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13. 백기.왕전열전
진(秦)이 남으로는 초의 언과 수도인 영을 공략하고 북으로 조군은 장평(長平)에서 괴멸시키고 수도 한단을 포위한 것을 무안군(武安君) 백기의 지휘에 의한 것이다. 또한 초군을 대파하고 조를 멸망시킨 것은 왕전의 작전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제13에<백기.왕전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백기(白起)는 미(미: 陝西省 남동쪽)의 사람이다. 용병을 잘해 진의 소왕한테 신임을 받았다. 13년에는 좌서장(左庶長: 秦의 爵位)이 되고 장군으로서 한의 신성(新城)을 공격했다. 이 해에 양후가 진의 재상이 되어 임비(任비)를 기용해 한중군(漢中郡: 陝西省 南部에서 湖北省 西北部에 걸친 땅)의 태수로 삼았다. 그 다음 해 백기는 좌경(左更: 秦의 爵位)이 되어 한과 위(魏)를 이궐(伊闕)에서 공격해 적의 목을 자른 것이 24만이고 도 적장 공손희를 사로잡았으며 다섯 성시를 점령했다. 백기는 승진해 국위(國尉: 太尉)가 되어, 황하를 건너 한의 안읍에서 동쪽으로 간하(乾河: 山西省 翼城縣 남쪽)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점령했다. 그 다음 해 백기는 대량조(大良造: 秦의 爵位)가 되고 위를 쳐서 대소 61개의 성시를 점령했다. 다시 그 이듬해에는 객경 사마착(司馬錯)과 함께 원성(垣城: 山西省 河東郡 垣縣)을 공격해 이곳을 점령했다. 그 5년 후 백기는 조의 광랑성(光狼省: 山西省 高平縣 서쪽 城)을 점령했다. 그후 7년에 백기는 초를 공격해 언.등(鄧: 湖北省 宣昌縣 북동)의 다섯 성시를 점령했다. 그 다음 해에도 초를 공격해 영을 점령하고 이릉(夷陵: 湖北省 宣昌縣)을 불지르고 드디어 동쪽으로 경릉(竟陵: 湖北省 天門縣 북서)에 이르렀다. 초왕은 영을 떠나 동쪽 진(陳: 河南省 淮陽縣)으로 천도했다. 진(秦)이 영을 남군(南郡)으로 삼았다.
백기는 승진해 무안군(武安君)이 되었다. 무안군은 초를 점령하고 무군(巫郡).검중군(黔中郡)을 평정했다. 소왕 34년에 백기는 위를 공격하고 화양(華陽)을 점령해 적장 망묘(芒卯)를 패주시키고 삼진(三晋: 韓.魏.趙)의 장군들을 사로잡아 목을 벤 것이 13만이며, 초의 장군 가언(賈偃)과 싸워 그 사졸 2만 명을 황하 가운데에 익사케 했다. 소왕 43년에 백기는 남양(南陽)을 공격해 태행산의 통로를 차단했다. 이듬해 한의 야왕(野王: 河南省 沁陽縣)을 공격했다. 야왕이 진에 항복하니 상당(上黨)으로의 길이 차단되었다. 상당의 태수 풍정(馮亭)이 백성들과 더불어 상의하며 그 계획을 말했다. "정(鄭: 韓의 國都)으로 가는 길이 이미 끊어졌으니 한은 백성들을 도저히 보호할 수 없다. 진은 날로 진격해 오고, 한은 상대조차 못하니 상당을 들어 아예 조나라에 귀속하느니만 못하다. 조가 만일 우리를 받아들이면 진은 노하여 반드시 조를 공격할 것인데 조가 공격을 받으면 한나라와 친해질 것이 사실 아닌가. 결국 한과 조가 하나로 뭉치면 진에 맞서 대항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을 조나라에 보내 통보할까 한다."
조의 효성왕(孝成王)은 평양군(平陽君).평원군(平原君: 趙勝)과 더불어 한의 태도를 가지고 의논했다. "받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받으면 득보다 화가 클 것입니다." 평양군은 반대했고 평원군은 그 반대 입장이었다. "조건 없이 하나의 군(郡)을 얻는 것이니 받아 두는 것이 이롭습니다." 조왕은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정하고 풍정을 화양군(華陽君)에 봉했다. 소왕 46년에 진은 한의 구지와 인을 공격해 이곳을 점령했다. 다음 해 진은 좌서장 왕흘(王흘)을 시켜 한의 상당을 점령했다. 상당의 백성들이 조나라로 달아났다. 그 때 조나라 군대는 장평(長平)에 진을 치고 상당의 백성들을 구호했다. 그 해 4월에 진은 왕흘을 시켜 위의 일을 구실로 조를 치게 했다. 조는 염파(廉頗)를 장군으로 삼았다. 조군의 사졸과 진군의 척후병이 맞닥뜨려 진의 척후병을 조나라의 부장(副將) 가(茄)를 베었다. 6월에 진군은 조군을 꺾고 2개 소의 보루와 4인의 도위(都尉)를 사로잡았다. 7월에는 조군이 누벽(壘壁)을 쌓고 지키고 있었으나 진군은 다시 그 누벽을 공격해 두 사람의 도위를 사로잡고 그 진지를 깨쳐 누벽의 서쪽을 탈취했다. 염파 장군은 더욱 견고하게 누벽을 쌓고 전군에게 명했다. "진군이 지치고 방심해질 때를 기다린다." 진군은 자주 누벽을 공격했으나 무너드릴 수가 없었다. 한편 조왕은 누벽을 나와 진군에 도전하지 않는 염파를 자주 꾸짖었다. 그런 형편에 진의 재상 응후는 사람을 시켜 천금을 조에 뿌려 가며 이간책을 썼다. "진나라가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일은 다만 마복군(馬服君: 趙奢, 趙의 名將)이 아들 조괄(趙括)이 장군이 되는 것뿐입니다. 염파 따위는 상대도 안 되며 머잖아 아마 항복할 거요." 조왕은 불만이 많았다. 염파군이 전사자가 많고 도망병이 속출하는 데다 자주 패전하고도 도리어 누벽만 쌓아 출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 더군다나 진나라 이간자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염파를 불러들이고 조괄을 대신 장군으로 삼는다." 진나라에서는 마복군의 아들이 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시에 무안군 백기를 몰래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왕흘을 위비장(尉비將)으로 삼았다. 백기는 즉시 전군에 명을 내렸다. "무안군이 진의 장군이 되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자는 벤다." 한편 조괄은 보루에 도착하자마자 군사를 내어 몸소 진군에게 도전했다. 진군은 패해서 달아났다. "이거 별것 아니잖아." 조군은 승세를 타고 진의 누벽에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누벽을 뚫고 들어가 진군을 박살내 버려라." 그러나 진군의 방어벽이 워낙 견고해 도무지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조군이 어물어물하고 있는 사이에 군사의 후방으로부터 전령이 달려왔다. "우리 조군은 후속 부대와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누가?" "진의 복병 2만 5천 명이 후군과 조의 누벽 사이를 차단해 버렸습니다." 조괄이 대경실색하고 있는데 다른 전령이 달려 들어왔다. "보급 부대와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무어라고?" "진군이 경장병 5천을 내어 날렵하게 후방을 끊었습니다." "그럼 우리 군대는 세 동강이로 끊어졌다는 얘기냐!" "양도(糧道)가 끊어진 데다 후속군과의 연락이 안 됩니다." "서두를 것 없다. 누벽을 굳게 쌓고 여기서 일단 기다린다." "누구를 기다리는 겁니까." "구원군이 올 것이다. 우리는 군사가 많댜." 진나라에서는 백기의 용병술을 듣고 있었다. 왕 자신이 급히 하내(河內)로 들어가 백성들에게 작(爵) 1급씩을 내린 뒤 15세 이상의 남자를 징발해 장평으로 보냈다. "조나라의 원군과 양식이 못 가게 차단하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 9월이 되어도 조군의 진지에서 양식 보급이 안 되었다. 46일 동안 굶게 되자 아사자가 속출하게 되고 서로 죽여서는 그 살을 베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굶어죽기보다는 탈출이라도 시도하는 게 낫겠다." 조군은 4개 대로 편성해 다섯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진의 포위권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 나를 따르라.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탈출로를 뚫는다." 조괄이 정예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나갔으나 정예병 대부분이 죽고 조괄마저 진병에게 사로잡혔다. 이미 사기를 잃은 조군 40만은 싸우지도 못하고 진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상장군, 40만이라는 포로들을 어떻게 처분하지요?" 왕흘이 백기에게 물었다. "우리 진군이 앞서 상당을 점령했을 때의 상황을 기억하오?" "상당의 백성들은 진나라 백성이 되기 싫어서 대부분 조나라에 귀속해 갔지요." "바로 그 점이오. 저자들도 마찬가지로 항복은 했지만 조군은 엎치락뒤치락하니 믿을 수가 없소." "그렇다면......." "나이 어린 병사가 240명이 있다니 그들만 조나라로 귀국시키시오." "나머지는?" "반목이 무상한 자들이니 살려 두면 나중에 반드시 난을 일으킬 거요." 그래서 백기는 속임수를 써서 땅을 파게 한 뒤 모조리 생매장해 버렸다. 전투의 전후를 통해 참수(斬首)된 자와 생매장된 조군의 숫자는 45만이었다. 조군은 다만 몸서리를 칠 뿐이었다. 소왕 48년 10월에 진은 다시 상당군(郡)을 평정했다. 왕흘이 피뢰(皮牢: 山西省 翼城縣 동쪽 皮寨村)를 점령했고, 사마경(司馬梗)은 태원(太原: 山西省 舊太原 汾州)을 평정했다. 한.조는 두려움을 이길 수가 없어 소대(蘇代)로 하여금 후한 예물을 들려 진의 재상인 응후를 은밀히 만나 보게 했다. "무안군께서 조괄을 사로잡으셨다지요?" "그렇소." "이번에는 한단을 포위합니까?" "그럴 테지요." "조나라는 결국 멸망하겠군요." "아하, 그렇소." "조가 멸망하면 진왕께선 천하의 제왕이 되십니까?" "그러하오." "확실하다면 무안군께선 삼공(三公: 太師.泰傅.太保, 즉 天子의 보좌관)의 지위에 오르시겠습니다." "그럴 것 같소." "무안군께선 진을 위해 싸울 때마다 이겨서 탈취한 성만 해도 70개나 된다지요. 남쪽으로는 언.영.한중을 평정하고 북으로는 조괄의 군사를 포로로 잡아죽였습니다. 아마 주공(周公) 단(旦)이나 소공(召公) 석(奭)이나 태공망(太公望: 呂尙)의 공적도 무안군의 공적만큼은 못할 테지요." "무슨 말씀을 하실 참이오." "이제 조가 멸망하고 진왕께서 제왕이 되시면 무안군은 틀림없이 삼공이됩니다. 승상께서는 싫으시더라도 무안군의 밑자리에 있게 되겠습니다." "실상 그 점은 참을 수 없는 일이오." "진이 한때 한나라를 쳐서 형구(邢丘: 河南省 溫縣의 平皐故城)를 포위해 상당을 괴롭혔으나 상당 백성 모두는 조로 귀속했습니다. 천하 백성들이 진의 백성됨을 좋아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됐지요. 이제 진이 조를 멸망시키면 북쪽 땅은 연으로 들어가고 동쪽 땅은 제로 들어가고 남쪽 땅은 한.위로 들어갑니다. 그러니 승상께서 얻게 되는 백성은 얼마 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되나?" "차라리 한.조에게 땅을 할양케 하여 강화하고 저간(這間)의 승리를 두고 무안군의 공적이 되지 않도록 미리 계략을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오." 그래서 응후는 진왕에게로 달려가 말했다. "대왕, 우리 군사들은 많이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 "사졸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기 위해서는 한나라와 조나라에게 땅을 돌려 주는 게 좋을 듯합니다." "승상,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피흘려 싸웠소?" "45만 명의 조나라 군사의 목을 베고 생매장한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 대신 한나라는 원옹(垣雍: 河南省) 땅을, 조나라는 여섯 성시를 진나라에 할양해 강화를 맺겠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 주고 모든 병사를 철수시키시오." 진왕은 그렇게 허락했고 응후는 자기 뜻대로 되어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다. "무어라고? 누가 그런 계략을 썼다더냐!" 백기가 그 소식을 듣고 버럭 화를 냈다. 수하는 조심스럽게 아뢨다. "승상께옵서 대왕께 요청한 듯합니다." "그으래? 그렇다면… 어디 두고 보자!"
무안군 백기는 그 일로 인해 재상 응후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해 정월이었다. 9월이 되어 진은 다시 출병해 오대부(五大夫: 秦의 爵位) 왕릉(王陵)을 시켜 조의 한단을 공격했다. 그 때에는 무안군이 병으로 출병할 수가 없을 때였다. 소왕 49년 정월에 왕릉이 다시 한단을 쳤으나 전황은 그토록 진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진에서는 더욱 많은 병사를 보냈다. 그러나 왕릉은 장수 다섯 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대패했다. 진왕은 전전긍긍했다. "무안군의 병세는 어떠하시다더냐?" "낫긴 했습니다만......." "했습니다만이란 무슨 뜻인가. 어서 입조(入朝)토록 해라." 그래서 무안군 백기는 다시 불려 왔다. "한단은 공격하기에 쉽지 않은 곳입니다. 게다가 다른 제후국들의 구원군들이 날마다 도우러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출병하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 왜냐하면 진나라를 제후국들이 모두 원망하고 있습니다. 전날 진이 비록 장평의 대군을 격파하긴 했습니다만 우리 진의 군사도 반이 전사했습니다. 국내에서 차출하려 해도 장정들이 부족해 방법이 없습니다. 더구나 산 넘고 물 건너 머나먼 남의 나라 수도를 공격하려는 마당이나 더더구나 난감할 뿐입니다." "한 마디로 가지 않겠다는 얘기요?" "한단을 공격해 봐야 실패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조군이 안에서 응전하고 바깥에서 제후국들이 우리를 공격하면 진군은 격파당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좋소. 다른 장수를 보내 한단을 격파해 보이겠소. 그 땐 그대의 주장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거요." 진왕은 별수없이 왕흘을 장군으로 삼아 한단을 점령케 했다. 그러나 초나라에서는 춘신군(春申君)이, 위(魏)나라에서는 공자 신릉군(信陵君)이 10만의 대병을 이끌고 나와 진군을 맞았으므로 진나라는 이길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많은 전사자와 도망자만 내고서 패퇴했다. 진왕은 다급한 나머지 재상 응후를 백기에게 보냈다. "역시 제후국들을 상대해 싸울 장군은 무안군 그대밖에 없소. 제발 나가 싸워 주시오." "아직도 몸이 불편하오. 그리고 내가 나가 보았자 도무지 승산도 없는 싸움이오." 무안군의 거절이 무척 완강했으므로 응후도 도리없이 물러 나왔다. 그리고 전날 백기를 무고했던 사실이 겁이 나 진왕한테로 달려가 또 다른 참언을 했다. "백기는 무엄합니다. 대왕께서 전날 무안군인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진군을 출병시켰다 하여 대왕을 지금도 비방하고 있습니다." "무어라고? 그자를 파면시켜 일개 병졸로 떨어뜨려라." "차제에 아예 변방으로 내치십시오. 원한을 가진 자이오니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좋소. 음밀(陰密: 甘肅省 靈臺縣 서쪽)로 이주케 하오."
3개월이 지나서였다. 이번에는 제후국들의 군대가 일제히 진나라로 쳐들어왔다. 진군은 연합국 군대에 끝없이 밀렸다. 위급을 알리는 전령이 매일같이 국도 함양으로 잇달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무안군을 다시 불러라." 백기는 그 즈음에 정작 병이 나서 함양을 떠나 음밀로 아직 떠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 백기에게 응후가 찾아와 말했다. "대왕의 진노하심이 크오. 어서 함양을 떠나라는 엄명이오." 백기는 병구를 이끌고 음밀을 향해 떠났다. 함양의 서문을 나와 10리쯤 거리인 두우(杜郵)에 머물고 있었다. 응후는 백기를 살려 두었다가는 자신의 참언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 진왕에게 다시 무고했다. "대왕 이토록 발칙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백기는 대왕께 죄를 입고 귀양 가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전연 심복하는 기색이 없이 대왕을 원망하는 언사만 토한다고 합니다." "무어라고? 서둘러 사신을 보내 그자가 자결토록 해라. 정작 발칙한 자가 아니겠소!" 그래서 진왕은 무안군에게 검을 보내 자결토록 명했다. 무안군은 칼을 들어 목을 찌르려다 말고 하늘을 우러러 한탄했다. "과연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알 수 없는 일이로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라면 할 수 없지." 칼을 들고 온 사자가 한 마디 대꾸했다. "마지막 말씀이 그러하였다고 대왕께 아뢰지요." "가만 있거라! 생각해 보니 역시 나는 죽어야 할 목숨이었구나." "예에?" "장평 전투에서 항복한 조나라 40만 대병을 속임수로 생매장하고서도 내가 온전한 죽음을 바랐었다니. 역시 나는 비명에 죽어 마땅하다!" 백기는 드디어 자결하고 말았다. 진의 소왕 50년 11월이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진나라 사람들은 진정으로 그의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진의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향리와 읍촌마다 그를 제사 지냈다.
왕전은 빈양(頻陽: 陝西省)의 동향(東鄕) 출신이다. 젊어서부터 병법을 좋아했으며 진의 시황제를 섬겼다. 시황제 11년, 왕전은 장군이 되어 조의 알여(閼與: 山西省 和順縣 북서)를 격파하고 9개 성시를 점령했다. 시왕 18년에는 왕전이 조를 공격하기 시작해 1년 뒤에는 기어코 조를 격파하고 조왕을 항복시켰다. 조의 땅을 모두 평정해 군(郡)으로 만들었다. 그 다음 해 연이 형가(荊軻)를 보내 진왕을 척살(刺殺)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다. 분노한 진왕은 왕전을 시켜 연을 공격케 했다. 연왕 희(喜)는 요동으로 달아나고 왕전은 연의 국도 계(계: 河北省 大興縣 남서)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진은 왕전의 아들 왕분(王賁)을 시켜 형(荊: 楚의 별명)을 공격케 해 형군이 격파되자 군사를 돌려 위를 공격했다. 위왕이 항복하여 드디어 위의 땅은 평정되었다.
진의 시황제는 이미 삼진(三晋)을 멸하고 연왕을 패주시키고 가끔씩 형의 군사를 격파했다. 진의 장군 이신(李信)은 젊고 용맹스러워 한때 병사 수천을 이끌고 연의 태자 단(丹)을 뒤쫓아 연수(衍水: 濟水의 별명. 沇水와 같음) 가운데서 단의 군사를 격파하고 단을 사로잡은 전공도 있었다. 시황제는 이신을 현명하고 용감한 인물이라 생각해 총애했다. "내가 초나라를 탈취하려 하오. 그대에게 군사 몇 명이 있으면 초를 멸할 수 있을 것 같소?" "20만 명이면 충분합니다." 이신의 대답을 들은 뒤 시황제는 장군 왕전에게 물었다. "초를 깨려면 몇 명의 군사가 필요할 것 같소?" "60만 명이 있어야만 겨우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무어요? 이신은 20만 명만 있으면 가능하다 했소." "초병은 강합니다. 20만 명은 무리입니다. 60만이라야 가능합니다." "왕 장군은 늙었구려." "겁쟁이라 부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시황제는 기어코 이신과 몽염에게 20만 병력을 주어 남쪽의 초를 치게 했다. 왕전은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해 빈양에 은거해 버렸다. 이신은 평여(平與: 楚邑, 河南省 汝南縣 동쪽)를 공격하고 몽염은 침(寢: 楚邑, 河南省 沈丘縣 남동)을 공격해 초의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승승장구하여 이신은 또 언.영을 격파했다. 그런 후 병사를 이끌고 서쪽 성보(城父) 땅으로 진군했다. 거기서 몽염과 만나도록 돼 있었기때문이었다. "자,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진나라 군사는 승리감에 도취해서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을 것이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추격해서 진군을 부순다. 싸움이란 열 번 패하더라도 한 번 크게 이기면 된다." 그래서 초군은 이신의 군대를 추격해 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신의 군대는 방심하고 있다가 철저히 때려 부수어졌다. 초군은 누벽 두 군데를 침입해 7명의 장교까지 목을 베었다. 시황제는 대경실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역시 젊은 용맹만 과신했다. 노병(老兵)의 신중함을 과소평가한 것은 과인의 과실이다. 지금 왕 장군은 어디 계신가." "빈양으로 은거하셨습니다." "진사(陳謝) 마차를 놓아라. 짐이 직접 가겠다." 시황제는 왕전을 만나 사과했다. "과인이 장군의 계략을 채용치 않았더니 결국 젊은 이신이 진나라 군사의 명예를 실추시켰소. 왕 장군이 나서 주셔야겠소." "병중이라 거동조차 불편합니다." "지금 들으니 초의 대군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물밀듯이 진군해 온다고 하오. 장군은 과인을 버릴 참이오?" "노신(老臣)은 병들고 지쳐 정신조차 혼미하다는 걸 대왕께선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아니라도 현명하고 용감한 장군이 있을 터이니 찾아보십시오." "아니오. 왕 장군만한 사람이 진나라에는 없소." "저를 꼭 원하신다면 두 가지 조건을 수락해 주셔야 일어나겠습니다." "그 두 가지가 무어요?" "전날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병사는 60만이 필요합니다." "흔쾌히 수락하겠소." "또 한 가지는 훌륭한 전택(田宅)과 아름다운 원지(園池)를 내려주십시오." 시황제는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그런 걱정을 하고 계시오. 근심 말고 어서 출정이나 하시오. 알아서 할 터이니 전공이나 세우도록 하시오. 가난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소."
60만 대군을 휘몰아 가는 왕전에게 시황제는 몸소 파수(陝西省 藍田縣에서 長安을 돌아 渭水로 빠짐)까지 나가 전송했다. 왕전은 그 때에도 시황제에게 간청했다. "대왕의 장군이 되면 공이 있다 하더라도 끝내 후(侯)로 봉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왕의 관심이 저에게 쏠려 있을 때 신 또한 기회를 잃지 않고 원지(園池)를 청해 자손들의 재산을 만들어 두려고 할 뿐입니다." "잘 알아들었소. 승전해 돌아오면 무슨 보상인들 외면하겠소." 왕전은 함곡관에 도착한 후에도 시황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많은 전지와 택지를 미리 보상해 댈라고 다섯 번이나 보챘다. 그래서 진시황은 할 수 없이 왕전에게 최상의 전택과 원지를 내려 주었다. 부관이 알 수 없다는 듯이 왕전에게 물었다. "장군께서 그토록 끈질긴 청원으로 대왕께 전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좀 심하지 않습니까?" "심하다고?" "더구나 승패를 알 수 없는 출진을 앞두고서 말입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60만 대군이라면 진나라 정예병력 거의 대부분이 아닌가." "그렇지요." "만일 내가 딴 마음을 품고 창을 돌려 세워 겨누면 어떻게 되겠나?" "반역?" "우리 진왕의 성품은 조포(粗暴)한 데다 의심이 많아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내가 그런 억지 청원을 했던 것은 그만한 대가 외엔 다른 탐욕이 없다는 뜻을 알려 준 것이네. 그런 식으로 나를 지키지 않으면 진왕은 가만히 앉아서 나를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이 되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왕전은 이신을 대신해 초나라를 쳤다. 초나라에서는 왕전이 군사를 증원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국내 군사를 총동원해 맞으로 나왔다. "적의 기세가 자못 등등하다. 설사 이기더라도 많은 병사가 상하겠다." 그래서 왕전은 굳게 누벽을 지키기만 할 뿐 도무지 나가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군이 자주 도전해 왔다. "초군이 지금도 누벽 밑으로 와서 욕지거리를 퍼부어대며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부관의 보고를 받고 왕전은 그 부관을 조용히 달랬다. "병사들을 날마다 휴식시키고 목욕도 시키고 잘 먹이고 무조건 따뜻하게 어루만지기만 해라. 나도 사졸들과 함께 식사하겠다." 얼마 동안 그렇게 소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관을 진중으로 보냈다. "사졸들이 요즘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 보고 오너라." 부관이 돌아와 보고했다. "행군의 피로가 완전히 풀린 탓인지 돌던지기랑 달리기 놀이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사기가 충천하단 말이지. 이제사 사졸을 부려 쓸 수가 있겠구나." 초군은 아무리 도전해도 진군이 응하지 않으니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는 보고가 왕전의 귀에 들어왔다. "됐다.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전군이 추격한다." 왕전은 그제서야 초군을 추격해 가서 박살내었다. 기수 남쪽에 이르러서는 초의 장군 항연(項燕)까지 죽였다. 초군은 드디어 패주했고, 진군은 승세를 타고 초 땅의 성읍들을 닥치는 대로 공략했다. 한 해쯤 후에 초왕 부추(負芻)를 사로잡고서는 끝내 초 땅은 평정되었고 그곳을 진의 군현으로 삼았다. 왕전은 기세를 몰아 남쪽으로 백월(百越)군주까지 정벌했다. 왕전의 아들 왕분은 이신과 힘을 합해 연.제를 정벌해 평정했다.
천하가 모두 평정된 것은 진시황제 26년이었다. 이에는 왕씨와 몽씨의 공이 크며 그의 명성은 후세에까지도 미쳤다. 진의 2세 황제 때쯤에는 왕전과 왕분도 죽고 나서였다. 또 진에서는 몽씨 일족도 멸망시켰다. 그런 형편에서 진승(陳勝)이 진에 반기를 들자 다급한 진에서는 왕전의 손자 왕리(王離)를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치게 했다. 왕리가 거록성(鉅鹿城: 河北省 平鄕縣)에서 조나라 왕과 장이(張耳)를 포위했을 때였다. 두 사람이 싸움의 결과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했다. "왕리는 진의 명장이다. 강대한 진나라가 강군을 거느리고 새로 생긴 조나라 군사를 깨뜨리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그렇지가 않다. 삼 대에 걸쳐 장군이 된 자는 반드시 패한다." "그것은 무슨 논리인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토록 많은 인명을 살상했으니 그 원혼이 가만 있겠는가. 삼대째의 장군인 왕리는 반드시 불길한 운명에 벗어나지 못할걸." "두고 봄세." 그 후 얼마 안 가서 항우(項羽)가 조나라를 구원하여 진군을 공격해 과연 왕리를 사로잡았다. 왕리의 군대는 드디어 제후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속담에 '자[尺]에도 짧은 것이 있고, 치[寸]에도 긴 것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백기는 적의 전략을 헤아려 사변에 대응하고 기계(奇計)를 생각해 내는 것이 무궁무진했다. 그래서 명성은 천하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응후와의 사이에서 생긴 환화(患禍)를 극복하지 못했다. 왕전은 진의 장군이 되어 6국을 평정했다. 그 당시 왕전은 노련한 백전노장으로 시황제까지도 스승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진을 보필해 덕을 세우고 국가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지는 못하고 부질없이 미봉책만 쓰며 시황제의 비위 맞추기에만 급급하다가 결국은 사몰하고 말았다. 손자 왕리에 이르러서는 항우에게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백기와 왕전도 제나름의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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