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3장 동양문학
35. 고향 - 이기영(1896~1984)
식민지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로까지 평가받는 <고향>은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와 같은 농촌계몽소설이긴 하나, 전자들이 보수적중도적 성향인 데 비해 <고향>은 사회주의적인 농민운동의 교범으로 간주된다. 이 소설은 일제치하에서 다중의 억압을 받고 있는 한국농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과 투쟁상을 그려보이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과 민중의 연대, 농민 분해과정, 공동체의 논리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뜰 수 있게 된다.
생애와 작품활동
대표적인 카프 소설가. 호는 민촌.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여 천안 영진학교를 졸업 후 7년 동안 각지를 유랑하다가 논산 영화여자고등학교 교사, 호서은행 서기 등을 지냈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정칙영어학교를 다니다가 이듬해 광동대지진으로 귀국했는데, 이때 일본에서 러시아 문학을 접했고 막심고리키에 심취했다. 24년 <개벽>에 단편소설 <오빠의 비밀편지>가 3등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다. 이듬해 조명희의 주선으로 <조선지광> 기자로 취직하고,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에 가입하여 31년에 카프 1차검거 때 구속되었다가 다음해 석방되었다. 34년 2차 검거 때는 1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45년 해방 후 월북하여 장편소설 <땅> <두만강> 등을 발표하며 북한의 대표적인 작가로 활동했다.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소친선협회부의장, 문학예술총동맹위원장 등을 지냈다. 1984년 사망했다.
등단작 <오빠의 비밀편지>에서부터 봉건적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몇몇 신경향파적 경향의 작품들을 거쳐 중편 <서화>, 장편 <고향>을 씀으로써 프로 소설의 절정을 만들어냈다. 대표작에 단편 <농부 정도룡> <민촌> <민며느리> <홍수> 등과, 장편 <고향> <인간수업> <신개지> <대지의 아들> <봄> <두만강> 등이 있다.
작품 세계
신경향파적 작품을 많이 씀으로써 문학활동을 시작한 이기영은 일제하 사회주의 문학이 어떻게 변모해왔는가를 작품으로 보여준 작가다. 일제하 사회주의 문학은 신경향파 문학(카프창설 이후) - 목적의식기(카프 제1차 방향전환) - 볼셰비키화 단계(제2차 방향전환) -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 및 새로운 창설방법의 모색기라는 단계를 거쳤는데, 이기영의 작품세계에서는 이 모든 단계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기영은 동시에 독특한 현실감각을 지니고 잇는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초기작품으로 <신경향파>적이라 할 <가난한 사람들>과 <실진>의 경우 가난에 눌린 주인공이 개인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치닫는다는 신경향파 소설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비판력을 보여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그 파괴의 행동은 실제에서의 것이 아니라 환상에서의 것이며, <실진>에서의 굶주린 주인공이 살인을 하고 곡식을 빼앗지만 후에 그가 죽인 사람은 그와 다를 바 없는 극빈자였음을 알고 <이것은 어느 개인의 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수하고 있다. 과격한 관념이나 파괴적인 행동이 작가에 의해 제약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영의 이러한 면모가 새롭게 나타나는 작품이 <서화>, 그리고 <고향>이다. 사회주의 운동이 침체하면서 카프 진영에도 혼란이 일어난 시기에 이기영은 다시금 독특한 현실감각으로 높은 수준의 리얼리즘을 성취할 수 있었다.
주요 등장인물 김희준: 주인공. 도쿄 유학 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운동에 힘쓰는 젊은 지식인. 안승학: 대지주 민 판서의 마름. 권모술수에 능하고 탐욕이 가득한 인물. 안갑숙: 안승학의 딸.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노동자로 변신함. 권경호: 갑숙의 약혼자. 출생의 비밀로 인해 개인적 고뇌를 겪음. 인동, 김선달, 박성녀, 원칠이: 마을의 소작농민들.
작품의 주요내용
가난한 원터마을은 그날그날 입에 풀칠해 먹고 살아간다.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만 져서 제 논을 부치던 사람은 소작농으로 떨어지고 소작농은 빚더미에 눌려 마을을 떠날 지경에 이르게 된다. 민 판서의 마름이 안승학으로 바뀐 후부터는 행악이 더욱 심해졌다. 희준이 도쿄 유학을 고학으로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이무렵이다. 마을사람들은 희준이 금의 환향할 것으로 기대했건만 정작 동구를 들어서는 그의 초라한 행색에 크게 실망하고 돌아선다. 그러나 희준은 마을사람들의 이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농민들을 일깨우고 힘을 합해 잘살아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돌아온 터였다. 그는 우선 읍내의 청년회에 가입하여 그 조직을 기반으로 일을 시작해볼 생각이었으나, 청년회의 유명무실한 활동과 회원들의 소시민적 무기력한 모습이 고작이다. 희준은 그나마 야학에 힘을 쏟으며 마을사람들과 친숙해지는 계기로 삼는다. 그리고 그 자신도 안승학에게 부탁해 민 판서의 논 몇 마지기를 소작하기로 한다. 농삿일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책상물림이라 농민들로부터 놀림도 당하고 꾸중도 들어가면서 일을 배워나간다. 희준이 고향에 돌아온 후 가장 심각하게 고민한 것은 탐욕과 무지였다. 그는 마을사람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초보적 조직화를 꾀하기 위해 마을 청년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두레를 내기로 결정한다. 희준이 농민들 사이에 신망을 얻고 농민들이 집단적 힘에 고무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안승학이다. 그는 두레를 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학삼이를 시켜 방해공작을 펴지만 실패하고 만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자수성가한 승학은 자신에게 이익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덤벼드는 모리배요 착취자다. 게다가 재산이 좀 모이자 계집을 번갈아 바꾸어 어미가 제각각인 네 남매를 둔다. 두레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마을 분위기는 일신해, 서로 앙숙이던 사람들은 화해하고 일치된 마음이 고양된다. 그리고 희준 자신의 인텔리 근성도 극복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농번기가 끝나고 추수할 무렵에 원터 일대는 뜻하지 않은 수재를 만나게 된다. 그해 농사를 모두 망치게 된 농민들은 마름인 안승학에게 가서 한 해만 소작료를 탕감해달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들은 대표를 뽑아 직접 서울 민 판서댁에도 찾아가보지만 아무 소득 없이 마름과 상의해서 결정하라는 통보를 받을 뿐이었다.
희준의 제안으로 농민들은 추수 때가 되어도 벼베기를 하지 않고 버티지만 나중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하나둘씩 이탈하려는 농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곤경에 처한 희준과 농민들을 돕고 나선 것은 읍내 제사공장에 여직공으로 숨어 있는 갑숙이었다. 승학의 딸인 그는 읍내 부호의 아들인 권경호와의 애정문제로 번민하던 때가 있었지만 곧 개인적인 고민을 극복하고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 진취적 여성이다. 갑숙은 어릴 때부터 희준을 남몰래 사모해오던 터였지만, 희준이 그의 할머니의 강요에 의해 열네 살에 조혼해버리자 그 꿈이 깨어지고 말았다. 희준 역시 아무 애정 없이 집안의 강요로 했던 결혼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터라 틈만 나면 당사자들의 뜻에 의한 자유결혼을 주장했다. 두 사람은 과거의 애정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동지적 애정으로 다시 뭉치게 된다. 농민들은 갑숙을 비롯한 인순방개 등 여직공들의 지원금으로 며칠을 더 버티지만 한계에 이르게 된다. 그때 갑숙은 자신의 연애사건으로 아버지를 협박하면 굴복하게 되리라는 교육책을 내놓는다. 경호와 갑숙은 부모들의 동의 없이 자신들끼리 은밀히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가뜩이나 이들의 사이를 못마땅해오던 안승학은 경호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 밝혀지자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터뜨리며 갈라놓기 위해 애쓴다. 부호의 아들로 자라난 경호는 사실 부호 권상철의 친아들이 아니고 머슴 곽 첨지의 아들인 것이 밝혀져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체면을 중시하던 승학은 그런 인물과 자신의 귀한 딸이 서로 연인관계라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비밀로 간직하고 있던 터였다. 예상대로 승학은 농민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하게 되고 소작쟁의는 농민들의 승리로 끝난다.
작품해설
<고향>은 그의 대표작이자 식민지시대 한국 농촌소설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이광수의 우익적인 <흙>이나 심훈의 중도적인 <상록수>와 다른 좌익적인 농촌소설이다. <고향>은 식민지 봉건사회의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계급적 투쟁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그 당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터마을의 농사의 주기적 변천, 혹은 계절적 추이에 따라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리얼리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원터마을은 단순한 촌락공동체가 아니라 농민적 공동체로서의 단위역할을 수행하는 전형적인 마을로 설정되고 있다. 그것은 <두레>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있다. 현실적 실천은 노동쟁의로 집약되고, 농민적 현실에의 투시는 소작쟁의로 집약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구현은 안갑숙이란 여주인공을 등장시켜 보여주고 있다. 안갑숙을 전형적인 인물로 하는 <고향>의 이념형상성은 추상성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카프 문학사를 살피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고향>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김희준이라는 인물의 형상화다. <지식인 계급전형의 창조>라고 높이 평가되어온 이 인물은 그 이전까지 이기영의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과는 다르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친 지식인이지만 <고향>이 무대로 하고 있는 원터 소작농의 아들로서 고향에 돌아와 농민운동을 조직해나간다. <민촌>이나 <종이 뜨는 사람들> 등 민중을 각성시키려는 지식인이 등장하는 이기영의 이전의 소설에서는 이들이 다른 계급에서 자라난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마을로 찾아든 외부인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고향>의 김희준은 자기 계급의 지식인이다. 그는 원터마을의 한 주민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이다. 그는 원터마을의 한 주민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이다. 카프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지식인을 에워싸고 있는 관념성을 그는 벗어던지고 있다. 그는 완전한 인물이 아니므로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지 갈등하기도 하고 조혼한 아내에 대한 미움을 폭발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농민운동을 꾸려가는 중에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 희준에게는 가능하다. 그를 <지식인계급의 전형>이라 함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지식인 희준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고향>은 민중의 생동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괄괄하지만 총명하고 직심이 있는 인동, 어질고 순박하면서도 강단있는 인순, 분방하고 솔직한 성격의 방개 등은 이 소설을 읽는 이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민중의 상이다.
인물형상화에서 또하나의 문제는 마름 안승학 일가다. 안승학은 이전의 카프 소설에서 적대자가 조명되는 것보다 훨씬 세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개화문물에 친숙하다는 것과 술수에 능한성격으로 마름의 자리에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안승학의 출세담, 그의 일상생활 묘사가 이 작품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딸 갑숙은 아버지의 봉건적인 전제에 저항감을 느끼는 인물로 가출하여 원터 근처의 제사공장 여직공이 된다. 갑숙은 마을사람들의 싸움이 곤경에 부딪혔을 때, 또 생활이 어려워 단결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안승학이 고자세를 거두지 않아 투쟁이 막혀 있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갑숙의 금전적인 도움이라든지 갑숙과 경호의 관계로 안승을 위협하는 등의 우연적 요소가 없었더라면 원터농민들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정도다. 작가는 김희준을 내세워 현실적인 지식인상을 창조함과 동시에 투쟁의 대상이나 결과에서도 눈에 보이는 현실성을 부여잡으려하고 있다. 지주인 민 판서가 아니라 마름인 안승학을 대상으로 싸움이 벌어지고 싸움은 눈앞에 보이는 승리로 이끌어진다. 사회주의 운동이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에 작가는 관념이 아닌 눈앞의 현실에서 사회대중의 투쟁의 승리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기영 개인의 측면에서나 식민지 시대 소설사에서 <고향>은 한 정점을 이루는 작품이다. 구체적인 농민생활의 세부적 묘사, 가난하지만 진취성을 잃지 않는 농민상의 제시, 노동자와 농민은 결국 같은 조건에 처한 계급임을 밝히는 노동동맹의 사상, 민중적 전통문화에 대한 재인식 등이 이 소설이 지닌 미덕인 동시에, 리얼리즘 미학의 측면에서도 앞 시기 프로 문학이 드러낸 한계를 극복하고 몇가지 중요한 진전을 이룩한 작품이다. 사건전개와 결말부분의 개인적 해결방식이 결함으로 지적되기도 하나, 대체로 이 소설은 농민문제를 형상화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소설로 평가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