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표는 서쪽의 황하와 상당(上黨)의 병력을 수중에 넣어 유방(劉邦)을 따라 팽성(彭城)에 이르러 항우(項羽)와의 회전(會戰)에 참여했다. 팽월은 대량(大梁)지방을 침략해 항우를 괴롭혔다. 그래서 제30에 <위표.팽월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위표는 원래 위(魏)나라 여러 왕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형 위구(魏咎)는 지난 위나라 시절 영릉군(寧陵君)으로 봉해졌던 사람이었으나 진(秦)나라가 위를 멸하면서 위구도 서민으로 떨어뜨렸던 것이다. 진승(陳勝: 혹은 陳涉)이 봉기하여 왕이 되자 위구는 질세라 하고 달려가서 진승을 섬겼다. 진왕(陳勝)이 위나라 사람 주시(周市)를 시켜 위나라 땅을 경략하도록 했다. 위 땅이 평정된 후 위나라 사람들은 서로 상의해 주시를 위나라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주시는 극구 사양했다. "나는 아니오. 천하가 혼란하면 충신이 나타나게 마련이오. 지금 천하가 모두 진(秦)을 배반하고 있는 이 때 그 의로움을 따져 보건데 위 땅에서는 반드시 위왕의 후손이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오." 그래도 주시가 왕이 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되어서인지 제나라 조나라 등에서도 각각 수레 50대씩을 보내 주시자 왕이 되도록 부추겼다. "나는 결코 왕이 되지 않겠소." 주시는 너무도 완강했다. "그럼 누구요?" "위구가 있소." 그러나 위구 역시 왕이 될 것을 사양했다. "나는 그런 자리에 앉을 만한 위인이 못 되오." 이쯤 되자 진왕은 초조했다. 진왕은 사신을 위구에게 보내어 왕이 되도록 간청했다. 사신이 다섯 번씩이나 왕래한 뒤에야 위구도 할 수 없이 왕이 되었다.
한편 진장(秦將) 장한(章한)이 기왕에 진왕(陳王)을 격파한 뒤에 병사들을 진격시켜 임제(臨濟: 河南省) 땅까지 쳐들어가 위왕(魏王)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위왕은 주시를 시켜 제나라와 초나라로 가게 해서 구원병을 청해 오게 했다. 이에 제나라와 초나라에서는 항타와 전파(田巴)가 달려왔다. 그러나 장한은 주시.항타.전파의 군대들을 크게 격파해 그들을 죽여 버린 뒤 드디어 임제를 포위했다. - 내게 필요한 것은 위왕의 목이다. 장한이 화살에다 편지를 묶어 성 안으로 날려 보냈다. 위구는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답신을 날려 보냈다. - 무고한 백성들을 도륙하지 않겠다는 약정서를 보내 달라. 장한은 약속을 지키겠다는 약정서를 보냈다. 그것을 받아 본 위구는 스스로 분신자살했다. 이 때 위표는 초나라로 도망쳐 갔다. 초나라 회왕(懷王)이 위표에게 수천 명의 병사를 주어 위 땅을 공략케 했다. 정세는 다급하게 바뀌고 있었다. 항우(項羽)가 이미 진나라를 격파해 장한을 항복시켰고, 위표 역시 위의 20여 개 성읍을 탈취하고 있었다. 이에 항우는 위표를 세워 위왕으로 삼았다. 위표는 정병들을 이끌고 항우를 따라 함곡관 안으로 들어갔다. 한(漢)나라 원년에, 항우가 자신이 위나라 땅을 차지하기 위해 위표를 하동(河東) 땅으로 보내 평양(平陽: 山西省)에 도읍하게 하면서 서위왕(西魏王)으로 삼았다. 한편으로 한왕이 삼진(三秦: 秦의 故地)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임진(臨晋: 陝西省)으로 황하를 건너오자 위왕 표는 나라를 들어 한왕에게 귀속해 버렸다. 그런 뒤 한왕을 따라 초의 팽성(彭城: 江蘇省)에서 초나라 공격에 참여했다. 그러나 한왕이 초군에게 패하여 멀찍이 형양(滎陽: 河南省) 땅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위표의 생각이 다시 바뀌었다. "모친께서 위독하다 하십니다. 돌아가서 부디 간병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한왕은 위표를 가게 했다. 위표는 위나라에 도착하자마자 황하의 건널목을 차단해 버린 뒤 한나라를 배반했음을 천명했다. "괘씸한 놈!" 한왕은 분개했으나 동쪽의 초나라 움직임이 더욱 다급했으므로 위표를 칠 겨를이 없었다. 할 수 없이 한왕은 역생에게 명했다. "그대가 가서 차근차근 비유를 써 가며 위표를 달래 귀복시키게 하시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대에게 일만 호(一萬戶)의 읍에 봉하겠소." 역생이 위표를 찾아갔다. "어떻소. 한왕한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인간의 한세상이란 건 마치 흰망아지가 문틈 새로 달려 지나가는 것처럼이나 잠깐인 것이오." "빠른 세월과 한왕을 배반하는 일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겠소." "한왕은 너무 교만해서 싫소. 제후들과 군신 대하기를 마치 노예에게 하는 것처럼 오만불손하지 않소. 곧잘 사람을 모욕하고 상하의 예절이란 것이 조금치도 없는 인간이오." "그렇지만 한왕은......" "싫소. 나는 그런 꼴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거요." 역생은 위표를 회유하는 일에 실패했다. 한왕은 할 수 없이 이번에는 한신(韓信)을 대신 보냈다. "말로써 듣지 않으면 힘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지." 한신은 하동 땅에서 위표를 공격하자마자 그를 사로잡아 버렸다. 형양으로 위표를 역마에 띄워 보낸 뒤 위표의 나라를 군(郡)으로 편입시켜 버리고 말았다. 한왕은 그래도 위표의 용맹이 아까워 형양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후 초나라가 다시 형양을 포위하자 성의 함락이 급박하게 되었다. 위표가 다시 배반할 기미를 보였다. 그러자 한나라 신하 주가(周苛)가 위표를 죽이고 말았다.
팽월은 창읍(昌邑: 山東省) 사람이다. 자(字)를 중(仲)이라 했다. 그는 거야(鉅野: 山東省)라는 땅의 못가에서 물고기도 잡고 떼도둑 노릇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진승과 항량(項梁)이 봉기하자 한 젊은이가 팽월에게로 와서 말했다. "어떻습니까. 지금 곳곳에서 호걸들이 들고 일어나 진나라에 반기를 들어 다투어 왕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당신도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한번 일어나 보시지요." "하지만 아직은 두 마리의 용(龍: 秦과 陳勝)이 한창 싸우고 있으니 좀더 두고 보지." 그래서 한 해 남짓 그대로 지났다. 그러자 연못 주위의 젊은 떼거리 백여 명이 작당해 가서는 팽월에게 다시 부추겼다. "이제는 기회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기회는 도래했지만 자네들 같은 게으름뱅이들과는 일을 도모하고 싶지 않네." "저희들도 지도자만 얻으면 심기일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태도가 어떤지 한번 살펴보아야겠네. 어떤가. 아주 간단한 약속부터 하지." "어떤 약속입니까?" "내일 아침 해 뜨는 즉시 연못가로 집합하라." "그것이 약속입니까." "그렇지만 약속을 어기고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는 자는 한사코 목을 베겠다. 어떤가." "그렇게 해 보죠, 뭐." 이튿날 아침이었다. 열 명 정도가 해가 둥실 뜨고 난 뒤에 도착했다. 그 중에서는 해가 중천에 솟고 난 뒤에 도착한 자도 있었다. 팽월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너희들보다 나잇살이나 더 먹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대들이 나를 억지로 간청해서 두령으로 모셨다. 그런데 단단히 약속을 하고서도 여남은 명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들 모두가 참수돼야 하겠으나 그럴 수는 없으니 제일 늦게 도착한 너, 앞으로 나오거라." 그러나 그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설마 진짜로 목을 베시는 건 아니겠죠." "군문(軍門)에 허언은 없다." "용서하십시오. 내일부터는 결코 늦지 않겠습니다." "아니다. 누군가가 그 약속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자를 억지로 끌어 내어 목을 쳤다. 그런 후 단(壇)을 쌓아 제사를 올린 다음 무리들에게 엄숙한 명령을 내렸다. "누구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이렇게 된다." 부하들은 두려워서 감히 팽월을 올려다보는 자가 없었다. "자, 이길로 곧장 항군해 간다!" 팽월은 행군 도중 닥치는 대로 땅을 공략했다. 소수병력이지만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다른 제후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병졸들을 수습해 편입시켰더니 군사는 금세 천여 명이나 되었다. 패공(沛公: 漢王 劉邦)이 탕(탕: 江蘇省)으로부터 북상하여 창읍을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팽월은 곧장 달려가서 패공의 휘하에 들었다. 창읍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서 패공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물러났다. 팽월도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거야 땅 근처로 물러나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했다.
한편 항적(項籍: 項羽)은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제후들을 왕으로 봉한 뒤 제후들에게 각각의 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런데 팽월만이 자신의 군사가 일만여 명이나 되었으나 돌아갈 곳이 없었다. 한나라 원년 가을이었다. 제왕(齊王) 전영(田榮)이 항우를 배반했다. 이에 한왕은 재빨리 팽월에게 사람을 보내 장군의 인수(印綬)를 내린 뒤 제음(濟陰: 山東省) 땅에서 남하해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초나라에서도 가만 있지 않고 소공각(蕭公角)에게 군대를 주어 팽월의 군사를 치게 했다. 그러나 초군은 팽월군에게 대패했다. 한왕이 즉위한 지 2년 봄이었다. 한왕은 위왕 위표를 비롯한 다른 제후들과 함께 동으로 진격해 초나라를 공격했다. 팽월이 그의 군대 3만여 명을 이끌고 외황(外黃: 河南省)에서 한나라에 귀속한 것이 그 때였다. 그 때 한왕이 말했다. "팽 장군이 위나라 10여 성을 넣었으니 그 곳을 안정시키려면 서둘러 위나라 왕통을 잇게 해야 될 것 같소. 마침 서위왕 위표도 위구의 아우이니 위나라 후손임엔 틀림없소." 왕은 팽월이 아니라 위표라고 단단히 못박는 암시였다. 어쨌든 한왕은 팽월을 위나라 상국(相國)으로 삼아 군사지휘권을 주어 마음대로 위나라 땅을 경략해 평정시키도록 했다. 한편 팽성에서 패한 한왕은 그 포위를 풀고 서쪽으로 퇴각하자 팽월 또한 항복받았던 성읍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팽월은 외롭게 자신의 군사만을 이끌고 북상하여 황화변에 머물렀다. 한왕 3년이었다. 팽월은 살아남기 위하여 유격병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로 출몰하더니 초나라 후방에서 오는 군량 보급로를 차단해 버렸다. 한왕 4년 겨울이었다. 항왕(項王)이 한왕과 형양 땅에서 대치했다. 팽월이 수양(河南省)과 외항 등의 17개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항왕이 조구(曹咎)로 하여금 성고(成皐: 河南省)를 굳게 지키게 한 뒤 몸소 동쪽으로 와서 팽월이 뺏어 간 땅을 모조리 되찾아갔다. 별수없이 팽월은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북상하여 곡성(穀城: 山東省)으로 도주했다. 한왕 5년 가을이었다. 팽월은 다시 창읍 부근 20여 성을 함락시켜 10여만 곡(斛)이 군량미를 얻어 한왕에게로 보냈다. 항왕은 남쪽 양하(陽夏: 河南省)으로 도주했다. 그런데 얼마 후 한왕이 또다시 패전했다. 그래서 팽월에게 사자를 보내 합세하여 초를 치자고 했다. - 위나라 땅이 평정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백성들이 초나라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이 곳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별수없었다. 한왕은 혼자 초군을 추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고릉(固陵:河南省)에서 항적의 군사에게 대패했다. 한왕이 유후(留侯) 장량(張良)에게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후들의 군대가 나를 따르지 않고 있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소." 장량이 대답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왕 한신이 왕위에 오른 것은 대왕의 본위가 아니었잖습니까.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한신도 역시 자신의 지위가 견고하다고는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대왕에 대한 신의역시 견고하지 못한 것입니다." "팽월의 경우는 어떻소?" "아시다시피 팽월은 전나라 위나라 땅을 수없이 평정해 그 공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선 위표를 생각해 팽월을 상국에다 앉혔습니다. 그러나 위표는 지금 죽고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선 팽월을 위왕으로 세우지 않고 계십니다. 차제에 제나라와 위나라에게 맹약을 맺을 수만 있다면 초나라쯤은 금세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신과 팽월을 어떤 식으로 달래는 게 좋겠소." "팽월에게는 수양 이북으로부터 곡성까지의 땅을 주면서 왕으로 삼으십시오. 한신에게는 진(陳) 땅 이동에서 동해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주어 버리십시오." "한신이 무엇 때문에 그쪽 땅을 탐낸단 말이오." "한신의 고향이 바로 초 땅에 있습니다. 그는 고향 땅을 몹시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두 사람에게 이런 땅을 흔쾌히 내주는 것을 대왕께서 허락하신다면 두 사람을 언제든지 불러 올 수 있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그 땅이 아까워 신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으시겠다면 그 뒷일은 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좋소. 그 계책을 씁시다." 그래서 한왕은 사자를 일단 팽월에게 출발시켰다. 사자가 도착하자마자 팽월은 전군을 휘몰아 해하(垓下: 安徽省)로 달려왔다. 한왕과 합세한 팽월은 마침내 초나라를 격파했다. 항적이 죽고 난 봄에 한왕은 팽월을 양왕(梁王)에 세우고 정도(定陶 : 山東省)에 도읍하게 했다.
한왕 6년 양왕은 진(陳)에서 한왕을 뵙고, 9년과 10년에도 팽월은 장안(長安: 漢都, 섬西省)으로 내조했다. 한왕 10년 가을에 진희(陳희)가 대(代: 山東省)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제(高帝: 漢의 高祖)가 즉시 대 땅으로 친정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고, 한단에 이르러 양왕에게 병사를 징발했다. 그런데 양왕은 병을 핑계로 다른 장수를 시켜 한단으로 가게 했다. 고제는 몹시 노했다. 사자를 보내어 양왕을 꾸짖었다. 할 수 없어, 양왕은 두려워하며 몸소 고제에게 나아가 사과하려고 했다. 이 때 그의 장수 호첩(扈輒)이 말렸다. "왕께서는 애초에 가시지 않다가 문책을 받고서야 가신다니 몹시 위험하다고 생각됩니다. 만일 지금 가신다면 필시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차라리 차제에 모반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양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병이란 구실만 대면서 계속 머무적거리고 있었다. 즈음에 양왕의 신하 태복(太僕: 官名)이 죄를 입어 참수당하게 되었다. 태복이 놀라 도망하여 한왕에게로 갔다. "불러서 문책하십시오. 양왕은 호첩과 짜고 모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제는 군대를 보내어 양왕을 급습했다. 전연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양왕은 속절없이 사로잡혀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관리를 시켜 취조해 보니 과연 양왕에게는 모반의 조짐이 있었다. 그래서 의법처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고제는 팽월의 전공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마 참수하지는 못하고 대신 서민으로 강등시켜서 역마로 압송해 촉의 청이현(靑衣縣: 四川省)으로 귀양 보냈다. 팽월 일행들이 서쪽으로 향해 가다가 정(鄭: 陝西省) 땅에 이르렀을 때였다. 때마침 장안으로부터 오던 여후(呂后) 일행과 마주쳤다. "아니, 팽 장군이 웬일이시오?" 팽월을 알아본 여후가 물었다. 팽월은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팽월은자신의 무죄함을 여후에게 주장했다. "부디, 고향 땅 창읍에서 살게만 해 주십시오." "팽 장군 같은 공신을 귀양 보내다니 말도 아니 되오. 나와 함께 낙양으로 되돌아갑시다. 내가 고제께 말씀드려서 사면되도록 해 드리지요." 그렇게 되어서 일행이 함께 낙양으로 되돌아왔다. 여후가 고제를 만나 말했다. "팽월은 천하장사입니다. 그를 지금 촉 땅으로 귀양을 보내셨는데 그것은 스스로 환란거리를 만드는 짓입니다. 차제에 그를 죽여 버리십시오. 그래서 첩이 그를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고제가 난감해하고 있는데, 여후는 한편으로 가신을 시켜 팽월이 다시 모반을 모의하고 있다고 고발케 했다. 고제도 이번에는 팽월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또한 정위(廷尉) 왕염개(王염開)도 팽월의 모반 혐의가 확실해졌으므로 죽일 것을 주청했다. 드디어 고제는 팽월의 죄를 제가했다. 그래서 팽월의 일족은 몰살되고 자연히 그의 나라도 없어졌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위표와 팽월은 원래 미천한 몸이었으나 이미 천리의 땅을 석권해 각각 남면(南面)하여 고(孤: 諸侯의 自稱大名詞)라 칭하고, 적군을 무찌르고 승세를 타면서 그들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었다. 그러나 모반의 뜻을 품었다가 패배하게 되자 미쳐 자결하지 못하고 사로잡힌 몸이 되어 형벌로 죽임을 당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중간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도 그런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는데 하물며 왕자(王者)임에랴. 여기에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략이 남보다 뛰어난 그들인데도 제 한몸 죽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자 한 치의 권력이라도 가졌을 때 구름이 피어오르듯 혹은 용이 변화를 일으키듯 밑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또한 승승장구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언사가 남아 있지 못한 것은 역시 자신의 몸 보존에만 급급했던 이유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