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중세사회 - 블로크 (Marc Bloch, 1886~1944)
역사의 표층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전통적인 역사학을 비판하고, 인간활동의 총체적 모습과 역사의 심층적 이해를 강조한 블로크는 이를 위해 모든 학문간의 장벽을 극복하고 종합적인 시각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학의 창조를 제창했다. 블로크의 종합적인 역사관의 결정이자 20세기 역사학의 최대성과로 평가되는 이 책은 과거의 한 시기에 지나지 않는 중세사회가 어떠한 특성을 가졌기에 그 전후의 다른 시기들과구분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된 대학교수
역사연구에서 다른 학문분야를 폭넓게 적용하는 접근 방법으로 20세기 역사서술에 혁명을 가져온 프랑스의 역사가 블로크. 그는 리옹대학의 로마사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울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지적 엘리트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을 주로 공부했다. 1908년에 졸업한 그는 역사학 교수 자격을 획득하고 독일로 건너가 독일 역사학을 공부했다. 제1차 대전중에는 보병으로 복무하면서 뛰어난 공을 세워 훈장을 받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20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중세사 교수로 재직했다.이 대학에서 평생의 학문적 동반자인 뤼시앵 페브르를 만나 1929년에 (사회경제사연보)를 발간하는 등 아날 학파 를 형성한다.전통적인 역사학이 역사의 표층에만 시선을 집중하자, 이를 비판하고 인간활동의 총체적 모습과 역사적 세계의 심층적 인식의 주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모든 학문간의 상호교류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학의 창조를 제창했다. 이들의 1세대를 이어 브로델 등의 제2세대를 거쳐 라뒤리 르고프 등의 아날 3세대가 훌륭하게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937년에 그는 소르본 대학의 경제사 교수로 취임했고, 1939년에는 그의 주저인 (중세사회)를 출간함으로서 그의 명성은 확고 해졌다. 그러나 곧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미 여섯 아이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대학교수인 그는 다시 연구실을 박차고 나가 전쟁에 종군했다. 이듬해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자, 이제 레지스탕스 지도자로 독일군과 맞서 싸우다가 어느 들판에서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전쟁중에 참고문헌도 없는 상황에서 역사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틈틈이 정리하여 쓴 (역사를 위한 변명)을 유고로 남겼다.
레지스탕스 동지였던 한 친구의 회고에 의하면 블로크는 혹심한 고문을 당하고 1944년 58세의 나이로 다른 26명의 대원들과 함께 처형당했는데, 당시 16세 가량의 소년이 그의 곁에서 떨고 있었다 한다. "저... 총 맞으면 아프겠지요?" 라고 묻는 소년에게 블로크는 다정한 손길로 그의 팔을 잡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단다, 얘야. 조금도 아프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한 후 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프랑스의 양심은 죽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종군과 레지스탕스 운동에의 참여를 통해 그토록 간곡하게 주장했던 대로 역사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입증해보였다. 그의 사망 후 얼마 안되어 나치 독일은 패전하고 프랑스는 다시 자유를 찾았다. 그리고 이 양차대전의 경험은 블로크가 생전 원하던 대로 전후 유럽 각국의 역사학계의 학풍을 재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봉건사회의 성격에 대한 논란
일반적으로 암흑의 시대 라 불리는 중세사회에 대한 사회적 성격을 둘러싸고 프랑스 혁명 이후 학자들간에 치열한 논쟁이 있어왔다. 계몽사상가들인 몽테스키외는 중세유럽의 봉건사회를 세계역사상 단 한번 있었으며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특유한 사건 으로 보았다. 그러나 역시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봉건제가 단순한 사건이 일정의 통치형태로 유서 깊은 세계적인 현상이었다고 파악했다. 그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크게 보면 2,3가지로 줄기를 잡을 수 있다
세 가지 견해
첫째는 봉건제를 하나의 지방분권적인 통치조직으로 파악하는 정치적 유형론이 있는데, 이들은 봉건제란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체제가 몰락할 때 이에 대한 응전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통치조직 이라고 보았다. 두번째는 봉건제 본질을 주군과 가신의 쌍무계약관계로 파악하는 법제사적 해석을 들 수 있고, 세번째는 마르크스 사학 인데, 이들은 봉건제를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봉건사회의 모습
이처럼 이들의 관점에 따라 중세 봉건사회의 모습이 다소 다르긴 하나 대체로 그 모습을 그려볼수는 있다. 중세란 용어는 대체로 서로마제국이 멸망(476년)한 이후 16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약 천 년간을 가리킨다. 대체로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규정하나, 중세의 문화부재 시대는 대체로 6~19세기로 국한되며, 13세기를 전후해서는 독특하고 우수한 중세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지중해 세계를 통합했던 서로마의 멸망 후 정치적으로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 따른 공백기가 왔으며, 문화적으로는 서양문명권이 크게 3분되었다. 즉, 동쪽에는 동로마 제국의 문화인 비잔틴 문명권, 서쪽에는 게르만 국가들에 의한 독특한 유럽 문명권, 중동지역에는 이슬람문명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나름대로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유럽 중세문화의 형성에 기여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유럽문명권이 그 주도권을 행사하며 발전했다. 10세기를 전후하여 전 유럽에는 정치, 군사, 경제, 사회면에 걸쳐 독특한 체제가 성립되었는데 이것이 봉건체제 다. 이 봉건체제는 유럽인들의 사고방식, 가치관, 사회제도 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봉건제도란 왕, 제후, 기사 등 지배층 상호간에 토지를 매개로 하여 주종관계를 맺고, 이들은 대소장원의 영주로서 농민을 지배했던 유럽 특유의 사회를 말한다. 기사는 자기보다 유력한 기사를 주군으로 섬겨 충성을 맹세하고 군역과 의무를 부담한 반면, 주군은 의탁해온 기사를 가신으로 삼아 보호하고 봉토(토지)를 주어 부양했다. 주군이나 가신은 모두 기사로서 같은 신분에 속했으며, 그들 사이에 맺어진 주종관계 또한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체결된 쌍무적 계약관계였다. 따라서 주군과 가신 중 어느 한 쪽이 그 위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그 관계는 해소될 수 있었다. 주군과 종신과의 인적관계가 강한 이 사회에서는 국가의 주권이 지방의 제후들에세 분산되어 행사되었다. 비록 왕은 있었지만 백성에게는 통치권이 직접 미치지 못하고, 그가 거느린 몇몇 대귀족에게 국한되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영주의 토지는 하나 또는 몇 개의 장원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대체로 1촌락 1장원을 이루 었다. 농민들은 장원에서 대체로 자급자족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 한마디로 중세봉건사회는 영주와 성, 농민과 오두막, 성직자와 교회라는 봉건사회의 3요소 위에 정치적으로는 지방분권, 군사적으로는 주종관계, 경제적으로는 장원제도로 움직인 시대로 규정지을 수 있다.
종합적인 시각에서 기술된 봉건사회
블로크는 (중세사회)에서 기존의 여러 견해들을 포괄적으로 수용하여 중세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편의 대하소설로 그려냈다. 그는 봉건제가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하나의 입장을 배격하고 전체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 봉건사회의 종합사를 구축하려는 저자의 구상에서 태어난 이 책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는 인적 종속관계의 형성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봉건사회의 형성 및 작동 원리로서의 사람들 사이의 종속 및 유대관계를 논하고 있으며, 계급과 통치라는 부제가 붙은 제2권에서는 봉건사회의 정치체제의 형성과 그 변천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이책에서 봉건제의 기본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농민층의 종속, 봉급제 대신 봉토제도 채택, 기사계급의 우월한 위치, 인간과 인간을 서로 결속시켜주던 복종과 보호의 유대관계, 권력의 세분화,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와중에서도 친족집단과 국가가 계속 살아남았으며 국가는 봉건시대 제2기에 새로운 활력을 되찾았다."
위의 내용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내용과 거의 다르지 않으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 발견된다. 그가 유럽 봉건제의 특징으로 제일 먼저 들고 있는 것이 이 사회의 직접적인 생산자층의 존재형태인데, 이것은 그가 한 사회의 기본성격을 파악할 때 우선적으로 주목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준다. 한편 그는 봉건사회를 1, 2기로 나누었을 뿐 봉건제의 위기 라는 말로 대표되는 봉건제 말기상황은 따로 설정하지 않은 것 또한 특징적이다. 그는 13세기까지를 봉건시대로 잡아놓고 있는데, 불과 4~5세기만을 중세시대로 보고 있는 블로크의 파악은 중세 천 년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란이 일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블로크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계약의 상호성을 극히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봉건적 충성이야말로 봉건제 후기에 국가가 재건되고 왕권이 강화됨에 있어서 강력한 이념적 도구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이 봉건적 계약의 상호성은 군주에게도 신민의 복지도모라는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군주에 대한 신민의 저항권 까지도 인정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블로크가 이 책에서 사용한 사료의 종류는 서사시, 벽화, 기도문 등 당대의 문학작품이나 역사적 소산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그로 인해 그의 문학작품 분석방식은 그후의 중세문학 연구 자체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저서는 블로크 특유의 문화적 서술방식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그 도도한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는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유럽 역사의 어느 한구석에서 불쑥 꺼내온 사건 하나하나가 궁극적으로는 저자의 일관된 논리에 용해되면서 그 시대인물들의 삶의 갖가지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세시대를 구성하는 주종관계, 장원제도, 분권제도 등 개별적인 연구성과들을 토대로 중세봉건인들의 삶의 총체성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종합적인 안목을 가진 역사가로서의 블로크의 저작은 돋보인다.
블로크의 역사인식
블로크의 학문형성 과정에는 중요한 세 가지 만남이 있었다. 첫째는 언어학과의 만남으로 이를 통한 그는 연구의 정밀성을 기함과 동시에 비교방법론을 터득할 수 있었고, 둘째는 독일 역사학과의 만남으로 이로 인한 문헌비판 방법의 습득, 그리고 세 번째는 뒤르켐의 사회학과 비달 드 라 블라쉬(Vidal de la Blache)의 지리학의 결합된 형태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독일 문헌사학의 극복
랑케로 대표되는 19세기 독일 역사학은 독자적인 개체에 대한 내면으로부터의 이해를 대상으로 하고, 그 이해의 방법은 기록문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블로크는 독일에 유학가면서 이러한 독일사학을 접할 수 있었는데, 독일사학의 이러한 경향은 결국 한편으로는 문서숭배 사상을 잉태했다. 19세기 유럽의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각국의 공문서들이 공개된 데 힘입어 독일 문헌비판 사학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블로크도 그의(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기록된 사료 없이 역사서술이 불가능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사학의 영향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초공사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는 문헌사료가 제시할 수 있는 한계가 얼마나 좁은 것인가, 그리고 문헌에만 의존하는 연구방법이 얼마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가를 깨닫고 역사가의 상상력 을 제한 하는 문헌숭배 사상을 극복하고자 했다.
학문간의 장벽 극복
한편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학은 무엇을 위한 학문인가 라는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고 학문과 학문 사이에 존재하는 기존의 두터운 장벽을 거부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탐구인 역사란 다양한 인간적인 삶의 전체에 대한 탐구이자 복합적인 사회전체에 대한, 그리고 상당히 장기간에 걸치는 시대 전체에 대한 탐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서 그는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지리학, 경제학, 인류학, 사회학, 고고학 등 모든 학문적 성과를 포용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뒤르켐과 앙리 베르의 영향이 컸다. 특히 앙리 베르는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는 연구자들을 규합하여 1900년 에 <사적 종합론>을 창간한 바 있는데, 블로크는 1912년에 이 잡지의 공동편집자가 되었다. 그후 독립한 블로크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페브르와 <사회경제사 연보>를 창간하여 그 취지를 계승했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아날 학파 라 부른다. 열린 태도로 인간화학들을 통합하는 역사학을 추구하는 아날 학파는 오늘날 유럽역사학계에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에 의한 과거의 미래
그의 첫 번째 저서 (일 드 프랑스)를 발표한 이래 그의 주된 관심은 중세의 사회경제사, 특히 그중에서도 농업사로 기울어져갔다. 그는 토지 자체에 다가가 접촉한다 라는 신념으로 농민들의 기쁨과 고뇌가 담겨 있는 농업사를 서술코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농부이면서 동시에 역사가 가 되고자 했으며, 문서나 책상물림을 통해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생명의 움직임을 포착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생생한 농촌사를 쓰기 위해 프랑스 농촌을 구석구석을 방문하여 촌로들과 대화를 통해 구전을 수집하고 들판을 거닐면서 농촌의 향기를 음미해보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현재에 의한 과거의 이해, 곧 거꾸로 역사를 읽어가는 것을 중요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특히 변화가 완만한 농업사일수록 현재 남아 있는 경지구조나 촌락의 흔적을 통해서 과거의 농촌구조와 농민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교사학 추구
그는 각 사회단위들에서 나타나는 역사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했는데, 비교 의 방법이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비교 언어학과의 만남을 통해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비교의 방식을 둘로 나눈다. 첫째 방식은 그리스, 로마문명과 현대의 원시사회를 비교하는 것처럼, 시간적, 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동일한 기원을 설정할 수 없는 사회들을 비교하여 유사점을 밝히는 원거리 비교방법 이다. 두번째는 공통된 기원을 가진 즉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동시대 사회들의 상호작용을 연구한 방법이다. 이와 같은 비교의 방법을 쓰는 이유는 현상들의 일반적인 참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거의 같은 방향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도(중세 유럽의 봉건제) 그 속도와 양상이 다를 때(프랑스 봉건제와 독일의 봉건제) 이 같은 각각의 차이를 확인하고 이를 초래한 원인 또한 규명함으로써 각 단위 사회의 특성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비교사의 방법에 입각해서 전체도 조망할 수 있고, 개별적인 특징도 선명히 부각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위와 같은 역사관을 가진 블로크는 유럽 중세의 출현은 내적 발전의 필연성에 따른 역사적 단계가 아니라, 당시의 특수한 상황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한 산물이라고 파악했다. 이 책은 과거의 한 시기에 지나지 않는 봉건사회가 어떻한 특성을 가졌기에 그 전후의 다른 시기들과 구분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적인 성격을 가지는데 블로크의 종합적인 역사관의 결정인 이 책이 20세기 역사학의 최대성과로 평가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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