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8. 상군열전 商君列傳
상앙은 위(衛)를 떠나 진(秦)으로 가서 자신의 학술을 밝혔다. 그의 부국강병책으로 인해 진의 효공(孝公)은 천하의 패자가 되었고, 그의 법(法)은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제8에 <상군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상군은 위(衛)의 여러 첩들한테서 난 공자(公子)들 중의 한 명이다. 이름은 앙이고 성은 공손씨(公孫氏)이며 그 조상은 본래 희성(姬姓)이다. 앙은 어려서부터 형명(刑名)의 학(學)을 좋아했다. 위(魏)의 재상인 공숙좌를 섬겨 중서자(中庶子: 官名)가 되었다. 공숙좌는 앙이 현명함을 알았으니 위왕(魏王)에게 추천하기 전에 병이 들었다. 이 때 위(魏)의 혜왕(惠王: B.C. 370-335 在位)이 몸소 공숙좌에게 문병을 가서 짐짓 물었다. "그대의 병이 악화되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도 생기면 장차 사직을 어떻게 하지요." 공숙좌는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제 집에 중서자 벼슬에 있는 공손앙이라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비록 젊기는 하나 천하의 기재(奇才)이지요. 원컨대 대왕께선 그에게 나라일을 맡기면 큰 탈이 없을 것입니다." "글쎄......." 왕이 수긍하려 들지 않자 공숙좌는 왕의 좌우를 물리치고 나서 은밀히 말했다. "만일 대왕께서 앙을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그를 죽이십시오. 국경 밖으로 내보내는 경우 위나라에게 큰 후환이 될 것입니다." "알겠소." 왕이 돌아간 후 공숙좌는 급히 앙을 불렀다. "잘 듣게. 지금 왕께서 내가 죽은 뒤에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을 묻기에 내가 자네를 추천했네. 그러나 왕의 낯빛을 보니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을 것 같았어. 더구나 나는 군주를 먼저 하고 신하를 뒤로 해야 된다는 소신 때문에 자네를 등용하지 않겠다면 죽이라고 했어. 왕은 그러마고 하면서 떠났으니 자네도 죽기 전에 어서 이 나라를 떠나게." 앙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왕께선 어른의 말씀대로 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지 못했는데 어찌 어른의 말씀대로 죽이라는 말씀인들 들으시겠습니까." 앙은 끝내 위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혜왕은 돌아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 "공숙의 병이 몹시 무겁다. 그 이유로 그가 죽거든 나라의 일을 공손앙에게 물으라 했는데 어찌 올바른 정신으로써야 그런 말을 하겠는가." 혜왕은 공숙좌의 건의를 노망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어느덧 공숙좌는 죽었다. 때마친 진(秦)의 효공(효공: B.C. 361-338 在位)이 전국에 포고령을 내려두고 있었다. -선조 목공이 이룩했던 위업을 다시 이룩하고 동쪽의 잃은 땅을 되찾으려 하니 이에 온 나라에 명령을 내려 현명한 인재를 구하는 바이다. 앙이 그 소문을 들었다. 그는 잠시도 지체 않고 서쪽의 진나라로 떠났다. 앙은 우선 효공의 총신(寵臣)인 경감(景監)을 만났다. "진왕을 뵙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경감의 주선으로 앙은 진왕을 만날 수가 있었다. 앙은 진왕을 상대로 열심히 유세했다. 그런데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는데도 효공은 졸기만 했다. 앙은 하릴없이 물러나왔다. 경감은 효공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그대가 추천한 그 자는 말이 허망스럽고 무어 쓸 만한 데가 조금도 없더군." 경감이 앙을 만나자마자 화를 냈다. "당신이 왕께 무얼 어떻게 말씀드렸기에 그토록 탐탁찮게 여기시오?" "제 딴엔 제왕의 도(道: 五帝의 道)를 열심히 설파했는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시더군요. 한 번 더 뵙게 해 줄 수 없겠습니까?" 앙의 사정으로 닷새 뒤에 다시 효공을 만날 수가 있었다. 물러나와 있는 앙에게 경감은 다시 꾸짖었다. "오늘은 또 무슨 허튼 소리를 하셨기에 왕께선 그토록 역정을 내시오?" "오늘은 왕도(王道: 夏.殷.周 3代의 盛王들이 政治한 道)를 설득했는데 역시 마음에 드시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마련해 주십시오." 며칠 뒤 앙은 다시 효공을 만났다. 앙이 떠난 뒤 경감은 역시 조심스럽게 진왕께 물었다. "역시 앙은 쓸모가 없지요?" "아니오. 쓸 만하오. 좋은 손님이오. 더불어 이야기할 만하오." 경감이 물러나와 앙에게로 갔다. "대체 그대가 오늘은 왕께 무슨 말씀을 드렸기에 그토록 흡족해 하시오?" "오늘은 제가 대왕께 패도(覇道: 武力으로 政治하는 覇者의 道)를 가지고 설명해 드렸더니 몹시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기회를 보아 다시 한 번 만나뵙도록 해 주십시오. 이제는 공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얼마 뒤 앙은 다시 효공을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경감이 앙을 만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효공은 며칠 동안이나 앙을 놓지 않고 궁중에 머무르게 하고 있었다. 며칠 더 지나서 경감은 비로소 앙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대는 대체 무엇을 말씀드렸기에 그토록 인군의 마음을 사로잡았소. 왕께서는 이만저만 기뻐하지 않으시더이다." "제가 공에게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도를 실행하면 하.은.주 3대에 비견될 만한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제왕의 도를 실천하겠다고 하셨소?" "아니오. 너무나 길고 멀어서 나는 기다릴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개 현명한 군주란 자기 일 대 동안에 천하에 이름을 날려야 하는데 어찌 담담하게 수십 년 수백 년을 기다려야 하는 정치를 하란 말인가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을 얻었소?" "단대(單代)에 이루는 부국강병책을 말씀드렸더니 그토록 좋아하실 수가 없더군요." "정말 잘 되었소!" "그렇지만 부강책만으로는 하.은.주 시대의 임금의 덕화(德化)란 기대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앙은 진나라에서 등용되었다. 앙이 국법을 고치려고 서두르자 효공은 천하 사람들이 자기를 비방할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이에 앙이 말했다. "확신없는 행위에는 공명이 따르지 않고 확신없는 사업에는 성공도 없습니다. 또한 남보다 뛰어난 행위를 하면 원래가 세상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남들이 모르는 탁견을 가진 자는 반드시 오만하다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의 성과에 대해서 어둡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성과를 미리 압니다. 백성들이란 일을 시작할 때에는 의논할 수 없으나 일의 성과는 함께 즐길 수가 있습니다. 지고한 덕을 논하는 자는 속설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성과를 이루는 자는 범인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적어도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하여 옛법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며 적으나마 백성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구태여 구례(舊禮)를 좇지 않는 법입니다." "좋다. 그대로 해 보라." 그러나 대신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감룡(甘龍)이 나섰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대왕. 성인은 백성의 풍속을 고치지 않고 교화(敎化)하며 지혜로운 자는 법을 고치지 않고 다스립니다. 백성의 풍습에 따라 교화하면 애쓰지 않고도 공을 이루며 옛법에 따라 다스리면 관리들도 익숙하고 백성들도 편안해 합니다." 앙이 반박하고 나섰다. "감룡의 의견은 속된 견해에 불과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옛풍습을 좋아하고 학자들은 배운 바에만 빠져 버립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법을 지키게 하기에는 알맞으나 법을 넘어선 문제들은 함께 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은.주 3대는 예(禮)가 서로 같지 않고도 왕자(王者)가 되었으며 춘추(春秋)의 오백(五伯: 五覇, 齊의 桓公.宋의 襄公.晋의 文公.秦의 목公.楚의 莊王)은 법제가 같지 않고도 모두 패자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의 제재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예를 고치고 못난 사람은 예에 구속됩니다." 두지(杜摯)도 반발하고 나섰다. "백 배의 이로움이 없으면 법을 고쳐서는 안 되며 열 배의 효과가 없으면 기(器: 禮)를 바꿔서도 안 됩니다. 고법(古法)을 본받으면 잘못이 없고 고례(古禮)를 따르면 허물이 없습니다." 앙이 다시 덧붙였다. "세상을 다스리는 길이 어찌 한 가지 방법밖에 없겠습니까. 그 나라에 편리하면 옛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은의 탕왕과 주의 무왕은 고법을 따르지 않고 왕업을 이루었고 하의 걸왕과 은의 주왕은 예를 바꾸지 않고도 멸망했습니다. 고로 옛법에 반한다 해서 비난할 것도 아니며 고례를 따른다 해서 굳이 칭찬할 일도 못 됩니다." "좋다. 앙의 생각대로 한다." 효공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진왕은 앙을 좌서장(左庶長: 卿大臣과 大良造 아래의 將軍職으로 모든 계급과 작위를 나타냄)으로 삼고 변법(變法)의 영(令)을 확정케 했다.
-열 집 혹은 다섯 집씩 묶어 한 조로 짜고 서로 죄를 적발하거나 죄에 연좌되게 하고 부정을 고발하지 않으면 요참(腰斬: 허리 자르는 형벌로 斬首보다 무거운 刑)에 처하며 부정을 고발하는 자는 적(敵)의 머리를 벤자와 같이 상을 주고 부정을 감춘 자는 적에게 항복한 자와 같은 벌을 준다. -백성으로 두 사람 이상의 남자가 한 집에 살면서 분가하지 않는 자는 그 부세(賦稅)를 두 배로 한다. -군공(軍功)이 있는 자는 각각 그 공의 크고 작음에 따라 벼슬을 받는다. -사사로운 싸움을 하는 자는 각각 그 경중에 따라 형벌을 받는다. -어른이나 아이나 다 힘을 모아 밭갈이와 베짜기를 본업으로삼고 곡식이나 비단을 많이 바치는 자는 부역(賦役)을 면제한다. -상공업에 종사하여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모두 조사해서 관청의 노비로 삼는다. -공실(公室)의 일족이라도 군공(軍功)이 없으면 심사를 거쳐 공족(公族)의 족보에 올릴 수 없다. -가격(家格)의 존비.작위.봉록의 등급은 분명히 하고 각각 그 차등을 둔다. -개인 소유의 전지(田地)와 택지의 면적, 신첩(臣妾)의 수, 남녀노비의 수, 의복의 종류.형식은 가격의 등급에 따른다. -유공자는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으나 무공자는 부유하여도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없다.
법령은 마련되었지만 앙은 아직 공포하지는 않았다. 법령을 믿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앙은 묘안을 하나 짜냈다. 3장(三丈: 1장은 여섯 자)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 저자 남문에다 세운 것이다.
-이것을 옮겨서 북문에 세우는 자에게는 10금을 준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상하게만 생각하고 아무도 그것을 옮기지 않았다. 이번에는 50금을 준다고 썼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것을 옮겼다. 앙은 그를 불러 50금을 주고 나라가 백성을 속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런 후에야 앙은 새 법령을 발표했다. 신법(新法)이 백성들에게 시행된 지 일 년 만이었다. 새 법령이 불편하다면서 국도로까지 올라와 호소하는 자가 천을 헤아렸다. 바로 그 때에 태자가 법을 범했다.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 그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앙은 태자를 법대로 처단하려고 했다. "태자는 인군의 후사(後嗣)이므로 처벌할 수는 없소." 대신들이 말렸다. "그렇다면 편법을 쓸 수밖에." 그래서 태자 대신 부(傅: 太子의 보좌관)인 공자 건(虔)을 처형했다. 게다가 잘못 가르쳤다 하여 태자의 스승 공손가(公孫賈)를 경형(경刑:얼굴과 몸을 바늘로 찔러 먹물로 죄명을 새기는 형벌)에 처했다. 그제서야 진나라 백성들은 새 법령을 따랐다.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 만에 진의 백성은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길에 떨어진 물건을 몰래 줍지 않았고, 산에는 도적이 없었다. 생활은 풍족해지고 전쟁에는 용감하였으며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을 먹었다. 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전날 법령이 불편하다고 불평하던 자인데 지금은 법령이 편하다고 말한 자가 있었다. "이런 자도 법령의 교화를 어지럽히는 자다." 그래서 변방의 성으로 내쫓았다. 그런 후로는 법령에 대하여 아무도 이러쿵저러쿵하는 자가 없었다. 진왕은 앙을 증직시켜 대량조(大良造)로 삼았다. 이 해에 앙은 병사를 이끌고 위의 안읍(安邑: 魏都 山東省 夏縣북쪽)을 포위 항복시켰다. 3년 후에는 토목 공사를 일으켜 기궐(冀闕: 새 법령을 써서 걸어놓는 궁궐문)과 궁전을 함양(咸陽: 陝西省 咸陽縣 동쪽)에 건설했다. 결국 진은 옹(雍: 陝西省 鳳翔縣 남쪽)에서 함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영을 내려 부자.형제가 한 집안에 사는 것을 금하고 소도(小都).향읍(鄕邑).취락을 모아 현(縣)으로 만들고 모두 31현에 현령(縣令)이나 현승(縣丞)을 두었다. 농지를 개간해 경지간의 경계를 분명히 했으며 부세를 공평하게 하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했다. 이것을 시행한 지 4년 만에 공자 건이 다시 법을 어겼다. 법치가인 앙은 이번에는 건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를 의형(코를 베는 형벌)에 처했다. 그런 후 다시 5년이 지나자 진나라는 부강해졌다. 주(周) 천자(天子)가 종묘의 제사에 쓴 고기를 효공에게 보내니 제후들이 모두 경하해 마지않았다.
이듬해에는 제나라가 위나라 군대를 마릉(馬陵)에서 깨뜨리고 태자 신(申)을 사로잡았으며 장군 방연(龐涓)까지 죽였다. 앙은 이에 자극을 받아 효공을 설득했다. "우리 진나라와 위나라와의 관계를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의 뱃속에 있는 병과 같습니다. 사람이 이기느냐 병이 이기느냐입니다. 즉 위나라가 진나라를 삼키지 않으면 진나라가 위나라를 삼켜야 합니다. 왜냐 하면 위는 험준한 산령(山嶺) 서쪽에 자리하여 도성을 안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진은 황하를 경계로 하여 독천산(獨擅山: 咸谷關 太行山) 동쪽의 이로운 지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단 유리하면 서쪽으로 진을 침략하고피폐하면 동쪽을 침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위나라를 공격하자는 얘기요?" "진은 지금 주군의 현명하심과 성덕 아래에서 국위를 성대하게 떨치고 있습니다만 위나라는 지난 해에 진에 대패하여 제후들 사이에서도 고립되어 있습니다. 기회는 바로 이 때입니다. 위를 쳐야 합니다. 위가 동쪽으로 옮겨갈 때 진은 황하와 준령의 요해를 차지해 동쪽의 제후들을 호령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대왕께서 제왕의 위업을 이루는 길이 될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오." 진왕은 앙을 장군으로 삼아 위나라를 치게 했다.
한편 위나라에서는 공자 앙이 장군이 되어 진과 맞서고 있었다. 진의 앙은 하나의 계략을 세워놓고 나서 위의 앙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와 공자와는 본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이제 비록 두 사람이 적국의 장군이 되어 있지만 차마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저는 공자와 직접 만나 서로 마주보면서 옛정을 더듬고 즐겁게 먹고 마시며 화약(和約)을 맹세한 다음, 서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두 장수는 회맹하게 되었다. 맹약을 끝내고 유쾌하게 서로 술잔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무장병을 매복시켜 두었던 진의 앙이 공장 앙을 덮치게 했다. 공자 앙은 사로잡히고 남은 위군은 여지없이 격파되었다. 앙은 진으로 개선했다. 위나라는 자주 제와 진에게 격파당했다. 병력은 줄고 땅은 계속해서 깎였다. 혜왕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사신을 진으로 보내어 황하 서쪽의 땅을 갈라 진에 바치고 강화했다. 그나마도 불안해서 위는 안읍을 떠나 대량(大梁)으로 천도했다. 위의 혜왕은 탄식하며 말했다. "과인이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아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다!"
앙이 위군을 격파하고 돌아오자 진에서는 앙에게 오(於: 河南省 內鄕縣서쪽)와 상(商: 商州의 동쪽) 등의 15읍을 봉해 상군(商君)이라 불렀다. 상군이 진의 재상이 된 지 10년이었다. 그럴 동안 진의 종실과 외척 주에서 그를 원망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앙이 조량(趙良)을 만났을 때 약간 거드럼을 피며 이렇게 요구했다. "맹란고(孟蘭皐)의 소개로 앙은 선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과 사귀기를 청합니다." 뜻밖에도 조량의 태도는 냉담했다. "저는 싫습니다." "아니, 그건 어째서입니까?" "공자 말씀에, 현자를 밀어서 주군으로 받드는 자는 번영하고 불초한 자를 모아 왕노릇하는 자는 몰락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불초하기 때문에 감히 사귀자는 명령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었습니다.자격이 없는 자가 그 지위에 있는 것을 탐위(貪位)라 하고 받아야 할 명예가 아닌데도 그 명예를 입고 있는 것을 탐명(貪名)이라 했습니다. 제가 교제를 거절하는 것은 귀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혹시 탐위.탐명하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앙이 불쑥 되물었다. "내가 진을 다스리는 것이 불만스럽다는 뜻이군요." "반성하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彊)이라 한답디다. 성인인 순(舜)의 말에도 스스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더욱 높아진다는 것이 있습니다. 저에게까지 물을 것도 없이 귀하께서는 순임금의 도를 따라야 되겠지요." "원래 진나라는 융적(戎翟: 북쪽 오랑캐)의 풍습과 같아서 부자(父子)간의 구별도 없이 한 여자를 공유하고 살았습니다. 내가 지금 그러저러한 더러운 풍습을 고쳐 남녀의 구별도 분명히 하고 훌륭한 궁문도 세워 문화가 진보한 노(魯)나 위(衛)에 비하여 전연 못할 게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는 내가 진을 다스림에 있어서 오고대부(五고大夫: 秦목公 때의 名臣 百里奚)보다는 현명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천 마리의 양가죽은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합니다. 천 사람의 굽실대는 말은 한 사람의 거리낌없는 직언만 못합니다. 은의 주왕은 신하들의 말을 봉쇄함으로써 멸망했고 주의 무왕은 직언을 받아들였기에 번창했습니다. 만약 귀하께서 무왕이 그르다 생각치 않으시고 저를 주살하지 않으시겠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정직하게 말씀드리지요." "약속합니다. 외양을 장식한 말은 꽃이고 지극한 말은 열매이며 괴로운 말은 약이고 달콤한 말은 독이라고 들었습니다. 선생께서 진종일 바른 말만 해주신다면 그건 나에게 약이겠지요." 그제서야 조량은 안심하고 말문을 열어놓기 시작했다. "무릇 백리해는 형(형: 楚) 땅의 보잘것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진의 목공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뵙기를 원했지만 갈 여비조차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자신을 진으로 가는 여행자에게 팔아 그의 노예가 되어 남루한 옷을 입고 따라갔습니다. 일 년쯤 지난 뒤에 목공은 누더기옷의 소치기 백리해를 알아 보았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를 재상으로 등용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아무도 백리해에게 불만을 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와 내가 무슨 상관입니까?" "백리해는 진의 재상이 된 지 육칠 년이 지나자 동쪽으로 정나라를 치고 진(晋)의 군주를 세 번이나 세우고 [惠公.懷公.文公] 한 번 형국의 재난을 구해 주고 국내를 교화하니 파인(巴人: 四川省의 百姓)이 공물을 가져오고, 은덕을 제후에게 베푸니 팔방의 오랑캐까지 귀복했습니다. 서융(西戎)의 현인 유여(由余)까지도 소문을 듣고 문을 두드리며 뵙기를 간청했습니다." "그야......." "오고대부[百里奚]는 진의 재상이 되자 피로해도 좌승(坐乘: 옛날에는 수레에 立乘하고 安車만 앉아 탔음)하지 않고 더워도 거개(車蓋)를 씌우지 않았습니다. 국도 안에서 행차할 때에는 호위수레를 거느리지 않았고 무장 호위병도 없었습니다. 그의 공로와 명예는 기록에 올라 부고(府庫)에 보존되어 덕행은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리해가 죽자 진의 남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 절구질할 때도 저가(杵歌: 방아타령)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고대부의 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귀하께서는 효공을 처음 볼 때도 총신인 경감을 통해서였고, 또 경감의 집에 편히 머무르면서 그를 주인으로까지 섬겼습니다." "굳이 명예롭지 못한 행위라고는 볼 수가 없지요." "어쨌건 귀하는 진의 재상이 되어 백성의 이익을 일삼기보다 장대한 궁문부터 새웠습니다." "그것을 공적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겠지요." "또한 태자의 사(師)와 부(傅)를 처형 또는 먹물을 들이고 가혹한 형벌로 백성을 살상했습니다. 이것은 남의 원한을 사고 자신에게 재난을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재상의 교화가 왕의 명령보다 더 지독하고 재상의 처분이 왕의 명령보다 더 빨랐습니다. 게다가 귀하가 세운 제도는 도리에 어긋났고 바꾼 법령도 이치에 어긋나니 교화라고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선생의 생각이겠지요." "또한 상군(商君)으로 봉해지신 이후로는 마치 임금처럼 남면(南面)하여 과인이라 칭하며 날마다 진나라 귀공자들의 탈법이나 감시하고 규탄하고 계십니다. <시경(詩經)>에 '쥐한테도 체통이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가 없겠나. 사람에게 예가 없다면, 차라리 일찍 죽기나 하지'라고 씌어졌습니다. 이 시에 비추어 볼 때 귀하가 행하고 있는 행위는 하늘의 수명을 다 누릴 것 같지가 않습니다." "너무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공자 건은 코를 베인 형을 당한 사실을 부끄러이 여겨 벌써 8년 동안이나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귀하께선 축환(祝환)을 사형에 처하고 공손가를 경형에 처했습니다." "모두 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일시(逸詩)>에 보면, '인심을 얻어서 일어나고, 인심을 잃어서 망한다네'라고 적혔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몇 가지 일들이 인심을 얻을 만한 일들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법이 느슨할 때 나라의 기강인들 선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귀하께선 외출할 때 뒤따르는 수레가 수십 량이고 창칼로 무장한 힘센 무사 수백이 배승(陪乘)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그토록 삼엄한 경비 중 한 가지만 마음에들지 않아도 귀하께선 외출을 하지 않습니다. <서경(周書)>에 보면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적혔습니다. 귀하가 아무리 위험을 방비하고자 하나 제가 보기엔 그 위태로운 상태가 아침 이슬과 같아 보입니다." "선생께선 내가 어떻게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는 겁니까?" "장수하기를 원하신다면 제 말씀을 들으십시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선 상.오의 15개 읍을 돌려드리고 전원으로 은퇴하여 화초에 물주며 자연과 더불어 여유자적하게 지내십시요. 그러시기 전에 동굴에 숨어 사는 현인을 세상에 나오게 하여 추천하고, 노인을 모시고 고아를 기르고 부모를 공경하고 유덕한 자에게 알맞는 지위를 주고 이들을 존중한다면 그나마도 은퇴하는 귀하의 마음은 많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아직도 상.오(商.於)의 부를 탐내고 진의 정치를 전행(專行)하게 되면 반드시 만인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입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재상이라지만 빈객[商앙은 外國人]의 처지신데 왕께서 갑자기 서거하시면 귀하의 파멸은 잠깐입니다. 어찌 귀하를 죄 주려는 자가 적다 하겠습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앙은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화사한 햇살 아래 천하는 태평성대였으며 자신을 우러러보는 백성들의 눈빛은 온화하기만 했다. "조량은 바보다." 앙은 그의 충고를 일소에 부쳤다.
다섯 달 후였다. 효공이 갑자기 죽고 태자가 섰다. "상군(商君)이 모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군사를 보내 그를 포박하십시오." 공자 건의 무리들이 들고 일어났다. 앙은 다급했다. 국경 밖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신분을 숨겨 함곡관 부근의 객사에 들러 숙박하려고 했다. 객사 주인은 그가 재상 상앙이란 사실을 알 까닭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여행증을 가지고 계신지요?" "없는데......." "아니 되겠습니다. 상군의 법에는 여권이 없는 분을 투숙시키면 안됩니다. 저는 연좌의 벌을 받게 됩니다." 객사에서 쫓겨난 앙은 서글피 탄식했다. "아, 내가 만든 법의 폐해가 내게까지 미치는구나!" 앙은 숨고 숨어서 위(魏)나라로 도망쳐 갔다. 위나라에서도 그를 반길 턱이 없었다. 그들은 상앙이 일찍이 공자 앙을 속여 죽인 데다 위군까지 쳐부순 것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군을 받아 주지 말라. 그렇다고 타국으로 도망치는 것을 방치해서도 안 된다." "위나라에 잡아두는 것도 곤란하다. 상군은 진의 국적(國賊) 아닌가. 더더구나 진은 강국이다. 이를 핑계로 진나라가 위로 쳐들어 올지 모른다. 후환을 없애려면 어서 진으로 돌려 보내라." 별수 없이 앙은 다시 진으로 숨어 들어왔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다. 군사를 모아 독립할 수밖에." 앙은 상읍(商邑)으로 들어가 자기의 무리들과 읍병(邑兵)을 몰아 정나라로 쳐 나갔다. 거기서 발판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진의 군대가 먼저 들이닥쳤다. 정나라의 면지(陝西省 華縣 북쪽)에서 부닥쳤으나 패해서 앙은 사로잡혔다. 진의 혜왕(惠王)은 앙을 거열형(車裂刑)에 처하여 조리 돌려서 말했다. "상앙처럼 모반하면 이 꼴이 된다." 앙의 일족이 멸문지화를 입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상군은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다. 효공에게서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처음 마음에도 없는 제왕의 도를 늘어놓은 것은 속임수다. 효공을 만나는 부탁을 총신을 이용한 점도 교묘하다. 등용된 후에는 공자 건을 처형하고 위의 장군 앙을 속이고 조량의 간곡한 충고도 듣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 역시 상군에게 은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일찍이 상군의 저서 <개색(開塞)> <경전(耕戰)> 등등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그의 행적과 비슷한다. 상군이 결국은 진나라에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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