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1부 한문학의 대가들과 그 유산
조선시를 선언한 자주적 시인, 정약용
1. 기나긴 유배생활에서 일궈낸 사상과 문학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사상가이자 학자이면서 또한 문학가이기도 하다. 그의 학문의 영역은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의학, 군사, 자연과학, 교육 등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누적되어 있던 왕조의 질서와 사회제도 및 법률, 그리고 유교 이념의 모순이 폭발하여 국가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아울러 동요하고 있는 조선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질서와 제도들이 요청되는 시기였다. 정약용은 젊은 시절에는 정치의 중앙무대에서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그러나 40세부터 무려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유배 시절의 대부분을 경전 연구와 집필을 통하여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57세 때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와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더 이상 중앙무대에 나아가지 않고 저술 활동에만 몰두하였다. 이로 미루어 벼슬길에 나선 10여 년을 제외하면 그의 전 생애는 집필을 통해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기여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정약용이 벼슬길을 순탄하게 걸었다면 지금의 방대한 저작물을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곧 격동하는 시대적, 공간적 환경이 그를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공간은 정약용의 문학에도 틀림없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정약용의 자는 미용이요, 호는 사암, 다산, 자하도인이고 본관은 나주이다. 그의 부친은 진주목사 재원이며 모친은 해남 윤씨로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정약용의 생애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학업에 몰두했던 수학기요, 제2기는 28세 때 전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간 뒤 39세에 형조참의를 사직할 때까지 벼슬살이를 했던 사환기이며, 제3기는 40세에 유배를 당하여 유배지 장기와 강진에서 18년간 지냈던 유배기요, 제4기는 57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와 75세까지 살아던 소요자적기라 할 수 있다.
어디 가서 이런 언덕을 얻을 수 있으랴
다산은 1762년 광주군 초부방 마재(지금의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의 소내에서 태어났다. 소내는 다산이 75세의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10여 년의 벼슬살이와 18년의 귀양살이 기간을 제외한 40여 년 동안을 머물러 살았던 곳으로, 그에게 제1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던 강진의 '다산초당'은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을 만큼 중요한 정신적인 고향이었다. 원래 다산의 선조는 조선 초에 서울에 살면서 8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를 내었으나, 그의 고조 도태가 당쟁을 피하여 경기도의 마재로 이사한 후 그곳 소내에 사는 동안 조부까지 3대가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가 부친인 재원에 이르러서야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다. 한강변에 있는 마재의 소내는 한국 천주교 초창기에 이름을 날려던 인물들과도 관계가 깊다. 이는 다산의 집안이 당시 천주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맏형 정약현은 천주교 보급에 앞장섰던 이백의 매부이며, 황사영의 장인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약현의 사위로서 청나라인 주문모 신부의 입국부터 신유옥사까지의 교세 및 박해 상황을 북경에 알리려다 발각된 소위 '황사영 백서사건'의 장본인이다. 둘째 형 정약전은 병조좌랑의 벼슬을 지내다 은퇴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한 학자로 천주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옥사 때에 연좌되어 전라도 신지도로 귀양 갔으며, 다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흑산도에 이배되었는데 끝내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막내 형인 정약종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전교회장으로 신유옥사 때 참수되었다. 특히 약종의 큰아들 철상은 아버지와 같이 죽었으며, 약종의 부인 유소사와 아들 하상, 그리고 딸 정정혜는 1839년의 기해옥사 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순교한 이들 세 가족은 1984년에 천주교의 성인으로 부여된 우리나라 103위 가운데 한 분들이다. 또한 다산의 누이와 결혼한 이승훈은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갔다가 그곳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1783년에 천주교 영세를 받아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그는 명동에 최초의 교회를 세워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1801년 신유옥사 때 참수당하였다.
다산 역시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중대한 전환점을 제공하였고 아울러 그에게 커다란 시련을 겪게 하였다. 그는 23세 때 큰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의 배 안에서 이벽을 통하여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처음으로 서교에 대하여 듣고 한 권의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정약용이 훗날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천주교를 알게 된 뒤 상당히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과거공부에 열중한데다가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은 어린 시절을 마재의 소내에서 보냈다. 물론 가끔은 아버지의 임지인 전라도의 화순과 경상도의 예천을 찾아가기도 하고, 또 둘째 형 약전과 함께 화순의 동림사에서 얼마 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10대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다산에게 고향은 장차 돌아갈 이상향이자 그의 평안한 삶을 꾸려나갈 현실이기도 하였다. 훗날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채소를 기르면서 전원 생활을 꿈꿨던 것도 그의 고향 소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화순현감으로 있던 아버지를 뵙고 난 뒤 과거공부를 위하여 고향인 소내로 돌아왔을 때 다산은 귀향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어느새 고향에 이르니 문 앞에는 봄 강물이 흐르는구나. 기뻐 약초밭 둑에 다다르니 고깃배들은 옛 모습 그대로일세. 꽃들은 만발하고 숲 속의 집은 고요한데. 소나무는 들길에 그윽히 드리웠네. 수천 리 남쪽을 유람했어도 어디 가서 이런 언덕을 얻을 수 있으랴. - 「환소천거」
다산에게 있어 고향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짐작케 하는 시이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간 후부터 그는 고향에 쉽게 가지 못하였고, 더욱이 기나긴 귀양살이를 겪는 동안에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그립던 고향 소내의 전원으로 돌아온 후 전원의 여름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산앵도 잘 익어 검붉고 들딸기 붉게 익어 곱기도 해라. 텅 빈 집안엔 새들만 있고 숲속엔 아이들이 흩어져 놀고 있네. 심다 남은 모는 논둑에 쌓여 있고 주운 보리이삭은 광주리에 가득하네. 높은 곳 천수답엔 먼지가 날려 혼자서 하느님께 기도드린다. - 「우차육방옹 농가하사6수」
이 시에는 평화로운 소내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다산은 농부의 심정이 되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비가 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정약용은 15세(1776) 되던 해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남인계 풍산 홍화보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의 결혼은 자신의 일생에 아주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이 해에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정조는 등극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옹호했던 남인계의 시파 인물들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남인계였던 다산의 아버지도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리고 정약용도 21세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 근처에 형제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정약용은 그 결과 22세 때 비로소 소과에 합격하였고, 태학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28세(1789)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은 한강에 배다리[주교]를 만들거나 수원성을 설계하고 기중기를 만들어 성을 쌓는 일에 공을 세웠다. 33세에는 경기도 암행어사의 직책을 맡게 되면서 조선 말기 사회상과 백성의 어려운 삶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약용을 시기하는 무리들은 그를 천주교 신자라고 몰아붙여 그의 벼슬살이를 마감하게 만든다. 남인의 시파는 다시 천주교에 우호적인 신서파와 이를 비판하는 공서파로 나뉜다. 그런데 1795년 청나라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고 둘째 형 약전이 연좌되면서,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라는 공서파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정조는 이에 다산을 충청도의 홍주목의 금정도찰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 뒤 정조는 정약용을 다시 동부승지로 불러앉혔으나 공서파의 맹렬한 비방에 왕도 어쩔 수 없이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하여 2년 동안 있게 하였다. 곡산에 가기 전 정약용은 천주교와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왕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에 있다가 형조참의를 마지막으로 11년 동안의 벼슬살이를 그만두었다. 조정에서 그를 서교신자라고 계속 무고하자, 그는 39세인 1800년 봄에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마재의 소내로 돌아왔다. 그러던 다산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를 총애하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은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벽파에 속하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공서파는 신서파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찾다가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신유옥사이다. 이 옥사로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은 죽임을 당했고,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로, 그리고 다산 자신은 장기현(지금의 경북 영일군 장기면)으로 유배되었다. 온 가족이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게다가 유배된 그 해 가을에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났다. 황사영이 북경의 주교 구베아에게 신유옥사의 일을 알리기 위하여 비단에 박해의 전말과 그 대책을 기록하여 몰래 전하려다가 관원에게 발각된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천주교의 탄압을 더 한층 엄하게 하였다. 결국 다산과 약종은 이 사건 뒤에 서울로 압송되어 다시 천주교 관계를 문초받았다. 그러나 혐의가 없던 다산은 다시 강진으로 귀양 보내졌고, 그의 형 약전은 머나먼 흑산도로 보내졌다. 그리고 약전은 다시는 육지를 밟아보지 못한 채 1816년에 고향과 귀양간 동생을 그리워하다 그곳에서 죽었다.
띠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이 어스름해 잠자리 일어나 샛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참담하다.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두 사람 말이 없네.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눈물나네. - 「율정별」
정약용과 형 약전은 함께 유배지로 가다가 나주 북쪽 5리쯤에 있는 율정 주막에 이르렀다. 율정은 목포와 해남으로 갈리는 삼거리에 있었다. 이제 하룻밤을 묵고 나면 기약없이 헤어져야 했다. 11월 2일 형과 동생은 목이 메인 채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 뒤 형은 불귀의 혼이 되어 다시 그곳을 지나갔고 다산도 형이 죽은 3년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그는 형을 생각하면서 또다시 그곳을 눈물지으며 지났으리라.
유배지에서 태어난 『목민심서』
다산이 유배지 강진의 동문 밖 주막에 도착하여 귀양살이를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그를 만나주지도 않고 피했다고 한다. 그는 그 주막을 '생각과 용모,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한다'는 뜻으로 '사의재'라 이름 짓고는 두문불출하였다. 그곳에서 술집 노파의 도움을 받으면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게 되었다. 4년 뒤인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뒷산인 보은산방의 고성암으로 거처를 옮겨 주역의 연구에 몰두하였고, 다시 이듬해에는 읍내에 살던 제자인 이청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기를 찾아와 배움을 구한 황상, 이청 등을 제자로 삼아 학문을 가르쳤다. 그들은 다산이 어려울 때 몰래 도우면서 학문을 익혀 큰 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신계의 일원으로 참여하였으며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해마다 햇차를 스승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다신계는 다산이 귀양에서 풀려나자 18명의 제자와 강진에 있는 여섯 제자를 모아 만든 일종의 학문 토론 모임이다. 다시 이듬해 봄인 1808년에는 강진현 남쪽 만덕산 서쪽에 있던 처사 윤단의 산정으로 옮겨 살았다. 그곳이 바로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으로 지금의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마을 뒷산에 위치한다. 그는 산의 이름을 호로 삼아 '다산'이라 하였는데, 그곳의 좌우에 동암과 서암을 지은 뒤 동암에 1천여 권의 책을 두었다. 그는 못을 파고 꽃을 가꾸었으며 채소도 심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지금의 다산초당은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에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며, 동암과 서암은 1974년에 복원되었는데 이때 새로이 천일각이 지어졌다. 천일각이 있는 그곳은 한눈으로 구강포 앞바다가 보이는데, 아마도 그는 그곳에 서서 귀양간 형을 그리워하고 고향과 그의 처자식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어쨌든 그곳 초당은 사람과 수레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현실정치와는 먼 땅이었지만 오히려 다산에게 조선 후기의 위대한 학자로 남을 수 있는 학문적 분위기를 제공하였다. 다산초당에 거처하도록 도와준 윤단은 원래 해남 윤씨로 다산의 외가 쪽 사람이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그녀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공재가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니, 다산에게 귤동 마을의 해남 윤씨들은 외가 친척들인 셈이다. 윤단의 아들들인 윤문거 삼형제는 정약용을 다산으로 초빙하였고, 그들의 아들과 조카들은 다산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그와 함께 다산은 초당으로 옮긴 이후로는 해남 연동리에 있는 외가에서 그들의 도움으로 많은 책을 빌려 볼 수 있었다. 그때 읽었던 방대한 책은 결국 다산의 학문의 소중한 토양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다산초당에 오르는 길가에는 다산의 제자였던 윤종진의 무덤이 있어, 죽어서도 스승이 머물렀던 초당을 지키고 있다.
다산은 또한 초당의 천일각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근처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를 종종 찾아가 혜장선사(1772~1811)와 교류하였다. 혜장은 다산이 강진 읍내의 주막집인 사의재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로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다산은 그에게 차를 배웠다. 다산이 유배 초기에 거처를 사의재에서 보은산방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도 혜장선사의 덕이었다고 한다. 혜장과 다산은 비록 연령 차이는 있었지만 서로를 이해하며 학문과 인생을 논하였다. 다산은 혜장이 1811년에 죽자 그의 묘비명을 써주기도 하였다. 다산은 또한 초의선사(1786~1866)와도 교류하였다. 23세나 위인 다산은 그를 제자로 삼아 유학을 가르치며 훈계하였다. 초의선사는 시문과 서화에도 능통한 승려로, 다도에 일가견을 이루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근처 만덕산의 백련사와 해남 대둔산의 대흥사 승려들과도 교류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만덕사지』와 『대둔사지』 등의 편찬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다산은 학문에 정진하면서 차츰 그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아마도 18년의 유배 생활 동안 그곳에 정을 붙이고, 그곳의 인정과 자연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산의 나이 57세인 1818년 봄에 『목민심서』를 완성하였는데, 이 해 8월 여름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그는 9월 2일 강진의 다산을 떠나 9월 14일 처자식이 있는 고향 땅 소내로 돌아왔다. 그 후 다산은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모든 학문을 마무리하였다. 그는 여생을 고향 땅 처자식들 곁에서 편안히 보내다가 1836년에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날은 그의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이었다. 그의 묘는 귀양에서 돌아와 거처하면서 저술에 몰두했던 마재의 소내에 있는 여유당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2. 애민과 사회비판의 시문학
다산은 뛰어난 시인이었다. 2,200수가 넘는 많은 시를 지었다는 점 외에도 그의 뛰어난 문학적 역량은 그를 국문학사상 탁월한 시인으로 인정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산문에는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이 별로 없다. 그것은 그가 도에 기초한 문장을 중시하고 그것이 치세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재 가운데 가장 큰 것을 '패관잡설'이라 하여 소설을 해롭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문학작품은 시가 대부분일수 밖에 없다.
자주적 조선시의 선언 다산은 문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우선 시에 관하여, 그는 시가 성정을 도야하는 데 중요하다고 보면서 그것이 사람의 깨끗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산이 말하는 참된 시란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를 옹호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가 도에 근본을 둔 인륜시와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사회시를 많이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자찬묘지명」에서 시를 '간림'이라 하여 "간언이 담긴 언어"라고 보았다. 특히 그는 『시경』이 백성을 교화하는 노래가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의 비판적 말'이 담겨진 책이라 하였다. 이는 그간의 문인들이 파악한 『시경』에 대한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사회악에 대한 풍자와 고발을 통하여 사회를 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젊은 시절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백성들의 현실에 눈을 뜨면서 강해졌다. 그리고 유배지 강진에서 백성들의 참혹한 삶과 함께하면서 이러한 의식들은 시로 형상화되었다. 한편, 다산의 문학론에서 중요한 것은 소위 '자주적 조선시'를 선언한 '주체적 문학정신'이다.
노인의 즐거운 일 하나는 붓 가는 대로 마음껏 시를 쓰는 것. 어려운 운자에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늦지도 않네. 흥이 나면 뜻을 싣고 뜻이 이루어지면 바로 시를 쓰네. 나는 조선 사람이기에 즐거이 조선시를 쓴다. 그대들은 마땅히 그대의 법을 따르면 되지 시 짓는 법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가 누군가. 까다로운 중국시의 격과 율을 먼 곳의 우리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 배와 귤은 그 맛이 다른 것처럼 오직 입맛에 맞는 것을 좋아할 뿐이라네. - 「노인일쾌사6수 효향산체」
다산이 71세에 지은 시다. "조선인의 기호와 성정에 일치되는 조선시를 써야만 참다운 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문학의 주체성과 자아확립을 주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멀리 "한자로 시를 쓰면 온전한 우리의 감흥을 드러낼 수 없다"는 퇴계 이황이나 서포 김만중의 생각과 일치한다. 중국시, 곧 한시 짓는 법을 굳이 따를 필요가 없다는 대담한 주장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다산은 일찍부터 시를 지을 때 중국의 고사를 찾아 쓰는 일에서 벗어나 『삼국사기』난 우리의 고문헌, 그리고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소재로 쓸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 풍속과 역사 속에서 시적 소재를 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다산의 선배들인 성호 이익이나 연암 박지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양반 자제들이 조선의 고사를 모르면서 유독 중국의 것만을 선호하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우리나라 선배들의 문헌을 직접 읽으라고 권장하기까지 하였다. 그가 아들에게 읽기를 권한 필독서를 보면 역사, 지리서, 문집류 외에도 야사, 의학서, 농학서, 상소문 등도 눈에 띈다. 실제로 다산의 시 중에서 악부시는 조선의 역사와 풍속, 현실을 소재로 삼았으며, 조선의 고유한 언어를 한시의 언어로 활용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지어져 서울에까지 널리 알려진 「탐진악부」는 민요적 취향이 드러나고 우리말이 시어로 잘 활용되고 있다. 특히 그는 현지의 토속적 방언을 그대로 시어로 쓰고 있느데, '맥령'(보릿고개), '아가'(아가:새색시), '마아풍'(마파람), '락제'(낙지) 등은 한자어로 되어 있지만 우리말의 음에 따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애민과 사회비판의 시들 다산의 시가 갖는 특징으로는 우선 강렬한 사회 비판의식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조선 후기 당대의 제반 모순을, 단순히 관념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 현실생활 속에서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는 당쟁의 치열함, 인재 선발의 폐해와 부조리, 삼정의 문란 등을 비판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당쟁의 화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이런 일은 참으로 통곡할 만하다. (...) 다투는 기운이 맑은 하늘을 가리고 티끌만한 일로도 살육을 일삼으니, 새끼 양은 죽어도 소리 한번 못 치는데 승냥이와 호랑이는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뜬다. 높은 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갈고 낮은 자는 화살촉을 갈고 있네. 누가 있어 큰 잔치 베풀어 화려한 집에 휘장을 치고, 천 동이의 술을 담고, 만 마리 소를 잡아 안주 만들어, 옛 감정 풀고 함께 맹세하여 복과 평화 오기를 기약할 건가. - 「고시27수」, 14
다산이 경상도 장기 유배지에서 쓴 시로 망국적인 당파싸움을 비판하면서 누군가 나서서 묵은 감정을 풀어 태평한 세월이 오기를 갈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당파싸움 외에도 당대의 정치적 문란과 탐관오리의 횡포 등을 '우화적 수법'으로 풍자함으로써 시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고시27수」를 보면, 당쟁의 실상을 승냥이와 호랑이가 노려보며 싸우는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새끼 양이 청렴결백한 군자를 비유한 것이라면, 승냥이와 호랑이는 사납고 악독한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후자는 당파싸움을 일으키는 당대의 벼슬아치로서 티끌만한 일에도 살육을 일삼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우화적인 수법은 이처럼 사회현실의 모순을 비판하는 시에서 자주 사용되면서 뛰어난 작품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늘이 어진 사람 내려보낼 때 왕후장상 집안만 가리지 않았을 텐데, 어찌하여 가난하고 천한 집에도 재주가 뛰어난 자 있음을 보지 못하나, 서민 집에 아이 낳아 두어 살 됨에 이목이 수려하고 빼어났는데, 그 아이 자라서 글 읽기 청하니 아비가 하는 말, "콩이나 심어라. 네가 글을 배워 어디다 쓰려나. 좋은 벼슬 너는 할 수 없단다." (...) 지체 높은 가문에 아이 태어나면 낳으면서 곧장 귀한 몸이 된다. 어린 놈에게 사람 꾸짖는 법 가르치니 자라선 이미 오만해졌네. 아첨하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행전도 채워주고 신발까지 신겨주며, "너무 일찍 일어나지 마시오. 행여 병이 날까 두렵습니다. 고생하여 공부하지 않아도 자연히 벼슬한답니다."(...) - 「고시27수」, 14,15
이 시는 당시 신분제도의 모순을 꼬집고 있다. 양반은 공부하지 않아도 자연히 벼슬을 할 수 있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진 하층 계급의 자식은 벼슬의 길이 막혀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가득 찬 사회에서 상류 양반층과 벼슬아치는 백성들에게 착취를 일삼았다. 가혹한 세금은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여기에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는 백성들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다산의 시를 보면 관청의 세금독촉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세금 때문에 자신의 양기를 잘라버렸다는「애절양」은 널리 알려진 시다.
가마 메는 너나 타는 나는 본래 한 동포 하느님으로부터 평등함을 받았네. 너희들은 어리석게 이런 일 달게 여기니 내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 가마 메는 중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요, 가마만 메야 하는 백성들은 가련하구나. 큰 깃대 앞세우고 쌍마교 나타나서 촌마을 사람들 모조리 동원하니, 닭처럼 내몰고 개처럼 부리면서 소리치고 꾸중하기 범보다 더 심하네.(...) 기진하여 논밭에 돌아오면 지친 몸 신음소리 실낱 같네. 가마 메는 그림을 그려서 돌아가 어진 임금에게 바치고 싶네.
이 시는 다산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71세에 쓴 「견여탄」이라는 시의 뒷부분인데, 관리들이 명산에 유람오면 승려들이 그들을 가마에 태우고 험한 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고통을 그리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나은 편이며 백성들은 더욱 더 고통스러워한다고 고발하고 있다. 어진 임금에게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는, 돌아가신 정조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어진 임금이 없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리라. 다산의 시는 자연에 대한 애정과 예찬을 담은 것도 많으며, 인간 관계의 다정한 정을 토로한 시들도 꽤 있다. 다산에게 자연은 돌아가야 할 정신적인 의지처였다.
나 홀로 내 집을 지키며 처자식과 사랑하며 살리라. 산밭에 기장 심고 무논에 모를 심어 힘써 김 매고 가꾸어주면 가물든 비가 오든 따지지 않겠네. 가을에 어느 정도 추수는 할 것이니 그것으로 내 생명을 보전하리라. - 「의고2수」, 1
34세 때 금정찰방으로 유배된 뒤에 지은 이 시에서 다산은, 장차 고행에서 처자식과 함께 살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강진 유배지에서 그는 때때로 이웃의 채소밭을 구경하면서 채소를 가꾸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는 실제로 가족들에게 놀고 먹지 말며 생산에 참여할 것을 권장하였으니, 그의 아내가 고향에서 몸소 누에치기를 한다는 소식에 기뻐 시를 짓기도 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밭을 갈고 양잠을 하였다.
누에 친 후 뽕나무 앙상하더니 여린 뽕잎 새로 돋아 예쁘게 자라네. 이번처럼 힘을 다하여도 세금으로 바쳐야 하니 가을 누에 쳐서 한 해를 살아봐야지. - 「하일전원잡흥 효범양이가24수」, 5
이 시에는 몸소 농사를 지어 그 결실을 세금으로 바치면서도 다시 내일을 준비하려는 다산의 심정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에게 고향의 전원은 평온하고 풍요롭지만은 않았다. 가난과 세금 독촉, 그리고 흉년으로 인해 굶주림에 시달이는 백성들의 모습은 다산이 몸소 겪었던 조선 후기의 현실이었다.
잘 자라던 내 모를 내 손으로 뽑아야 하다니. 무성하게 자라던 내 모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다니. 잘 자라던 내 모를 잡초처럼 뽑다니. (...) 나에겐 아들 셋이 있어 젖 먹고 밥 먹고 있으니, 아들 하나 제물로 바쳐서 이 어린 모를 살렸으면. - 「발묘」
못자리의 모를 가뭄 때문에 심지 못하고 대신 다른 것을 심기 위하여 모를 뽑는 농부의 심정을 그리고 있다. 어떤 부인은 하도 원통하여 아들 하나를 바쳐서라도 비를 오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처럼 다산이 유배지에서 본 가뭄의 참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산은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는데도 고관대작들의 집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가 진동한다고 노래(「아민시」)하여, 백성들에 대해 애틋한 감정과 함께 잘못된 정치에 대한 분노를 담기도 하였다. 이러한 애국애민의 정신은 다산의 문학을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경세제민을 위해 수많은 저서를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3. 작품 감상
다음에 소개할 두 편의 글은 비록 시와 전이라는 양식적인 차이가 있지만, 똑같이 조선 후기 불우한 한 기인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 인물을 서로 다른 양식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두 편의 글을 통해서 다산의 문학적 형상화 작업의 내용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천용자가
천용자, 그의 자는 천용인데 뭇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하네. 평생에 갓 망건 쓰지를 않아 헝클어진 머리 더욱 심란해 보이는데, 술은 입술을 닿지도 않고 곧장 뱃속으로 넘어가니 달거나 시거나 싱겁거나 텁텁하거나 쌀술이건 보리술이건 가릴 것이 있는가? 고양이 눈같이 맑은 술이나 고름같이 탁한 술도 좋다네.
가야금 하나 어깨에 둘러메고 왼손에는 피리요 오른손에는 지팡이. 봄바람 불 때면 묘향산 이른여섯 골짜기로 가을달 밝을 때는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로, 가야금 뜯고 피리 불며 길게 휘파람 불면서 구름 속 노닐다가 노을에 잠자 머문 적 없어라. 산길에 우거진 숲 헤쳐 잠자는 범 찾아내고 물길에 돌을 굴려 못 속의 용 놀래네.
집 나오면 솜옷은 거지에게 주고 해진 옷과 바꿔 입어 남루한 누더기라. 돌아와 집에 가면 아내의 바가지 소리 사나워 울면서 땅을 치고 하늘을 부르며 가슴을 치건만, 천용자는 말없이 대꾸도 않고 머리 숙여 찡그리면서도 공손하기 짝이 없지. 길에서 주운 주먹만한 괴석을 자루를 풀어 꺼내 보석처럼 쓰다듬네.
배고프면 이웃집에 곧장 달려가 새로 빚은 술 얻어 서너 잔 마시고 얼큰하면 소리 높여 부르는 노래. 빠른 것은 이칙(12율의 하나)에 맞고, 느린 것은 임종(12율의 하나)에 맞네. 노래 끝엔 종이 찾아 붓을 놀려 묵화 그리는데 가파른 봉우리 성난 바위 급한 여울에 오래된 소나무 모습일세. 뇌성벽력 천둥소리 음산한 풍경이요, 눈 녹은 높은 산의 의연한 모습이네. 해묵은 칡넝쿨 얽힌 모습 그리다가도 송골매 보라매가 싸우는 광경 그리기도 한다. 더러는 구름 타고 하늘 나는 신선도 그리는데 수염 눈썹은 찌를 듯이 곤두서지.
초라한 중 오똑이 앉아 등 긁는 모습 그리면 상어 뺨에 원숭이 어깨 비뚤어진 입에다 속눈썹 눈을 덮은 괴상한 몰골이라네. 혹 용 귀신이 불 뿜으며 뱀과 싸우는 모습 그리다가도 요사한 두꺼비가 달을 가려 방아 찧는 토끼를 범하는 그림도 그리지.
부녀자 모란꽃 작약꽃 붉은 부용은 팔이 잘린대도 그리려 하지 않네. 곧잘 그림 팔아 술빚으로 충당하는데 하루에 번 돈 하루 술값에 날리지. 자기 이름 관가에 알려지길 꺼려하여 혹시라도 알리려는 자 있을 땐 무서운 노기가 칼날 같다네.
성산(곡산)에 부임한 지 두 해가 지나 누각 세우고 못 파고 세상이 화평하다. 천용자 찾아와서 문 두드리며 사또님 만나자고 외치는 큰 소리, 돌계단 뛰어올라 중문 안에 들어오는데 맨발에 붉은 다리 일하던 농부 같네. 읍도 절도 하지 않고 두 다리 뻗고 앉아 번번이 하는 말이 술 달라는 소리뿐.
맑은 바람이 사방에 상쾌하게 부는지라 첫눈에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줄 내 알고는 손 잡고 가슴을 열어 큰 포부 이야기하며 비 오는 아침 달 뜨는 저녁 늘 어울려 지내니, 배우지 못한 미명(도사)이 한유를 찾았고, 지공이 대옹(남송의 은자)을 방문한 일과 서로 비슷하네. 천용자 성은 장씨인데 고향을 물으니 입을 다무네.
-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3
장천용전 장천용은 해서(황해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천용이었다. 관찰사 이의준이 순행하다가 곡산에 이르러서, 그와 함께 놀고 난 뒤 그의 이름을 '천용'으로 고쳐주었다. 그는 그 후로 바뀐 이름으로 행세하였다.
나는 곡산에 부임하던(1797) 그 다음 해에 못을 파서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어느 날 밤 달빛 아래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 퉁소 소리가 듣고 싶어 한숨을 지었다. 어떤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이 고을에 장생이라는 자가 있는데, 퉁소도 잘 불 뿐더러 거문고도 잘 뜯습니다. 그러나 그는 관청에 들어오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어서 야전을 그의 집으로 보내 데려오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아. 만일 그가 진짜 고집이 있다면, 억지로 데려오게 할 수는 있겠지만 어찌 그렇게까지 하면서 퉁소를 불게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 사람에게 가서 나의 뜻을 전하시오. 그가 오지 않겠다면 그만이지, 억지로 할 것까지는 없네." 얼마 뒤 사자가 그 일을 마치고 내게 와서 고하였다. "장생이 벌써 문 밖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망건을 벗은 머리에 버선을 벗은 발에다, 옷은 입었으나 띠는 두르지 않았다. 이윽고 술에 잔뜩 취하여 눈빛이 희미해졌고, 퉁소를 쥐었으나 불지는 않은 채 오직 자꾸만 소주를 찾았다. 서너 잔을 주었더니 더욱 비틀거리며 아무 의식도 없었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붙들고 나가 밖에다 재웠다. 다음날 다시 그를 못 위의 정자로 불렀다.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하자 천용이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말하였다. "퉁소는 제 장기가 아니옵고, 그림 그리기를 잘 하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릴 견본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산수, 신선, 호승, 괴조, 수등, 고목 등 수십 폭을 그렸다. 수묵이 능수능란하여 그 흔적을 볼 수 없고, 모든 것이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예스럽고 괴이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사물의 모습을 묘사함에 있어서는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그려 신기한 정채가 빛을 발하여,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이윽고 붓을 던지고는 술을 찾아서 또 크게 취하였다. 사람들에게 그를 부축하여 보내게 하였다. 다음날 그를 다시 불렀는데, 그는 이미 어깨에 거문고 하나를 메고, 허리에 퉁소 하나를 꽂은 채 동쪽으로 향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 이듬해 봄에는 청나라 사신이 오게 되었는데, 일찍이 천용에게 신세를 입은 적이 있었던 사람이 평산부 관가를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천용에게 단청 일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천용과 같이 일을 하던 사람이 부친상을 당하였다. 천용이 상주의 막대기를 보니, 기이하게 생긴 대나무인데 묘한 소리가 났다. 천용이 이내 밤에 몰래 그 막대기를 훔친 뒤, 구멍을 뚫어 퉁소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태백산성의 중봉 꼭대기에 올라가서 퉁소를 불다가 날이 새자 돌아왔다. 상주가 대단히 화가 나서 천용을 꾸짖었다. 천용은 그곳을 떠났다. 그 뒤 몇 달이 지나 나는 곡산부사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다시 몇 개월 지나서 천용이 특별히 가람산의 산수화를 그려 가져왔다. "올해는 꼭 영동(강원도)으로 거처를 옮겨 살 생각입니다." 천용에게는 아내가 있으나 외모가 못난데다가 일찍부터 바람병을 앓았다. 그래서 길쌈도 못 하고 밥도 못 지었으며, 아이도 못 낳았다. 또한 성격이 불량하여 늘 누워서 천용에게 바가지를 긁었지만, 천용은 조금도 부부 사이를 긴밀히 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이상하게 여겼다. - 『여유당전서』, 권17, 전
작품 해설 장천용이라는 인물을 다산이 처음 만난 것은 곡산부사로 부임한 뒤였다. 다산은 못을 파고 정자를 지은 뒤 퉁소를 불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는데, 그때 소개받은 인물이 장천용이었다. 장씨는 다산이 시에서 진술한 대로 대단히 기인에 가깝고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또를 대면하면서도 절도 하지 않고 그냥 술만 찾는 모습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다산은 정조 23년에 곡산부사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몇 달 뒤 장천용이 기이한 산수화를 들고 찾아왔다. 이때 천용의 집안 내력과 사정을 소상하게 알게 된 모양이다. 그리하여 다산은 이 인물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시가 양식인 「천용자가」를 먼저 지었고, 산문 양식인 「장천용전」을 나중에 지었다. 창작 연대는 시의 경우 다산이 그곳에 부임한 다음해인 정조 22년(1798)이고, 전의 경우는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곧 정조 23년 이후에 이루어진 듯하다.
시 「천용자가」는 크게 내용면에서 둘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주인공 장천용의 기이한 삶과 행동, 그리고 그가 그리는 그림들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는 다산이 장천용을 직접 만나는 대목이 나온다. 전반부를 보면 천용은 의복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방방곡곡 명산을 찾아다니며 일상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타고난 예술적 소양이다. 그는 퉁소를 잘 부르며 가야금을 잘 타고 노래를 잘 부르는 등 뛰어난 음악적 소질을 지닌데다가 그림까지 잘 그리는 예인이었다. 특히 그는 부녀자의 모습이나 꽃들보다는 산수화를 즐겨 그리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이름이 관가에 알려지는 것을 매우 꺼려했던 듯하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리겠다는 소리를 하면 노여움이 칼날처럼 날카롭다고 하였으니, 그는 세속의 명리를 좇는 인물은 아니었다.
산문 양식과 시에 묘사된 장천용의 성격을 보면, 집을 나올 때 입었던 좋은 옷은 거지에게 걸쳐주는 대신에 자신은 누더기 옷으로 바꿔 입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정이 많고 남을 돌볼줄 아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특히 「장천용전」의 후반부에서 그는 아내의 바가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에게 변함없는 애정으로 대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로 보아 그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또한 한시의 후반부를 보면 그는 사또를 만나도 인사를 하지 않는 거리낌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 장천용의 구속받지 않는 삶과 행동은 단순한 객기에서가 아니라, 크나큰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그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잘 대해주었다. 장천용은 다산이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울까지 찾아가 그림을 바치고 속마음을 털어놓기까지 하였다. 두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다산이 기이한 행색의 하층인물을 대하고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읽을 수 있거니와, 그가 장천용에게 큰 관심을 가졌음을 위에 실린 서로 다른 양식의 두 편의 글을 통하여 확인되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