 나라를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결국 그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 나라를 떠돌았으나, 평생 자신이 앉을 '나무'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이런 말도 하였다.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한 사람은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도 이 세상에서 먹혀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한 나머지 다음과 같이 외치기도 하였다.
"아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이 세상에는 없구나!"
그후 공자는 전부터 전해내려오던 시 3천여 편을 305편으로 정리하여 "시경"을 완성하였으며, 또한 "서경"을 정리하여 옛 성인들이 남긴 시, 서, 예, 악을 비로소 바르게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공자는 만년에 이르러 주역을 익혔으며, 노나라 역사의 기록을 바탕으로하여 "춘추"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말년에 공자가 병들었을 때, 자공이 문병을 갔다. 그때 마침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서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자공아, 어찌 이토록 늦게 왔느냐. 태산은 무너지는가, 양주는 꺾이는가, 철인은 시드는가..."
공자는 이렇게 노래를 부르듯 자공에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7일 후에 공자는 죽었다. 그때 나이 73세였다. 공자의 제자는 모두 3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하며, 그 중에서 특히 육예에 통달한 제자만 72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공자가 남긴 많은 책들 가운데 대표적인 저술로 "논어"가 있다.
지위 : 직접 권좌에 앉지 않더라도 자신을 숭앙하는 이들이 많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공자는 안주할 나라를 찾지 못했지만 그의 사상은 여러 나라의 통치철학으로 추앙됐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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