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언이 열에 아홉이고, 중언은 열에 일곱이며, 치언은 날로 새롭게 천예*를 조화시킨다. 열에 아홉인 우언은 다른 데에 가탁해서 논술하는 것이다. 친아버지가 그 자식을 위해서 중매 서지 않는 것은, 그 아버지가 칭찬하는 것보다 아버지 아닌 자가 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니라 사람들이 죄다. 가지 뜻과 같으면 응하지만 자기와 같지 않으면 반대하며, 자기와 같으면 옳다 하고 자기와 다르면 그르다고 한다.
열에 일곱을 차지하는 중언은 논란을 중지시키려는 옛사람의 말이 그것이다. 나이가 앞섰다고 할 수 없다. 앞선 사람으로서 사람을 이끌지 못하면 사람의 도를 다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의 도를 갖추지 못하면 이것을 가리켜 진인*이라고 한다. 날로 새로운 치언은 자연의 천예와 조화되고, 그 사리를 만연히 하여 천수를 다하게 하기 위함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고르나 말을 고르게 하려 하면 고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무언을 말한다. 말을 했으나 말이 없는 것이다. 평생 말해도 말하지 않은 것이 되고, 평생 말을 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의 글에는 다른 일에 가탁해서 표현하는 우언이 전체의 9할이고, 옛사람의 말을 빌려 표현하는 중언이 전체의 7할이며, 대상에 따라 자유 자재로 변호하는 치언은 전체에 걸쳐 통용되어 있다. 우언이란 다른 것을 빌려 말하는 문장이다. 가령 아버지가 아들을 중매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세상 사람들이 우언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의 의견이 자기의 뜻과 같으면 찬성하지만 다르면 반대한다. 또 자기와 같은 의견은 옳다 하고, 다른 의견에는 비난을 퍼부어댄다. 그러기에 직접적인 발언을 삼가고 우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중언은 번거로운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옛사람의 말이라는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옛사람들이라 해도 사리를 분별 못하고 일의 본말을 알지 못했다면 앞섰다고 할 수도 없다. 더구나 사람을 이끄는 힘이 없는 사람이면 사람으로서의 도마저도 체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옛사람들을 가리켜 낡았다고 한다.
치언이란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것을 써서 상대적인 논쟁을 절대적인 입장에서 화해시키며, 무심하고 자유롭게 천수를 다하게 하기 위한 말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사물의 대립은 생기지 않으며, 만물은 그 제동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제동성이라고 묶어서 말할 때, 그 용어는 개념과는 다른 것이 된다. 도라는 말 역시 용어와 개념은 이원적인 대립을 갖게 되므로 궁극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말고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무언이란 바로 이런 궁극의 도에서 나온 말이기에 일생을 두고 말을 해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또 반대로 죽을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진실을 끊임없이 이야기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