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1. 인간을 믿어도 될 것인가 (프로메테우스의 대답)
전봉준, 김남주, 프로메테우스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한 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 승리없는 투쟁 어떤 불행 어떤 고통도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던 사람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녹두장군 전봉군을 추모하는 김남주 시인의 시, <황토현에 바치는 노래>의 한 연이다. 김남주는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가 그랬고 그의 삶이 그랬다. 그는 1946년 전남 해남의 어느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들이 커서 제발 덕분 면서기로 출세 하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는 전남대 재학시절부터 일찌감치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과의 싸움에 들어섰다. 검정고시를 거쳐 들어간 대학에서 그는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을 이끌었으며 급기야 73년에는 유신에 반대하는 지하신문을 제작하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물론 학교에서는 제적되었다. 그 뒤로도 굽힘없이 반유신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79년 구속될 당시 그는 서른네 살이었는데 감옥문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9년 3개월 뒤인 마흔세 살 때였다. 들어갈 때는 까맸던 그의 머리가 나올 땐 하얗게 세어 있었다. 종이도 연필도 허락되지 않는 옥중에서 그는 못토막을 갈고 갈아 우유곽 속의 은박지 위에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불타는 투혼의 시편들을 써냇다. 그 시들은 80년대의 빛나는 저항 정신을 더할 수 없이 치열하게, 아름답게 그려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지상을 떠났다. 1994년 2월 13일, 그는 마흔여덟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꽃다운 젊음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석방된 지 5년만이었다. 그를 쓰러뜨린 것은 그가 온몸으로 맞서 싸웠던 군사 독재 정권도, 10년간의 엄혹한 감옥살이도 아닌 암세포였다. 그가 죽은 뒤 어느 평론가는 그를 기리는 글에서 앞서 인용한, 그의 시 한 대목을 인용한 뒤, 우리는 그를 김남주라 부른다 고 썼다. 전봉준을 기린 그의 시가 그 자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그가 남긴 뜨겁고도 맑은 시들 가운데 <나 자신을 노래한다>는 시가 있다. 감옥 생활 초기에, 남민전 사건을 과격파들의 경박하고 무책임한 모험쯤으로 비판하는 식자들을 향해 시인 특유의 직설적인 어법으로 써내려간 이 시는, 이런 대전제 아래 시작된다.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선사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자랑이라면 부자들로부터 재산을 훔쳐 민중에게 선사했던 나 또한 민중의 자랑이다.>
이어지는 1연에서 식자들의 비판을 열거한 뒤, 2연에서 그는 묻는다.
나는 묻고 싣다 그들에게/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엉거주춤 똥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그들은 척척박사이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묻겠다./불를 달라 프로메테우스가/제우스에게 무릎끓고 구걸했던가/바스티유 감옥은 어떻게 열렸으며/센트 피터폴 요새는 누구에의해 접수되었는가/......./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고통으로 끝났던가/프로메테우스, 인간을 만들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과 영웅 가운데 후세 사람들에게 가장 칭송받는 이는 아마도 프로메테우스일 것이다. 바이런이 <프로메테우스>라는 시에세 묘사했듯 그는
인간의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신들이 능멸해도 좋을 것으로는 여기지 못하게 했던/불멸의 눈을 가진 이 였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가치-인간과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부당한 고통을 견디는 고결한 정신, 억압에 항거하는 투쟁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기존의 제도와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불온한 사람들에게는 늘 그의 이름이 따라붙었다. 청년 마르크스가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러대던 <라인신문>이 프러시아 정부에 의해 폐간되자, 다른 일간지에서 일제히 그 사건을 만평으로 다루었는데, 마르크스가 사슬에 칭칭 묶여있는 모습을 그린 그 만평의 제목은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였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 신족이었다. 티탄 신족은 제우스가 올림포스의 권좌를 차지하기 전에 세상을 다스리던 신들이었다.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 어머니인 레아를 포함해 티탄 신족은 모두 열두 명이었다. 남신이 여섯, 여신이 여섯이었는데 프로메테우스는 남신 가운데 하나인 이아페토스의 아들이었다. 이아페토스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맏이는 아틀라스였고, 그 밑으로 프로메테우스(미리 내다보는 자)와 에피메테우스(나중에 깨닫는 자)가 있었다. 아틀라스는 감히 대적할 신이 없을 만큼 힘이 장사였고, 프로메테우스는 지혜롭고 신중했다. 막내인 에피메테우스는 이름 그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서야 허겁지겁 수습을 하는, 좀 철딱서니가 없는 신이었다. 티탄 신족과 일전을 치르고 최고 지배자의 자리에 오른 제우스는 어느 날, 지상에 살고 있던 프로메테우스를 불러 이렇게 명했다.
아래로는 뭇 짐승들을 다스리고 위로는 우리 신들을 섬길 인간을 만들도록하여라.
제우스가 하필 프로메테우스에게 그 중차대한 일을 맡긴 데는 까닭이 없지 않았다. 티탄과 올림포스 신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프로메테우스는 동생과 더불어 티탄 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제우스 편을 들었다. 이름 그대로 앞날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지라 대세를 따른 것이었다. 비록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 덕분에, 다른 티탄과 함께 무한 지옥 타르타로스에 유폐된 아버지 이야페토스, 어깨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야 되는 형벌을 받은 형 아틀라스와 달리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는 올림포스 신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런 공로도 있었으려니와 프로메테우스는 뛰어난 예지력과 지혜, 신중한 처신으로 제우스라고 쉽사리 대할 수 없는 그만의 위엄을 갖춘 신이었다. 제우스의 명을 받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프로메테우스는 우선 질좋은 진흙을 구했다. 그리고 거기다 물을 붓고 이겨서 신들의 형상과 비슷하게 인간을 빚었다. 그것을 이레 동안 볕에 말린 뒤 생명을 불러넣으려는 찰나, 지나가던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나비 한 마리를 나려 보냈다. 나비가 인간의 콧구멍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인간에게 마음이 깃들이게 되었다.(그리스어 프시케 PSYCHE는 나비라는 뜻과 마음, 영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태어나게 되었는데 이윽고 그들은 몇 배로 불어나 땅을 가득 채웠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우선 직립할 능력을 주었다. 덕택에, 다른 동물들은 모두 고개를 숙여 땅을 내려다 보는데 인간만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을 뿐, 그들은 처음에는 다른 동물과 다를바 없는 가엾은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몸을 가리는 따뜻한 털가죽도 없엇고, 사자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었으며, 거북이처럼 단단한 등껍질도,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었다. 일이 그렇게 된 데에는 에피메테우스의 책임이 컸다. 그는 인간을 비롯한 다른 동물들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능력, 이를테면 용기, 힘, 속도 같은 것을 부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동생이 그 일을 해내면 프로메테우스는 그 결과를 점검, 감독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량없는 에피메테우스가 신바람이 나서 닥치는 대로 선물을 나누어 주는 바람에 막상 인간의 차례가 되자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당황한 에피메테우스는 헐레벌떡 형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징징 짜는 동생을 달래놓고는 속이 빈 회향나무 막대기 하나를 품속에 숨겨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제우스의 전용 무기인 벼락에서 불씨를 옮겨붙여, 들고 갔던 막대기 속에 숨겨가지고 돌아왔다. 프로메테우스는 이튿날, 인간을 불러모아 불씨를 건네주고, 나무와 나무를 비벼서 불을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이 선물 덕분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었고, 사냥용 무기와 농사짓는 연모를 만들 수 있었으며 아무리 추워도 거처를 덥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나아가서는 갖가지 기술을 개발하고 화폐까지 만들어 쓰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위에 집을 짓는 법, 날씨를 미리 아는 법, 셈하고 글쓰는 법, 짐승을 길들이는 법, 배를 만들어 바다를 향해하는 기술까지 가르쳐 주었다.
사랑의 형벌
이 사실을 안 제우스는 노발대발했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씨를 훔친 곳은 제우스의 벼락이 아니라 제우스의 조강지처 헤라의 신전 부엌이었다는 설도 있고 또 태양신 헬리오스가 모는 태양 마차였다는 설도 있으나 어디였건 간에 도둑질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신들의 전유물인 불을 훔친 죄도 죄려니와, 우쭐대기 좋아해서 그렇잖아도 하마나 신들에게 대들지 않을까 앞날이 걱정스러운 인간에게 그걸 주었으니 뒷감당은 누가 한단 말인가, 게다가 한번쯤 프로메테우스를 손봐야겠다. 마음먹은 구원도 있었던 참이었다. 인간들이 소를 한 마리 잡아 제우스에게 바칠 때의 일이었다. 맛있는 고기와 기름은 죄다 제우스에게 바치고 먹을 수도 없는 뼈와 가죽만 인간의 몫으로 남기는 걸 보고 프로메테우스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고기는 보잘 것 없는 가죽으로 싸고 뼈는 먹음직스런 기름덩어리로 감싼 뒤 제우스에게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제우스는 물론 가죽보다 기름을 택했고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을 속여넘긴 걸 알고는 심히 언짢았다. 인간을 만들라 명했던 뜻은 신을 공손히 받들 존재가 필요해서였건만 그 뜻을 묵살하고 오히려 사사건건 인간편을 드니 여간 위험스럽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감히 불까지 갖다주다니! 제우스는 당장 자신의 아들이면서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청동쇠사슬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는 크라토스(권력)와 비아(폭력)를 시켜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에다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어버렸다. 그것으로도 분이 안 풀린 제우스는 독수리로 하여금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먹게 했다. 독수리가 간을 다 파먹으면 그때마다 간은 새로이 돋아났다. 프로메테우스의 죄,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인간을 창조하고,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을 이롭게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숭앙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가르친 진실로 위대한 교훈은 따로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프로메테우스는 언제라도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신상에 관련된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 제우스는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죽이고 올림포스의 왕좌에 올랐는데 일찍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이아는 크로노스의 어머니였으니 제우스에겐 할머니다)로부터 너 또한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리라 는 예언을 들었다. 제우스로선 자신에게 반기를 들 그 자식이 어떤 어미의 몸에서 태어날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름난 호색한인 제우스에게는 처첩이 수도 없이 많았던 것이다. 문제아를 낳을 어미가 누구인지만 알 수 있다면 미리 조처를 취할 수 있으련만,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자가 바로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프로메테우스였다. 제우스는 감언이설 잘 늘어놓기로 유명한 전령신 헤르메스를 보내 프로메테우스를 회유했다. 그 비밀만 귀띔해 주면 당장 풀어줄 뿐만 아니라 두둑한 상까지 얹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일신의 안락을 위해 대의를 저버리는 그런 행위를 경멸했다.
어리석은 이여, 말 한 마디면 당장 이 고통에서 벗어날 텐데 어찌 이리 고집을 피우나? 헤르메스의 말에 프로메테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헤르메스여, 이 정도 고생이면 말 한 마디를 아끼는데 그대는 어찌 그리도 비굴한가?
마침내 헤라클레스가 와 사슬을 끊어주기까지, 무려 3천년 동안을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 산정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였다고 한다. 참혹한 고통 앞에서도 무릎끓지 않았던 이 불굴의 정신이야말로 인간이 그에게서 받은 가장 위대한 선물이었다.
인간을 믿어도 될 것인가
김남주 시인이 <나 자신을 노래한다>는 시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 정신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한 시대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10년을 감옥 안과 밖으로 갈라져 지내다 어렵게 결혼한 지 5년만에, 남편을 영영 떠나보내야 했던 그의 아내는 그의 시가 이제 쓸모없는 세상이 돼 버려서 그는 떠났다 고 썼으며 한 문학평론가는 세상이 돌이킬 수 없이 천해지고 시의 길에 그늘이 짙어지자 그는 굴욕 대신 차라리 육신을 벗고 말았다고 했다. 시인 자신도 췌장암 선고를 받기 직전에 발표한 시 <근황>에서 이제 나는 아무짝에도 쓰잘 데 없는 사람 이라고 자책했다. 김남주 시인의 시대, 그와 함께 사라져 버린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저 고난의 7,80년대, 고난과 함께 의로운 투쟁이 있었던 시대, 가혹한 탄압이 있어 그만큼 뜨거웠던 시대-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저 간절한 신념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에 뒤이은 새로운 시대는 시인의 표현대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 한 시대요 맑지도 탁하지도 않은 흐리멍텅 한 시대였다. 첨예했던 민주.반민주의 대립이 흐트러지면서 사람들은 적당히 자조하고 그럭저럭 체념했다. 가혹한 억압이 없는 대신 순결한 이상을 향한 투쟁도 사라졌다. 김남주를 비롯해 그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온 근본주의자들-인간의 손으로 이룩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 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에게는 이 모든 상황-근본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마치 모든 것이 달라진 듯 흘러가는-이 당황스럽고 쓸쓸하고 낙망스러웠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근본적인 질문-역사의 진보를 향한 모든 의식적 노력의 근저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깔려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을 던졌다. 인간을 믿어도 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가고, 어떤 사람들은 침묵하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사실 이 물음은 수천년 인간의 역사에서 수없이 되풀이던 질문이다. 철학과 사상의 역사는, 역사의 구비마다 특히 시련과 혼돈과 정체의 시기마다 사람들이 이 근본적 질문 앞에서 회의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전쟁과 대량살륙,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 부자유와 불평등-인간의 손으로 저질러진 참담한 죄악 앞에서 사람들은 늘 반문했다. 인간은 과연 제 손으로 사랑이니 평화니 우애니 평등이니 정의니 하는 걸 실현할 수 있는 존재인가. 꼭 격변의 시기가 아니더라도, 꼭 시대를 선도한 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과 역사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으리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다 간 김남주 시인이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이제 그는 여기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다. 하지만 그의 유고 시집<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을 읽어 보니 어쩌면 나는 그 대답을 알 것도 같다.
시도 사람의 일/신이 아닌 신이 아닌 것도 아닌/일하고 노래하고 싸우고 그러나 끝내 죽고 마는/보통 사람의 일인 것이다/한술의 밥 때문에 할퀴고 물어뜯고 살해까지 하는 한 가닥 빛을 위해 세계를 거는/단순하고 당돌한 사람들의 일인 것이다/집을, 보습 대일 한 뙈기 땅을, 빛을 갖고 싶어하는/제새끼도 남의 새끼마냥 키우고 싶어하는/소박한 일인 것이다 -<시를 대하고>중에서
그의 말대로, 사랑도, 평화도, 우애도, 평등도, 정의도-그 모든 아름답고 진실되고 선한 것들도 모두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일이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애타게 바라지만 그것에 도달하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 속에 사랑과 더불어 증오가 평화와 더불어 쟁투가, 우애와 더불어 질투가, 평등과 더불어 이기가, 정의와 더불어 불의가 들어앉아 있는 까닭이다. 김남주와는 다른 창법으로 노래했지만 곧고 맑기로는 그와 마찬가지였던 윤동주도 인간의 그 숙명을 이렇게 처연히 적어두었다.
간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강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안락의 유혹에 시달림당한 사람이 어디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시인뿐이랴. 불의에 앞장서 항거했던 의인들뿐이랴. 우리들 보통 사람도 매일매일 그 유혹에 시달린다. 커닝을 해서라도 시험을 잘 보고 싶은 유혹, 남을 속여서라도 돈을 벌고 싶은 유혹, 말만 앞세워 명예를 얻고 싶은 유혹, 하다못해 남을 헐뜯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은 유혹까지, 내딛는 걸음 걸음마다 불의의 참정이 도사리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우리들도 날마다 싸움의 와중에서 살아간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사이에서,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 사이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싸움이야말로 인간을 인갑답게 하는 거룩한 전장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믿는다함은 인간이 전적으로 아름답고 진실되고 선한 존재라는 걸 믿는 게 아니라 아름답고 진실되고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 추하고 거짓되고 악한 자신과 싸울 줄 아는 존재라는 걸 믿는 것인지 모른다. 인간을 믿어도 될 것인가. 코카서스 산정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들, 지상의 프로메테우스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모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삶으로 대답할 일이지요. 빛을 바라는 자, 거기다 세계를 걸고 스스로 빛이 되지요.
힘겨운 삶의 한복판, 거기 불멸의 빛이 있다고, 그러니 부디 쉬이 낙망하지 말라고 격려철머 위안처럼, 그는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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