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음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겠는가.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항상 죽음을 두려워 하게하는데도, 기이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잡아 얻어서 그를 죽일 것이다. 누가 감히? 항상 죽임을 맏은 자가 있으니 그가 죽여야 한다. 무릇 죽음을 맏은 자 대신 죽인다면, 그것을 일컬어 장인 대신에 깍는다고 할 것이다. 무릇 장인 대신에 깍는 자중에,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가 드물다.
해석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런 사람을 죽음으로 위협할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그를 두렵게 하지 못한다.
개인에 따라서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도 있다. 자신의 명예가 회손되거나 대가 끊기는 것을 자신의 죽음보다 중요하게 여긴 경우도 있다. 어떻게 생각을 하면 죽음은 최후의 도피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죽음을 도외시 한다면 그를 통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선은 백성들에게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한다. 그럼 왜 죽음을 두려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기이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사회를 이루고 조직을 이루어 살아갈려면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만든것이 규범이다. 그러나 이 규범을 지키지 않는다면 제제를 가해야 한다. 이 제제중에서 가장 큰 것이 사형이다. 그러나 이 사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규범도 설수가 없다. 그러나 규범을 어겼다고 해서 누가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 노자는 죽음을 관장하는자에게 일을 맏긴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법관이 아니다. 자연이다. 거침없이 구애없이 흐르는 강물이다. 대해다. 그걸 대신하겠다고 나선다면 나서는 자도 다친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노자에 왠 성경할지 모르나 예수와 노자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바리새인의 마을을 지날 때였다. 그때 사람들은 재판을 통해서 창녀를 돌로 쳐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예수가 나서서 그들을 막았다. "죄 없는자 돌로치라" 그러자 사람들은 차마 그를 치지 못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이 나섯다. 그러자 예수는 그들의 죄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이 도망을갔다. "이 여인의 죄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심판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인이여 그대의 죄는 사함을 받았다." 창녀가 죄인인가. 그 여인을 창녀로 몰고간 사람들이 죄인인가.
죄인을 욕하는가. 죄인을 감정적으로 증오할 수는 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죄가 있다면 당연히 사회적인 격리가 필요하다. 죄인에 대한 처벌을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맏긴다면 사회는 성립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규범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자연의 법 신의 법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증을 하는가. 선과 악은 시대에 따라서 달랐다. 그리고 하나의 행위도 시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되었다. 과연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이 평가할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시대의 사회적 규범을 지키기위한 법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관점을 가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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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이는 것으로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들이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하며, 또한 나쁜 일을 저지르는 자가 있어 그를 잡아 처형할 수 있다 하더라도, 누가 그 일을 집행하겠는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일을 맡은 하늘이 하는 일이다. 죽이는 일을 맡은 하늘을 대신하여 죽이는 것은 마치 목수를 대신하여 나무를 깎는 사람으로서, 손에 상처를 입지 않는 사람은 드문 것이다.
주
기: 올바르지 못한 일, 사악한 일, 정도에 벗어난 행위. 사살자: 죽이는 일을 맡은자, 하늘의 섭리를 말함. 대사살자: 하늘의 섭리에 맡기지 않고 인위적으로 형벌을 집행하는 것. 대장: 솜씨 좋은 목수, 노련한 목수. 착: 깎다, 찍다, 쪼개다.
해
이 장에서는 형벌로써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려 죽는 것도 무섭지 않다는 자포자기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위정자가 죽이는 것으로 백성을 위협할 수는 없다. 위정자가 형벌 위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뿐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늘의 이법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고 처단하는 것을 마치 노련한 목수를 대신하여 서툰 자가 나무를 깎는 것과 같다. 결국은 자신의 손만 다치게 되는 것이다. 위정자가 무위자연의 도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면, 백성들은 저절로 복종하게 마련이다. 가혹한 형벌과 빈틈없는 관료 조직으로도 민심을 잃은 정권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는 예를 우리는 무수히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