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하는 것은 매일 더해 가는 것이고, 도를 하는 것은 매일 덜어가는 것이다. 덜도 또 덜어내면 함이 없는데 이르게 된다. 함이 없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다. 천하를 얻으려고 한다면 항상 일이 없게 하라. 그것이 일이 있음에 이르게 되면, 천하를 얻는데 부족하게 된다.
해석
지식은 쌓아가는 것이다. 한권의 책을 읽고 또 한권의 책을 읽고, 그는 무수히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다. 그것이 학문을 하는 것이다. 도는 덜어내는 것이다. 가식을 덜어내는 것이다. 내게 주입된 고정된 가치관념을 덜어내는 것이다. 나를 규정지으고 있는 것을 덜어내는 것이다. 그릇을 부수는 것이다. 나는 학생이다. 나는 왕이다. 나는 운전수이다. 라는 틀을 부수는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나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규정한 것이 아니다. 남이 나에게 씌운 멍에이다. 그리고 다른사람의 가치판단에 따라서 나도 움직인다. 나도 행동을 한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쫒아가게된다. 이것에서 자신의 주체성은 사라진다. 나를 규정하고 있는 모든것을 던저 버려라. 그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학문을 하는 것은 그릇에 물을 붓는 것이다. 바다위에 그릇이 떠있다. 바다는 존재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릇은 나이다. 이때 학문은 바닷물을 떠서 그릇을 채우는 것이다. 조금 더 조금더, 그러나 한계가 있다. 한계는 그 그릇의 크기다. 그러나 도를 하는 것은 그릇을 부수는 것이다. 해체하는 것이다. 그때 그는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 자신이 물이된다.
無爲란 함이 없음이다. 그런데 노자는 덜어 내라고 한다. 덜어 내는 것은 爲가 아닌가. 그렇다. 덜어내는 것은 함이다. 목적 의식이 있고 그것에 매진하는 것이다. 함이 없기 위해서 함하는 것이다. 무위 하기 위해서는 해야 한다. 강렬한 추구 그 끝에서야 도달 할 수 있는 것이 무위이다. 함이 없다고. 그것 참 쉽네, 집에 콕 밖혀 있으면 되잖아. 그렇다. 그대는 집에 앉아서 방구들을 바라보며 배를 깔고 누위서 멀뚱멀뚱 있을 수 있다. 그리고는 말한다. 나는 지금 무위하고 있다고. 그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어떻게 사람 단 한 순간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단 한 순간이라도 그대의 육체가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있는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순간이 바로 죽는 순간이다. 살아 있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흡사 태풍처럼 말이다. 태풍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우리는 태풍을 느낀다. 그리고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단 한순간 태풍이 멈추었다. 그럼 그곳에 태풍이 남아 있는가. 아니다.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멈추는 순간 죽는다. 실에 돌을 매달아 돌려 보아라. 그럼 원이 생긴다. 그것을 아주 빨리 돌려 보아라. 그럼 주위에 막이 생긴다. 다른 것들이 막에 근접하게 되면 돌에 맞아 튕겨져 나간다. 그렇게 되면 그 주위에는 아무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다. 분명히 허공에는 단 하나의 돌이 떠있다. 그러나 원을 형성하고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다. 그런데 그 중심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돌고 있는 돌만 보인다. 왜 돌을 한 순간이라도 노치면 다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돌이 사람의 팔을 돌린다. 돌을 돌리는 사람이 돌을 멈추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돌을 집어 던질까. 아니다. 그럼 주위의 사람이 다친다. 어쩌면 내가 다칠지도 모른다. 돌에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을 확 잡아 당길 수도 없다. 천천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래서 돌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때 까지 가야 한다. 다치지 않을 정도까지 속도를 줄여야 한다. 이렇게 속도를 줄이는 것이 무위하고자 하는 위이다. 완전히 멈춘상태가 무위이다. 위는 돌이 계속 돌고 있는 상태이다. 돌이 멈추는 순간 돌을 멈추고자 하는 위는 사라진다. 이세상의 위중에서 단 하나 가치 있는 행동은 돌을 멈추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돌이 멈추었으면 그 멈춘 돌이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돌은 놓고 자유롭게 떠나면 되는 것이다. 무위는 돌이 멈추고 돌을 멈추게 하려는 위가 사라질때 오는 것이다. 무위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래 그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로 가려진 세상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천하를 얻으려고 하면 일이 없게 하라. 무슨 말인가. 어떤 일이 부상하기 전에 해결하라는 것이다. 즉 사건이 커지기 전에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 사건이 전조조차 보이기전에 해결을 해놓으면 천하에 일이 생길일이 없다. 예를 하나 들겠다. 콜레라가 기승하는 여름이 되기 전에 보사부에서는 예방접종을 맞으라고 홍보를 하고, 문교부와 협조를 해서 각급학교의 학생들에게 거의 의무적으로 예방접종을 맞게한다. 콜레라가 돌기전에 예방을 함으로써 콜레라 균의 한국에 상륙을 하더라로 피해를 최소화 하겠다는 것이다. 예방접종을 하지 않고 방치해둔 상태에서 콜레라 균이 상륙을 하면 일이 커지게 된다. 일이 커지기 전에 예방을 하기 때문에 콜레라 균이 상륙을 하더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천하에 일이 없게 하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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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하면 나날이 할 일이 늘어가고, 도를 체득하면 나날이 할 일이 줄어든다. 줄고 또 줄어서 하는 일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하는 일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행하지 않아도 모든 일은 저절로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하를 차지하는 것도 언제나 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한다. 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면 이미 천하를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주
위학일익 : 학문을 하면 나날이 할 일이 늘어간다는 뜻임. 세속적인 학문은 파고들면 들수록 의문은 늘어가고 지적 욕구도 강해진다. 의문은 또다른 의문을 낳게 하며 여기에 경쟁 의식, 모르는 것에 대한 고민 등으로 우리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다. 노자는 세속인 들의 박학과 지적 호기심에 대하여 시종일관 고답적 자세와 냉소주의적 태도로 임하고 있다. 위도일손: 도를 닦으면 나날이 할 일이 줄어든다는 뜻임. 세속적인 학문을 버리고 무지 무욕의 경제에서 오로지 도 하나만을 체득하면 번뇌와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날로 덜어낸다는 것은 도를 체득한다는 말이다. 무사: 무위를 뜻함. 유사: 의도적으로 행위 하는 일이 있는 것.
해
배움이란 지식을 쌓는 일이므로 의문도 늘어나고 경쟁 의식 등으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이에 반하여 도를 닦는 일은 마음을 수양하는 일이므로 지식욕, 소유욕, 경쟁심 등의 겉치레를 하나씩 하나씩 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오로지 도 하나만을 체득하여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달관된 경지에 이른 사람을 우리는 자유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행하지 않아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없는 것이다. 천하를 차지하여 다스리는 일도 작위로서는 성공할 수 없다. 무위자연의 다스림이야말로 천하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첩경인 것이다. 인간을 구속하고 갈등케하는 여러 가지 욕망에서 벗어나 무지, 무욕의 경지에 도달하면 지식이 주는 간교함과 문명사회가 제공하는 관념적 허위 의식에서 벗어나 태고의 순박함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시니컬한 이 교설은 예악과 배움을 중시하는 유가의 주장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그의 무위, 청정의 사상은 후세 중국인들이 인도의 불교를 수용하고 해석하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게 된다. 노자의 도덕 경을 최초로 외국어 범어로 번역한 분이 불경 번역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당의 현장 법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