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4장 동양사상
전습록 - 왕수인(1472-1528)
중국 명대의 주지주의적 주자학 풍조와 명분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지행합일의 양명학을 개창한 왕수인의 사상이 담긴 책. 그의 지행합일설은 당시의 관리등용제도를 포함한 모든 주지주의적 전통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조선의 실학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만사에 스러질 수 없는 도덕적이고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생애와 작품활동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로 호는 양명, 절강성의 여요현에서 진대의 명필가 왕희지를 먼 조상으로, 장원급제한 부친 아래서 태어났다. 8개월짜리 조산아로 5세까지 말문이 트이지 않았고, 약골이어서 청년기에 이미 폐병으로 각혈을 하곤 했다. 그러나 11세에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4세때부터는 말타기, 활쏘기 등을 배우고 병법을 읽혔는데, 이는 뒷날 그가 내외우한에 시달린 명나라 조정을 위한 무인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한 바탕이 되었다. 17세에 결혼하던 날 놀러나가, 도교의 사원인 도관에서 우연히 도사를 만나 양생의 길은 정의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는 말을 듣고 이튿날 신부집에서 찾으러 올 때까지 밤세워 양생술을 읽혔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때 도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며, 그의 사상에 도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혼 이듬해, 한 주자학자를 만나 격물치지설과 성인은 배워서 이룰 수 있다 는 말을 듣고 성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 유학자와의 만남은 그의 사상발전에 적지않은 영향을 준다. 그뒤 그는 주자의 격물치지의 참뜻을 체득하기 위해 뜰 앞의 대나무(물)를 연구(격)해보기로 하고, 일주일 동안 대나무를 들여다보았으나 병만 얻고 말았다. 그때 그는 격물은 성인이 되는 공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주자의 학설을 멀리했다. 21세와 25세 때 두 번 회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자 대문호가될 결심을 하고, 절에 들어가 시모임을 갖고 매일 글짓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변경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 무예를 단련하며 병가의 비전을 섭렵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28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열심히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로인해 정치에 실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사를 짓고 도술을 익히나, 곧 부질없음을 깨닫고 불교에 귀의한다. 그러나 곧 이것도 버리고 유교로 돌아온다. 이러한 그의 젊은 시절의 방황, 즉 과가에 실패한 임협기마문사도교불교 등에 빠졌던 것을 왕양명의 5익 이라고 한다.
34세경에는 무종이 즉위하여 환관인 유근이 전권을 행사했다. 이에 양명은 이를 탄핵하고 투옥된 대선 등을 구하려다, 곤장 40대를 맞고 용장으로 좌천당했다. 용장에서의 외적 시련은 내적 깨달음으로 인도한 계기가 되었다. 용장에서 그는 초막이나 암굴에서 생활하면서 원주민을 잘 다스려 사부로 존경을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얻기 위해 밤낮으로 몰두하던 중 홀연히 격물치지의 뜻을 깨닫고 얼마나 기뻐했던지, 잠자던 주위 사람들이 놀라 일어났다 한다. 이 부터 심즉리라는 근본입장을 확립하고 외물에서 이를 추구하는 주자학적 격물론에서 탈피하여 마음속의 부정을 없애고 양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새로운 격물치지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38세 때 유근이 주살되자, 그는 순조롭게 영전을 거듭하였고, 농민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시기에 지행합일설 을 제창하였다. 주자에 맞서는 육구연(육상선)의 공적을 드러내고 <대학고본>을 간행하여 주자학자들의 비난을 샀다. <전습록>을 간행하는 한편, <주자만년정론>을 편집하여 주자의 만년의 학설이 자기와 다르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48세 때 왕족인 신호의 반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나 모함을 받아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49세 때 이러한 위기 속에서 치양지설을 제창하여 주자학을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학설을 전개하였다. 50세 때 세종이 즉위하자 그는 높은 직책에 임명되었으나 간신배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부임치 않았다. 그는 관직에서 떠난 후 모든 것을 잊고 학문연구와 교육에 전력하였다. 이에 제자들이 각지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양명학파 를 이루었다. 57세 때에는 야만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의 강력한 권유로 이를 토벌하고 돌아오다 과로로 쓰러졌다. 유언을 물으니, "이 마음이 광명하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며 눈을 감았다.
양명학의 성립과 발전
양명학의 성립
당시의 사상적 풍조는 '먼저 제대로 알고 나서 행하라'라는 주자학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과거제도의 제약 아래서 공부하는 사랍들이 자신의 앎을 행하려면 관직에 오른 후에나 가능하고, 또 그러다 보면 평생 공부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사상계에 지행합일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 명의 중기에 나타난 양명학 이다. 송대에 발달한 주자학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으로 성즉리를 표방하면서 사상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에 반대하여 이기일원론을 바탕으로 심즉리를 내세워, 심 이 인간의 주체요,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사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주자학으로부터 지행합일설과 치양지설을 도출한 양명학은 명대의 침체된 사상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왕양명은 젊은 시절 한때 주자학의 신봉자로 성인의 경지는 배워서 도달할 수 있다는 이상주의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한 방법으로 주자가 말하는 격물치지설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게 되면서 육구연의 심학에 기울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심즉리설을 깨우치게 된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진리를 깨닫는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주자학이 오랜 기간의 연구와 수양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격물치지)이라면, 양명학은 정신의 집중에 의하여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주자학은 태극이론을 근본으로 독서에 의해 성인의 길을 탐구하지만, 양명학은 태극이론으로부터 인간의 윤리학은 나오지 않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주체를 이루는 것은 마음이며, 이는 절대선이므로 이를 본래의 모습인 절대선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왕양명의 심즉리 학설이다. 이를 위해서는 심의 작용으로 가장 중요한 양지를 충분히 활동시켜야된다고 하였다. 또 지도 단순히 아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하는 지여야 하며, 여기에서 지행합일설이 나오게 된다. 특히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없애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며, 욕망을 버리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양지적인 인간평등을 주장하고 적극적인 행동주의를 제창하였다.
양명학의 발전
양명학파는 왕양명의 사후 좌우파로 갈라졌다. 좌파에서는 왕간(왕심제, 후에태주학파의 대표자)과 같은 서민사상가가 출현하여 인욕도 천리라고 주장하고, 형식화한 주자학적 도덕의 허위성을 격렬히 공격하였다. 양명학 좌파는 이지(이탁오)에 의하여 후천적인 지식이나 도덕 이전의 자자를 동심이라 하여 강조하게 된다. 이는 양지만 있으면 주색에 빠져도 성인군자가 되는 데 지장이 없다고 극언하여 주자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아, 후에 자살하였다. 이지의 주장은 권위주의적인 사대부 의식에서 본다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므로 이는 심학의 횡포라고 지탄받았다. 이에 대하여 나홍선 등의 양명학 우파는 좌파의 지나친 행동주의를 반성하여, 왕양명의 양지설을 주로 하되 수양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주자학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와 같이 양명학은 방대한 경전을 통해 박학을 존중하는 전통적인 유학과는 달리, 많은 지식보다는 간단명료함과 정직함을 중시하는 성인이 되는 길은 박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바로 내세우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 양명학은 유교적 권위에 대하여 서슴없는 비판을 가하고 평등주의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이단과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의 제자이자 그 계승자는 위험한 사상으로 탄압받기에 이르고, 이지(이탁오)의 비극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양명학은 민간의 사학인 지방의 서원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전습록>의 내용과 그 사상
전습록은 왕양명의 제자들이 그의 어록을 모은 것으로, 전습은 <논어>의 <학이>편의 증자의 말인 전습불평에서 나온 것이다. 그 구성은 상중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권에서는 심즉리설, 지행합일설 등이 제시되었다. 중하권에는 만년에 확립된 치양지설, 만물일체론 등을 제시하였는데, 전통적인 유학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심즉리
그는 육구연의 마음이 곧 이다 라는 심학을 받아들여 마음이 곧 이다. 천하에 마음 밖에 일이나 마음 밖의 이가 있겠느냐? 마음 밖에 물이 없고 마음 밖에 일이 없다 고 하였다. 그는 이를 우주의 근본원리로 보고 이는 곧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모든 현상이란 마음의 인식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울지만 마음이 없다면 아름다운 빛깔도, 고운 목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천지만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천지만물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며, 만일 서로 통하는 바가 없다면 천지만물이란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주자가 강조한 추상적인 이를 배격한다. 주자는 효의 이가 있기 때문에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며, 충의 이가 있기때문에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효도하는 마음이나 충성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이도 없다고 하였다. 주자의 사상체계에 의하면 마음의 존재여부에 관계없이 이는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나 양명의 체계에 의하면 마음이 없으면 이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잉법자요 우주의 근원이라는 절대적 유심론의 성격을 띤다.
지행합일
지행합일의 근거는 심즉리에 있다. 마음 안으로 돌이켜 탐구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만물과 한몸이 되는 경지(물아일체)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지행합일과 지행병진의 이론의 요지는 지식과 실천을 분리시키는 송의 정이의 학설을 반대하는 데 있었다. 양명은 모든 이가 마음에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지식 역시 마음에 본래부터 양지로서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충과 효를 행하는 것은 충효의 이가 마음속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행위가 양지의 표출이라는 뜻과 같은 것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와 행은 합일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만일 지와 행이 합일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사욕의 가리움 때문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앎은 행동의 시작이요, 행동은 앎의 완성이다 행동을 밝히고 살피는 것이 곧 앎을 진실하고 독실하게 하는 것이 곧 행동이다 라고 하였다.
치양지
치양지란 양명학에서 말하는 마음의 본체인 양지가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발휘됨을 말하는 것으로, 심즉리와 지행합일을 하나로 묶어 적극화시킨 것이다. 사물의 도리는 책이나 외적인 사물 안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적인 자기 마음속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치양지의 방법으로는 격물치지, 성의정심 등을 들고 있다. 주자는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에서 격물을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것, 치지를 지식을 추구하여 얻는 것이라고 본다. 즉, 주자는 격물치지를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힌다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양명은 격물은 행위를 바로잡는다는 뜻이고 치지란 본래 마음의 본체인 양지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고, 격물치지를 마음을 바로잡고 양지를 닦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양명은 양지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을 물욕과 사욕으로 돌린다. 우리의 뜻하는 바가 항상 양지의 방향을 좇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물욕 또는 사욕에 가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악문제와 공부문제가 제기된다. 마음을 올바르게 한다 함은 인욕을 물리치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마음의 공부를 심학 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성의나 정심수신도 모두가 격물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즉, 성의는 격물과 치지가 가장 성실하게 수행되는 것이요, 성실하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정심). 그러므로 정심이란 성의에 지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신은 마음을 바로잡아 참된 앎에 이르는 것이라 하고, 수신하게 되면 제가치국평천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8조목은 결국 참된 앎에 이르는 것 , 즉 치양지에 그 근본이 있다고 하였다.
양명학의 영향
왕양명은 명나라의 지배사상이던 주자학에 대항하여 인간평등관에 바탕을 둔 주체성 존중의 철학을 확립하고, 만물일체와 이상사회 실현을 지향하는 심즉리, 치양지지, 행합일이라는 사상을 전파했다. 그는 양지에 있어서는 우부라 할지라도 성인과 다름없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거리를 메운 모든 사람들이 다 성인이다'고 하면서 평등사상을 외쳤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전습록>에서 일과적으로 흐르고 있는 사상으로, 결국은 지와 행을 둘로 갈라 주지주의적 경향으로 타락해 버린 주자학의 공허함을 비판한 것이다.
일본 메이지 유신
이 같은 주장을 담은 <전습록>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습록>에 대해 중국이 명대는 물론 총대 학술에도 비판은 있었지만,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양명학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1972년 왕양명 탄생 500주년 기념으로 <양명학 대계>를 내놓기도 했다.
조선 강화학파
우리 나라에 <전습록>이 들어온 것은 왕양명의 생존시이나, 당시 조선의 분위기는 정주학이 압도하는 상황이어서 이황 이래 양명학은 이단으로 배척되어왔다. 양명학의 수용자는 대체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 특히 남인과 소론 계통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양명학을 성리학과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이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양자 사이의 조화를 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양명학을 대표하는 정제두는 주자와 단절하고 강화도에서 양명학에 몰두하였다. 정제두의 대표적인 저서인 <존언>은 그의 양명학 세계를 나타내주는 것인데, 그도 주자의 해석이 아닌 경전의 본 뜻을 존중하는 복고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주자의 성리학 일변도인 조선사회에서 이단기되기를 꺼려한 관계로, 겉으로는 주자를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왕양명을 따르는 양주음왕의 경향이 있었다. 정제두의 강화학파는 200년 동안 이어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양명학은 실학파 중 북학파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이들이 저서에 '천지만물이 한몸이다.' 그리고 시민평등관에 입각한 교육이념 등 도처에 양명학 사상과 공통되는 점이 많았다. 양명학의 주체사상은 한국독립운동과 직결되었다. 이종휘 등 강화학파의 사관이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송진우 등 독립운동가에게 미친 영향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