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저자 : 베버(Max Weber, 1864~1920)
청교도 정신이 자본주의에 미친 영향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이 저작은 사회학의 대가인 베버가 예리한 분석력과 과학적인 자료를 통해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과 근로정신, 부에 대한 기독교적 관념, 그리고 어떻게 프로테스탄트 사회가 서유럽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하게 되었는가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가 확실한 기초 위에 서게 되면 그 형성의 뿌리였던 금욕적 신앙과 윤리의식은 소멸되어 청교도주의가 결국은 재산분배의 불평등과 노동자에 대한 수탈을 합리화시킬 수 있음도 언급하고 있다.
다방면에 박식했던 사상가
해박한 지식과 투철한 분석력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는 권위적인 정치가인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그는 1882년 집을 떠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했으나, 군복무 문제로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는 군복무하는 동안 이모와 그녀의 남편 헤르만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는데, 역사가인 헤르만은 베버의 지적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제대 후에는 베를린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철학, 역사학, 경제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재판소에서 근무하면서 연구활동을 계속했다. 의무감에 입각한 노동은 결혼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칼뱅주의의 전통에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베버는 스스로에 대한 노동의 강제를 통해서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나태와 방종에 빠지는 것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방종과 게으름에 빠지면 결국 정신적인 위를 맞게 마련이다. 1892년 베를린 대학을 시작으로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했다. 1892년 베를린 대학에서는 로마법과 상법을 강의했고, 그후 1895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취임 강연으로 '국민국가와 경제정책' 을 논했다. 초기의 관심은 독일 국민국가를 러시아의 차리즘, 영국, 프랑스의 제국주의로부터 지키고 부르주아적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 입장에서 그는 반봉건적이고 보수적인 융커(귀족적 영주)와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이 좌우 양세력에 대항하여 시민층을 중핵으로 하는 중도세력의 결집에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와 경제정책 에서는 국민의 이해에 봉사해야 하는 경제정책의 과제를 논하고, 경제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시민층의 정치적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베를린 대학의 교수논문 자격인 로마농업사와 프라이부르크 대학 취임강연인 국민국가와 경제정책 등은 당시의 중요한 논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1897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재임중에 심한 신경질환에 걸려 연구와 교육을 단념하고 얼마 동안 유럽 각지에서 투병생활을 했다. 지적 활동에 몰두하다 지치면 해외여행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는 일을 반복했다. 1902년경부터 차츰 건강을 회복하여 연구활동을 다시 시작했으나, 교직을 사퇴하고 자유로운 재야의 연구자로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그후 발표된 저작을 보면 오랜 고통을 통해 그가 칼뱅주의 윤리와 의무적 노동의 관계, 그리고 여러 가지 종교윤리와 사회경제 과정에 뛰어난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저서는 모두 그의 병이 가장 악화되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17년 동안 쓴 것이다. 1904년 이후 (사회과학적 및 사회정책적 인식의 객관성)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논문을 발표했고, 1909년에는 독일 사회학회 창립에 관여하여 이해부터 (사회경제학 강요)의 편집을 맡아보았느며, 그 제3권 (경제와 사회)라는 대작을 저술했다. 이것은 베버학문체계의 총괄이라고 볼 수 있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도 높아서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독일민주당의 결성에 침여했고, 헌법작성위원회에도 참가한 후 1919년 베르사유 강화회의에 전문위원으로 나가서 전쟁책임 추궁의 논거를 비판했다. 한편 1918년에는 빈 대학, 1919년에는 뮌헨 대학교수로 있다가 1920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근대 자본주의를 합리화의 과정으로 이해
베버는 칼뱅의 직업소명설을 바탕으로 근대 서구 자본주의 정신을 예리하게 분석함으로써, 세속적인 직업에 충실하는 것은 신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며 금욕적인 생활태도와 영리활동의 자유인정은 자본의 축적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칼뱅이즘
칼뱅은 교회와 성직자의 권위를 부정하고 신앙과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인에 대한 구원은 신에 의해 미리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신의 은총을 확인하는 길은 경제생활에 있어서의 부와 재산이므로, 신의 은총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근면, 검소, 투철한 기업정신, 성실성 등을 통해 많은 부와 재화를 얻어야 했다. 특히 세속의 직업은 신이 부여한 신성한 소명이기 때문에 자기 직업에 충실한 것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근면과 절약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역설하여 끊임없는 자기 억제와 금욕적인 생활태도를 강조했다. 근면과 절약에 의한 이윤과 재산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킨 결과로, 신이 그에게 내린 은총이자 대가이므로 바로 그 사람의 것 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유재산제와 영리활동의 자유를 윤리적으로 옹호한 킬뱅이즘은 자본주의 성립에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는데, 이를 명쾌하게 규명한 사람이 베버이며, 그 책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베버의 학문적 관점
베버의 사회학적 연구의 주요대상은 근대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였으며, 이 점에서는 마르크스와 학문적 맥을 같이 하나, 마르크스가 주로 자본주의의 경제적 법칙성과 그것의 위기구조 및 필연적 붕괴 가능성을 분석했다면,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배경과 기원문제에 연구의 중점을 두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베버의 이론적 변화를 3가지 차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주제상으로는 처음에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의 발생과 특징에 두었던 그의 관심이 점차 근대 서구문명 일반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역사적 분석의 경우 초기의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적 문명의 발생문제를 일단 서구적 역사발전의 틀에서 고찰했으나, 점차 유럽 문명에 대한 포괄적인 구조와 발전양식을 찾아 세계사적인 비교분석의 차원으로 연구시각을 확대해나갔다. 셋째, 이 두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자본주의 및 근대문명의 사회학적 핵심문제를 점차 합리주의 및 합리화과정이라는 더 포괄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로 심화시켜나간다. 이렇게 볼때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이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문제가 베버 사회학의 출발점이었다면, 그것의 이론적 귀착점이자 중심주제는 합리주의 및 합리화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합리성과 합리화 과정의 다양한 역사적 형태들 중 그가 연구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서양의 합리주의 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근대 서구의 합리주의이다. 그래서 그는 학문적 작업의 목표를 근대 서양의 합리주의의 특이한 성격을 인식하고 그것의 역사적인 생성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 경제윤리에 미치는 영향 규명
이 책은 발표되자마자 즉각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열렬한 찬사와 혹독한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이 책의 성격이 학문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관계로, 비단 사회학자뿐만 아니라 경제학자, 신학자, 역사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논쟁에 참여했다. 본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정신
오늘의 역사에서 가장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왜 서구에서 발생하게 되었는가? 자본주의 경제란 교환기회를 이용하여 예상되는 이윤을 추구하는데 있다. 즉, 평화적인 영리추구의 기회를 바탕으로 하고있다. 자본주의의 특징인 엄밀한 자본에 대한 계산은 자유노동에의한 합리적 노동조직하에서만 가능하므로, 서구적 합리주의의 고유한 특질과 그 기원을 해명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근대적 대기업에서 자본가나 경영 및 고급노동에 참여하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다른 교파의 신자들보다 많다. 그것은 그 부모들이 자산이 많았거나, 특유의 종교적 태도로 자녀교육에 더 열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에게는 경제적 합리주의의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그 원인은 그 신앙의 내면적인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 금욕과 종교적 경건성 등의 특징과 자본주의적 영리 추구의 깊은 연관관계를 가진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정신은 어떤 면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전부터 존재한 셈인데, 이 경우 관념적이라는 상부구조는 물질적 토대를 반영할 뿐이라는 말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인 직업에의 헌신과 천직이라는 관념을 낳게한 그 특유의 합리적 사고와 생활은 어떤 정신의 소산이었는가? 독일어로 직업이라는 단어 속에는 이미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라는 종교적 관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서 번역자 루터의 정신에서 유래한 것이다. 루터는 세속적인 직업노동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외적 표현이라고 생걱했다. 그러나 루터는 모든 직업은 신의 특별한 명령이기에 부여된 직업과 신분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상을 키워나감으로써 전통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비해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칼뱅주의, 경건주의, 침례교파)의 직업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즉 그는 자본주의 정신의 종교적 뿌리로 여러 가지를 검토한 후 루터가 소명 또는 직업의 개념을 도입하여 근대 직업관의 윤리적 기초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은 인정하나, 자본주의 정신의 중요한 뿌리는 결국 칼뱅이즘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
칼뱅이즘의 특유의 교리인 예정설에 의하면 인간 중의 일부가 구원받고 나머지가 버림받는 것은 인간의 공적이나 과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고립의 사상은 개인주의의 근저를 이루었다. 택함을 받은 기독신자의 존재목적은 신의 율법을 실천하여 지상에서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데 있다 . 무엇으로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칼뱅주의는 누구나 자신을 선택된 존재로 생각토록 하고, 이 같은 자기 확신을 획득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부단한 직업노동을 요구했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것이다. 칼뱅주의의 금욕정신은 인간에게 즉흥적인 감정이 아닌 영속적인 동기를 부여했다.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은 부자의 향락과 태만 등을 도덕적으로 죄악시했다. 시간낭비는 가장 큰 죄악이었으며, 건강에 필요한 시간 이상의 수면조차 비도덕적인 것으로 배척되었다. 시간은 너무나 비싼 것이다. 상실된 시간만큼 신의 영광을 위한 노동을 못하기때문이다. 노동은 금욕의 수단으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신이 명한 생활 일반의 자기 목적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즉, 재산이 있는 자도 일해야만 했다. 청교도 교리가 촉진한 직업분화는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일반적 복지를 높여주었다. 직업의 가치는 개인의 수익성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지않고 합법적으로 다른 방법보다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신이 계시할 때 이를 거절하는 것은 너에 대한 소명을 어기는 것이다. 유태교는 모험가적 자본주의에 속하며 그 성격이 천민 자본주의적이지만, 청교도주의의 성격은 합리적이며 시민적인 경영과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였다.
금욕주의에서는 부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악으로 배격하면서도 직업노동의 결과로서 부의 획득을 신의 은혜 라고 보았다. 소비를 억제함으로써 금욕적 강제저축에 의한 자본축적을 촉진했다. 이것은 현세적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간의 상관관계인데, 현세적 금욕주의가 자신의 행동에 의한 결과물을 즉각적으로 향유하지 않고,억제하는 성향은 기업가가 증가된 이윤을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직접적인 소비를 피하고 자본증식을 위해 지속적으로 재투자하는 행동과 연관된다. 현세적 금욕주의 윤리는 욕구의 체계적인 조율을 통해 소비를 억제하고 이윤추구를 도모한다. 이러한 금욕적인 저축강박관념이 자본축적에 유리한 태도임은 자명하다. 이러한 청교도 운동이 자본주의 경제발전에 미친 영향은, 첫째 영리를 사명으로 하는 시민적인 직업윤리를 탄생시켰고, 둘째 재산분배의 불평등을 신의 섭리로 정당화켰으며, 셋째 빈민과 노동자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것을 신의 소명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시켰다. 요컨데 청교도주의는 영리를 소명으로 생각하는 근대 기업가와 노동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근대 노동자를 창출함으로써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을 촉진한 것이다.
마르크스 이론의 보완
자본주의적 행위 및 양식의 역사적 형성과정에서 신교가 행한 역할을 분석한 논문인 본서는 초기 베버의 작품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과 성격에 대해 분석한 그의 첫 논문이었다. 엄청난 양의 다양한 역사적, 신학적 자료들을 정리, 분석한 이 논문은 신경쇠약으로 인한 절망의 심연에서 학문적 창조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구해내려는 베버의 초인적인 결실이다. 이것은 지적 의지와 열정이 육체적 병을 극복하게 한 흔치 않은 경우 중의 하나다. 이 저서에서 드러난 명제를 두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는 초기 자본주의적 기업가 집단의 형성에는 물질적 이해관계 외에 특정한 이념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는데, 우리는 이것을 자본주의 정신으로 개념화할 수 있고, 둘째로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는 칼뱅이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서구 자본주의 성립기에 있어서 역사발전의 추진세력으로서 진보적 역할을 수행한 소생산자층의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자본주의 정신의 이상형을 추출해내고 그것을 그들의 종교와 결부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성립기에 있어서 독립 소생산자의 진보적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의 견해에 접근하고 있으나, 그러한 계층을 탄생시킨 근원을 마르크스는 그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물질적 배경에서 찾는 데 반해서, 베버는 그것을 종교에 결부시켰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또한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퇴폐화 경향은 베버도 인정한다. 베버는 청교도주의가 자본주의 생활양식에 끼친 영향을 논하는 가운데 그것이 노동자의 수탈을 합리화하고 재산분배의 불평등을 합리화한다는 점을 시인했다. 또 종교에서 비롯된 근면과 절약이 부를 낳지만, 부의 증가는 금욕적 신앙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한편 베버의 업적은 사회과학의 분야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이념형 조작에 의한 사회과학 방법론의 확립, 관료제 연구, 권위의 유형(카리스마적 권위, 전통적 권위, 합법적 권위), 가치중립적인 사회학 방법론의 제시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베버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론은 서로 대립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보완적이다. 이런 상호 보완적인 입장에서 이 두 정신적 거인은 근대 서구 문명의 가치와 운명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이 문제제기의 한 관점은 원래 수단 이었고, 수단이어야 할 노동과 이윤추구가 목적으로 전환된 주객전도의 체제하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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