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12. 천지에 내가 가득하건만 - 나르시시즘
정신분열증과 나르시시즘
정신분열증 환자에게는 두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바깥 세계로부터의 철저한 이탈과 과대망상이 그것이다. 그들은 끝없이 자신의 내면 속으로만 기어들어가며 바깥의 세계-다른 사람들이나 사물, 자연등에는 아무런 관심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온 마음을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만 쏟게 되고 이윽고 과대망상에 빠져 드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열증을 정신분석학에서는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의 상태 로 파악한다. 나르시시즘이란 자기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도취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자기애라고도 한다.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쓴 사람은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폴 네케였다. 네케가 말한 나르시시즘이란 일종의 성적도착심리, 즉 스스로의 육체에 대해 성적인 충동을 느끼는 이상 심리를 가르킨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단순히 자신의 육체에 대한 애착 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되고 연속된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으로 확장시켜 정신분석이론에 도입되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은 비정상적인 이상 심리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게 마련인 정상적인 발달 과정의 한 부분이다. 갓난아이는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엄마가 웃으면 자기가 웃는 걸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면서 차츰 나와 남을 구별하게 되고 자기 이외의 사람과 사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자아을 향했던 리비도가 대상을 향해 옮아가는 것이다.
자아를 향한 자아리비도와 대상을 향한 대상리비도의 관계를 프로이트는 아메바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아메바는 위족이라는 돌기를 뻗쳐 그속에 자신의 신체 물질을 유입한다. 아메바는 필요에 따라 돌기를 내거나 거둬들이는데 일단 뻗친 돌기도 끌어당기면 다시 원래의 둥근 덩어리가 된다. 아메바가 돌기를 뻗치는 행위를 자아가 대상을 향해서 리비도를 내보내는 행위와 견줄 수 있다. 아메바가 필요에 따라 돌기를 냈다가 거둬들였다. 하는 것처럼.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자아 리비도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대상 리비도로 전환될 수 있고 대상 리비도는 다시 자아 내부로 들어올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강력하고 충격적인 동기에 의해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무리하게 떼어 놓는 과정이 일어나면 리비도가 자아만을 향하게 되고 그 결과 과대망상이 생겨난다. 충격적인 일을 당한 뒤 머리가 돌아버리는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다. 즉 정상인들도 많건 적건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비정상적으로 강화되면 정신병에 이르게 된다는 설명이다. 나와 남의 구별이 이루어지고 대상애를 경험한 후에 일어나는 병적인 나르시시즘을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하는 젖먹이 대의 원시적인 나르시시즘과 구분하여 2차적 나르시시즘이라 한다.
나르키소스의 닫힌 마음과 네메시스의 응징
나르키소스(나르시스는 나르키소스의 프랑스식 표기이다)는 강신 케피소스와 강의 요정 레이리오페 사이에 난 아들이었다. 망연자실 이라는 뜻의 이름 그대로 나르키소스는 쳐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르키소스가 두 살 나던 때였다. 강둑에서 요정들에게 둘러싸인채 놀고 있는 나르키소스를 보고 지나가던 웬 눈먼 여자가 저 아이는 제 얼굴을 보지 않아야 오래 살겠다는 이상한 말을 던졌다. 그 여자는 목욕하는 아테나 여신의 알몸을 멋모르고 훔쳐보았다가 장님이 되어 버린 테이레시아스였다. 아테나는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멀게 한 대신 예언의 능력을 주었던 것이니, 그녀가 던진 말을 곧 나르키소스의 앞날에 대한 불길한 암시였다. 어머니 레이리오페는 아들의 불행을 염려하여, 절대로 나르키소스의 눈에 거울이 띄지 않도록 할 것과 나르키소스가 강으로 나갈 때마다 수면을 흔들어 버림으로써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할 것을 요정들에게 명령했다. 성실한 요정들 덕분에 나르키소스는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르키소스는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 마침 숲의 요정 에코가 이 아름다운 소년을 보게 되었다. 에코는 한눈에 불 같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에코는 남이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에코는 원래 듣는 이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말재간이 뛰어난 요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제우스가 요정들을 희롱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지아비를 찾아나선 헤라를 만나게 되었다. 에코는 헤라를 붙들고 평소의 버릇대로 이 얘기 저 얘기 쉴틈없이 늘어놓았다. 에코가 너무 길게 수다를 떠는 통에 제우스와 놀고 있던 요정들이 헤라를 피해 모두 달아나버렸다. 에코는 본의 아니게 헤라의 발을 묶어 놓은 셈이 되고 말았다. 화가 난 헤라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다시는 날 속인 그 혀를 놀리지 못하게 할 것이나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말대답 할 때만은 예외로 해 주마. 이제부터 너는 남의 말의 끝난 뒤에는 지껄일 수 있으나, 네가 먼저 말을 하지는 못하리라! 때문에 에코는 그저 멀찍이서 나르키소스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에코가 모습을 숨긴 채 가마가만 나르키소스를 뒤쫓아 가노라니, 같이 사냥 나온 친구들을 잃어 버렸는지 나르키소스가 큰소리로 친구들을 불렀다. 거기 누구 없나? 없나! 하고 에코가 대답했다. 있으면 이리 나오게! 에코가 또 이리 나오게! 하고 대답했다. 이리 와서 함께 가자! 나르키소스가 다시 외쳤다. 그러나 에코는 함께 가자! 고 따라 외치면서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나르키소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나 나르키소스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손 치워! 너 같은 것에게 안기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매몰찬 말을 남기고 본 체 만 체 떠나 버렸다. 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말이요, 처신이었다. 에코는 부끄러워서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느라고 깊은 숲속으로 달아나 숨었다. 이때부터 에코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동굴이나 계곡에서만 살았으며 사랑을 거절당한 슬픔 때문에 나날이 여위어 가다가 마침내는 형체도 없이 스러져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나르키소스에게 사랑을 호소하다 죽어간 요정은 비단 에코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요정들이 응답 없는 사랑에 절망하여 에코처럼 몸을 말리면서 죽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상사병으로 여위어 가던, 람누스에 사는 샘의 요정 하나가 신들께 기도를 드렸다.
바라건대 나르키소스로 하여금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사랑의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깨닫게 해주소서.
요정의 응어리진 기도를 들어준 이는 저 가차 없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였다. 람누스의 산 속에는 아주 맑은 샘이 하나 있었다. 물이 어찌나 맑았던지 숲속의 짐승들도 그곳으로는 가지 않았으며 낙엽이나 나뭇가지도 그 샘만은 더럽히지 않았다. 어느 날 사냥에 지친 나르키소스가 더위와 갈증에 쫓겨 그 샘가를 찾았다.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구부리다가 나르키소스는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빛나는 두 눈, 어깨가지 내려온 황금빛 고수머리, 통통한 장미빛 뺨, 상아같이 흰 목, 반쯤 벌어진 붉은 입술, 나르키소스는 그만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한 번도 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지라 나르키소스는 그것이 제 얼굴인 줄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샘속의 요정이려니 생각한 나르키소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수면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 사랑스러운 몸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물속에 담그였다. 그러자 요정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가 싶더니 당황한 나르키소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어느새 다시 나타나 나르키소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나르키소스는 샘가를 떠날 수 없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수면에 비친 제 모습만 바라보았다. 자신을 사모했던 수많은 요정들처럼 나르키소스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열병으로 홀로 여위어 갔다. 나르키소스는 마침내 샘가에서 죽고 말았다. 얼마나 애를 태웠던지 죽고 난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가운데는 자줏빛이고 가장자리는 하얀 한 송이 꽃이 피었다. 그 이름, 수선화였다.
나르시시즘적 인간
나르키소스는 스틱스 강(저승을 감싸고 흐르는 강. 죽은 이들의 혼이 이 강을 건너서 저승으로 간다)을 건너면서도 강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려고 뱃전에서 몸을 구부렸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애착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르시시즘은 그 나름의 긍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요구와 목적을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우선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든 사람은 다 어느 정도는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더욱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다. 생물학적인 필요를 넘어서는 정도의 나르시시즘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위협하게 된다. 문제는 균형이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어지면서 가볍게는 좀 우스꽝스러운 자기도취가, 무겁게는 정신분열증이 일어난다.
자신의 요구와 소망을 과대평가하고 앞세운다는 점 때문에 나르시시즘은 이기주의와 가끔 혼동된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객관 세계를 주관적으로 왜곡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냉정하고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객관적인 이익이 아니라 주관적인 만족감 을 구하기 때문에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에도 집착할 수 있다. 요컨대 자기 자신과 바깥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왜곡하는 게 이기주의와는 구별되는 나르시시즘의 특징이다. 따라서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자신을 미화하게 되고 자신의 결점이나 한계를 볼 수 없게 된다. 별다른 재능도 없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나르시시스트는 곧 주위 사람들에게서 좀 웃기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은 나르시시즘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있다 고 논파했다. 뻔뻔스럽고 거만한 인물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단정하고 겸손하며 신중한 사람들 중에도 나르시시스트가 많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덕목에 자부심을 가짐으로써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킨다고 한다. 프롬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그런 유형의 예를 들었다.
어떤 남자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많은 친구들이 그가 누워 있는 침대 곁에 모여 평소의 그의 행동과 처신을 칭찬했다. 얼마나 학식이 풍부하고, 얼마나 지성적이며, 얼마나 친절하고 얼마나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는가 말이야...... 죽어가던 그 사람이 친구들의 말이 끝나자 화를 벌컥 내며 소리쳤다. 겸허함이 빠졌잖은가!
이성을 잠재우는 집단적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기대한 칭찬을 받는 데 성공하면 더없이 행복해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하면, 즉 나르시시즘에 구멍이 뚫리면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위축되고 만다. 또 제어할 길 없는 격분에 사로잡힌다.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받으면 우울증이나 증오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특성과 관련하여 프롬은 특히 집단적인 나르시시즘의 위험을 심각하게 경고했다. 어떤 한 개인이 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유능하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우수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당장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나가 내가 속한 단체, 집단, 지역, 종교, 국가, 민족으로 대치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우리들만이 진리의 소유자이고 우리들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문화적이며, 가장 평화를 사랑하고, 가장 재능이 뛰어난 민족이라는 주장이 실제로 공공연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 집단적 나르시시즘 앞에서 했던 것처럼 쉽사리 웃지 않는다. 섣불리 비판했다간 되려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집단적 나르시시즘이 가장 위력을 떨칠 때는 전쟁 때-열전이건 냉전이건-이다. 우리 국민은 선량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인도적인데 적군은 사악하고 이중적이며 잔혹하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의 투사인데 적군은 악의 화신들이다.는 식이다. 정치가들에 의해 조작되거나 선동되기 일쑤인 이런 집단적 나르시시즘은 극단적인 배타와 광신, 증오를 낳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말살하려는 광증을 낳는다. 그래서 프롬은 집단적인 나르시시즘을 이성을 잠재우는 치면적인 독약 이라고 갈파했다.
천지에 가득한 또다른 나
생물학이나 정신분석학, 사회 심리학이 아닌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인간학으로는 나르시시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남과 세상을 외면하는 닫힌 마음 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네메시스의 응징은 요정들의 간절한 호소에 한 번도 귀기울이지 않은 나르키소스의 닫힌 마음을 겨눈 것이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연민 때문에라도 한 번쯤 뒤돌아 보야야 했건만...... 남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을수록, 즉 마음이 열려 있을수록 나르시시즘은 감소된다고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예수님이나 나에게 절하지 말고 네 이웃을 섬겨라. 그것이 나를 섬기는 길이다. 고 한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바도 바로 그 열린 마음- 나와 남 사이의 벽을 허무는 마음, 나와 남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마음일 것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없어지는 경지, 그 곳이 바로 천국이요, 극락일 것이다. 하지만 나누고, 가리고, 따지며 앙앙불락 살아가는 우리 범인 들로서는 그 경지가 너무나 아득해 보인다. 아득하다 못해 슬프다.
내게는, 진창에 빠져 있는 내 발목이 서글퍼 눈물이 날 때면 생각나는 마음의 벗이 있다. 1970년 11월 13일, 스물 두 살의 꽃다운 나이로 숨져간 청년 노동자 전태일과 백인들의 약탈로 얼룩졌던 1800년대의 북미대륙에 살았던 인디언 추장 시애틀이다. 청계천 피복 공장의 지옥 같은 노동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다가 마침내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에 불을 질러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 임을 절규했던 전태일은 아득하다고 해서 포기해선 안된다고 우리를 다독여 준다. 전태일은 어느날 막노동판에서 불합리한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 같은 한 밑바닥 인생을 만났다. 어디서 얻어쓴 것인지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쓰고, 군복 바지에 흰 고무신을 신은 그 남자는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시종 무표정했다. 그 돌부처 같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을 전태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현실이냐!......사회는 자기 하나를 위해 이 어질고 착한, 반항하지 못하는 마도로스 모자를 쓴 한 인간을, 아니 저희들의 전체의 일부를 메마른 길바닥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또한 그는 죽기 얼마 전에 남긴 글에서 이렇게 썼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기억해 주기 바라네. 그러면 뇌성번개가 천지를 무너뜨러도, 하늘의 바닥이 빠져도, 나는 두렵지 않을 걸세
진저리나는 가난과 불행.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이 곧 나인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랬기에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던 것이리라. 시애틀은 미국 서부 지역에 살던 한 인디언 부족의 추장이었다. 1854년 미국 대통령 피어스가 이 인디언 부족이 오랫동안 살아온 땅을 백인 정부에 팔라고 제안했다. 물론 말이 팔라는 것이지 안 나가면 내쫓겠다는 통고문에 다름아니었다. 그에 답한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데 그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대지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대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대지의 모든 부분이 신성한 것이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는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대지를 결코 잊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여기가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의 품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지의 한 부분이고 대지는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 준다. 카누를 날라 주고 자식들을 길러 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우리는 우리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 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 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 내는 철마가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 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은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거미줄을 짜는 것이 아니라 그 거미줄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거미줄에 행한 일은 곧 자신에게 행한 일과 다른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 속에 간직해 달라. 온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당신들의 아이를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 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열린 마음으로 보면, 이렇듯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전체의 일부 이며 나아가서는 생명 있는 모든 것- 물, 새, 꽃, 바람마저도 내가 된다. 부끄러워한다. 둘러보면 천지에 내가 가득하건만 오늘도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 헛되이 나누고, 가르고, 따지기만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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