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왕(吳王) 비가 반역하자 동구(浙江省 南部)사람들은 오왕 비를 베고 봉우산(浙江省 永庸縣 동쪽)을 지키며 한나라에 신하로 복속했다. 그래서 제54에 <동월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민월(福建省)의 왕 무저(無諸)와 월의 동해왕(東海王) 요(搖)는 모두 월왕 구천(句踐)의 후손이니 그들 성씨는 추(騶)씨이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진에서는 그들 왕위를 모두 폐하고 군장(君長)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영토를 민중군(福建省)으로 편입시켰다. 그 후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하게 되자 무저와 요는 월인들을 이끌고 파양(江西省) 현령 오예(吳芮)에게 귀순했다. 오예는 이른바 파군이라 불리운 인물로 제후들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무렵에는 항우가 제후들을 호령하고 있었는데 항우는 무저와 요를 왕으로 삼지 않았다. 그래서 무저와 요는 반발하여 초(楚)에 붙지 않았다. 한(漢)이 항우를 칠 때 무저와 요는 월인들을 이끌고 유방을 도왔다. 그래서 한나라 5년에는 무저를 민월왕으로 삼았고 민중군 옛 땅에서 왕이 된 무저는 동야(東冶:福建省)에 도읍하게 되었다. 효혜제 3년에 황제는 고조 때 세운 월나라의 공적을 칭찬했다. "민군 요는 공적이 많았다. 그의 백성들도 그를 잘 따른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요(搖)를 동해왕으로 삼아 동구에 도읍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동구왕이라 했다. 그 후 수세대가 지났다. 효경제 3년에 오왕 비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민월을 자기 편으로 넣으려 했다. 그때 동구는 오를 따랐고 민월은 오에 협조하지 않았다. 오군이 패배하자 동구에서는 한나라가 내 건 현상금을 받고 단도(丹徒:江蘇省)에서 오왕 비를 살해했다. 그래서 동구 사람들은 모두 주살을 모면하고 귀국할 수가 있었다. 오왕의 아들 자구(子駒)는 민월로 도망해 있었다. 그는 동구가 자기 부친을 죽인 사실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수시로 민월이 동구를 칠 것을 권유하곤 했다. 건원(建元) 3년에 드디어 민월은 군사를 동원해 동구를 쳤다. 동구는 포위되어 식량이 다해 항복 직전에 있게 되었다. 동구는 사자를 급히 황제에게 보내놓고 있었다. 위급을 호소했던 것이다. 황제는 동구의 호소문을 놓고 태위 전분에게 하문했다. 그러나 전분은 이렇게 대답했다. "월나라 인간들은 옛날부터 서로 공격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자들은 한나라에 대해서도 자주 반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군사를 동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나라 때도 복속시키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자 중대부 장조(蔣助)가 전분을 힐책하며 나섰다. "한나라의 힘이 월나라를 구원할 수 없는 것과 한나라의 덕택이 월나라를 덮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몹시 우려되는 점입니다. 진실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무슨 이유로 월나라를 버려 두어야 하겠습니까. 진나라의 경우도 수도 함양을 포함해 천하를 버린 것이지 월나라만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소국 동구가 궁지에 빠져 그 위급함을 천자에게 호소해 왔습니다. 만약 천자께서 구원해 주지 않는다면 작은 나라는 어디에다 호소해야 옳겠습니까. 또 천자는 무엇으로 모든 나라를 자식으로 여긴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태위와 더불어 계략을 논의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짐은 즉위한 지가 오래지 않아 호부(虎符:出兵을 위해 발행하는 범을 새긴 割符)를 내어 군, 국의 군사들을 징발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장조에게 사자의 표시인 절부를 가져가게 해서 회계군에서 군사를 징발해 쓰도록 했다. 회계군의 태수는 호부가 아니기 때문에 출병을 거부했다. 다급한 장조는 한사람의 사마(司馬:軍官)를 베어 천자의 뜻하는 바를 깨우쳐 준 뒤 드디어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 동구를 구원하기도 전에 놀란 민월군이 동구에서 철수해 버렸다. 동구에서는 나라 전체가 중국으로 이주하겠다고 간청했다. 그래서 한에서는 온 백성을 양자강과 회수 사이[江蘇省, 安徽省]로 이주하도록 배려했다.
건원 6년에 민월왕이 남월을 쳤다. 남월은 천자와의 약속을 지켜 감히 군사를 마음대로 동원하는 대신 천자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천자는 대행(大行) 왕회(王恢)와 대농(大農) 한안국(韓安國)을 장군으로 삼아 회계에서 출격케 했다. 그런데 한군이 대유령(大庾嶺:江西省)을 넘기 전에 민월왕 영이 군사를 보내어 험지에서 막고 나섰다. 그러자 영의 아우 여선(餘善)이 재상과 대신들을 가만히 불러 상의했다. "우리 민월왕은 마음대로 병사를 동원해 천자의 명령도 없이 남월을 쳤소. 필시 천자의 군사가 우리를 토벌하러 올 것이오. 지금 한군의 군사력은 막강하오. 우리로선 당해낼 수가 없을 것이오. 혹시 요행으로 이번 싸움에서 한군을 이긴다 해도 결국 한군은 나중에 더욱 많은 병력을 보내어 우리를 쳐서 멸망시킬 것이오. 그러니 우리가 취할 일은 우리 왕을 죽여 천자에게 사과하는 길밖에 없소. 만일 천자가 사과를 받고 군대를 철수시키면 민월은 무사할 것이고 혹시 천자가 들어주지 않으면 그땐 우리도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그래도 힘이 부치면 바다 복판으로 도망치면 될 일이오." 모두가 동시에 대답했다. "좋습니다. 찬성합니다." 그래서 왕을 갈래창으로 찔러죽인 뒤 사자를 시켜 왕의 목을 대행 왕회에게 가져가게 했다. 대행이 대답했다. "우리가 원정 온 목적은 민월왕을 주살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왕의 목을 얻은데다 사죄도 받고 싸우기 전에 항복까지 했으니 이보다 더 큰 승리는 없다." 군사를 적절히 제지시켜 놓은 왕회는 한안국의 군에도 이 사실을 통고했다. 그리고 민월왕의 목은 말을 달려 가게 해서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두 장군의 군사를 철수시켰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흉은 영이다. 오직 무저의 손자 요군(繇君) 추(丑)만은 이번 모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낭중장(郎中將)을 사자로 보내 추를 민월의 요왕으로 삼고 민월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여선이 영을 죽인 후 그의 위령은 민월 국내에서 절대적으로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그를 지지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요왕의 세력은 약했다. 자기 부하를 제대로 통솔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되니 정통(正統)을 지킬 수가 없었다. 황제도 그런 사실을 들었다. "여선은 전날 영과 함께 반란을 도모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의 형 영을 주살한 공로가 있으니 한군이 굳이 그를 징벌할 수고는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여선을 동월왕으로 세우고 요왕과 함께 월나라에서 병립(竝立)되게 했다.
원정(元鼎) 5년에 남월이 반란을 일으켰다. 동월왕 여선이 상서했다. -병사 8천 명을 이끌고 누선장군을 따라 여가 등을 치고 싶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이를 허가했다. 그렇지만 여선의 생각은 달랐다. 군대를 게양(揭陽:廣東城)에 주둔시킨 뒤 바다 풍파가 심해 진군할 수 없다는 핑계로 꿈쩍도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다리 걸치기식으로 몰래 남월과 내통까지 하고 있었다. 한군이 파우를 격파할 때까지도 동월군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누선장군 양복은 본국으로 사자를 보냈다. -동월을 치게 해 주십시오. 황제가 회서를 내렸다. -사졸들이 피로해 있다. 군사를 예장군(郡)의 매령(梅嶺:江西省)으로 철수시켜 다음 명령을 기다려라.
원정 6년 가을이었다. 밀정이 여선에게 가서 보고했다. "누선장군이 동월을 치기 위해 국경으로 임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다. 모반할 수밖에!" 추력(騶力)에게 탄한장군(呑漢將軍)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면서 한군의 진입을 막게 했다. 추력은 백사(白沙), 무림(武林), 매령(梅嶺:모두 江西省) 등으로 침입해 한나라 교위를 3명이나 죽이기까지 했다. 이 무렵 한나라에서는 대농(大農) 장성(張成)과 본래 산주후(山州侯)였던 치(齒)를 주둔군의 장군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동월의 군세가 무척 매서웠으므로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두렵다고 안전지대로 피신했어? 비겁하고 게으르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 황제는 그를 주살했다. 한편 여선은 위타를 본받아 '무제(武帝)'라는 옥새를 새겨 가지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해 있었다. 황제는 노했다. 횡해장군(橫海將軍) 한열(韓說)을 구장(句章:浙江省)에서 출격시켜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가게 했다. 또 누선장군 양복을 무림으로 중위 왕온서(王溫舒)를 매령에서, 월후(越侯:월에서 투항해 후가 된 자) 두 사람은 과선장군(戈船將軍), 하뢰장군(下瀨將軍)으로 삼아 각각 약야(若邪:浙江省), 백사로 출격케 했다. 원봉(元封) 원년 겨울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동월로 진입했다. 동월은 본래부터 험준한 땅을 배경으로 한군을 막고 있었다. 순북장군(徇北將軍)이 요새의 책임자였다. 그는 잘 싸워 누선장군 휘하의 교위 두 명과 장리(長吏)를 무림에서 죽이기까지 했다. 그런 순북장군도 누선장군의 부하 전당(錢塘:浙江省) 출신 원종고(轅終古)에게 목이 달아났다. 원종고는 나중에 어예후(禦兒侯)에 봉해졌다.
한군이 출동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전날 월의 연후(衍侯)였던 오양(吳陽)이 한나라에 와 있었는데 그를 동월로 보내 여선을 달래게 했다. 그러나 여선은 듣지 않았다. 결국 횡해장군의 군사가 동월로 먼저 쳐들어 왔다. 이에 힘입은 오양은 자기 영지 군사 7백 인을 거느리고 여선에 맞서 한양(漢陽:福建省)에서 월군을 공격했다. 그러면서 건성후(建成侯) 오(敖:동월의 臣下)를 따라 요왕 거고(居股) 밑으로 달려가 함께 모의했다. "원흉은 여선입니다. 우리를 위협해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지금 내습해 온 한군은 숫자도 그렇거니와 막강합니다. 도저히 우리로선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옳겠소." "여선을 죽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 후 한에 항복하면 혹시 죽음은 벗어나게 될지도 모르지요." 드디어 여선을 죽인 뒤 병사를 이끌고 횡해장군에게 투항했다. 그래서 한에서는 요왕 거고를 동성후(東成侯)에 봉하고 1만 호를 주었다. 건성후 오는 개릉후(開陵侯)에 봉했으며, 월에서 귀순한 연후 오양은 북석후(北石侯)에 봉하고, 횡해장군 한열을 안도후(案道侯), 횡해교위 복(福)을 요령후로 삼았다. 복은 성양(成陽) 공왕(共王)의 아들인데 본래 해상후(海常侯)로 있었으나 법에 저촉되어 후의 지위를 잃고 있었다. 종군했어도 공은 없었지만 종실이라는 이유로 후가 되었다. 기타의 장군들은 아무도 공이 없어 봉을 받지 못했다. 동월의 장군 다군(多軍)은 한나라 군사가 이르자 휘하 군사를 버리고 항복했으므로 봉을 받고 무석후(無錫侯)가 되었다. 논공행상이 모두 끝난 뒤 황제는 선언했다. "동월은 땅이 좁고 험한 곳이 많다. 게다가 민월 사람들은 사나운 데다 죽끓듯 배반을 자주 한다. 동월사람들이 살 곳이 못된다." 그래서 조칙을 내려 그쪽 백성들을 양자강과 회수 사이로 와서 살게 했다. 그런 후로 동월의 땅은 무인지경이 되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월은 비록 오랑캐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들 조상은 일찍이 백성들에게 큰 공덕을 끼쳤다. 그래서 나라는 오래 계속되었다. 수대를 지나 오면서 월은 언제나 군왕으로 있었고, 구천(句踐)은 한 차례 패자로 칭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대역을 범했고 나라를 멸망시켰으며 결국 백성들을 중국으로 이주시키고 말았다. 같은 조상의 자손이지만 요왕 거고 등은 오히려 봉을 받아 만호후가 되기까지 했다. 이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월이 대대로 공후(公侯)였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월의 원조라는 우왕(禹王)의 여덕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