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사랑, 우리의 사랑 / 도종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 또한 그 사람 안에 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고 그 완전한 사랑도 우리 안에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나며 하느님을 알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므로, 사랑 속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도 그 안에 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이처럼 쉽습니다. 진리는 어린아이도 알 수 있게 말합니다.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말들은 어렵고 난해하고 현학적이며 문장구조가 복잡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매우 알기 쉬워서 누구나 이해하지만, 그리스도교도인 양 행동하고 그렇게 자칭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톨스토이는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 속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 중에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기보다 미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같지 않고, 계층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자기와 같은 이들만 사랑합니다. 자기와 같은 교회를 다니거나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만이 형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그들이 권력을 가져야 하며, 그들끼리만 서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생각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미워하고 배척하며 그들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그가 진정한 기독교인지 아닌지를 요한복음의 이 물음 하나로 판단합니다. 형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가 기독교인입니다. 형제가 비록 가난하고 비천하고 피부색깔이 다르고 사는 곳이나 생각하는 게 나와 다르다 해도 그를 여전히 내 형제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가 기독교인입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이는 하느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만약 너희가 서로 사랑한다면 너희가 내 제자임을 모든 사람이 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사랑해야 하는 날들은 있다 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 부둥켜안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끓어오르던 체온을 식히며 고요히 눈감기 시작하는 저녁하늘로 쓸쓸히 날아가는 트럼펫 소리 사라진 것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풀이란 풀 다 시들고 잎이란 잎 다 진 뒤에도 떠나야 할 길이 있고 이정표 잃은 뒤에도 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 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사랑해야 하는 날들"이 있습니다. 열정이 식은 뒤에도 우리는 일을 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직 열정과 설렘과 뜨거움으로만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삶으로 사랑하기도 하고 정으로 사랑하며 살기도 합니다. 생에 있어서 감동의 기억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개인과 사회를 밀고 가는 가장 큰 원동력의 하나가 감동입니다. 그러나 벅찬 감동으로 서로를 끌어안던 날이 있지만 감동이 영원히 우리를 밀고 가는 건 아닙니다. 감동이 추억의 자리로 물러난 뒤에도 부둥켜안고 가야 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늘 뜨거운 감동과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일만을 경험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뜨겁던 날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나날의 삶이 있는 겁니다. 잎이 다 지고 세상이 황량하게 바뀌고 있는 걸 보면서도 떠나야 하는 길이 있고 이정표를 잃고 방황하면서도 멈추지 말고 찾아가야 할 땅이 있는 겁니다. 도종환/시인
가을 햇살이 사람의 마음을 맑고 넉넉하게 합니다. 낮에 미술전시회장에 갈 일이 있어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아파트 입구에 옮겨 심어 놓은 구절초 몇 송이가 보입니다. '연보랏빛 야생 구절초를 거기 옮겨다 심어 놓은 사람은 누굴까. 작고 소박한 것을 아름답게 여길 줄 아는 그의 마음이 참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구절초 위에 가볍게 내려앉는 가을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을 봅니다. 무욕의 그 바람과 무심히 흔들리는 꽃의 자태를 바라보며 이 가을 우리가 더 버려야 할 것을 생각합니다. 걸림이 많고 잡다한 생각이 많아서 불편하게 살고 있는 내 자신이 꽃 한 송이 앞에서 못내 부끄러워집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옭아매고 거기 갇혀 늘 힘들게 살면서도 그걸 벗어나지 못합니다. 들국화 한 송이는 산비탈에 피어서도 자신을 자신 이상으로 허세 부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들국화이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헛된 것을 바라거나 욕심을 부려 자신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까치는 나뭇가지 사이에 지은 제 집에서 편안합니다. 잔가지를 물어다 지은 집에서 더 큰 집을 꿈꾸며 자신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헛된 왕국을 세울 생각에 노심초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다른 까치와 싸워 이길까를 궁리하지 않습니다. 남의 손가락질, 남의 비난 때문에 제 둥지에서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는 실타래처럼 얽혀 풀어지지 않는 것들이 많고 내 머릿속에는 복잡한 궁리가 많습니다.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계산이 많고 내가 쳐 놓은 울타리와 장벽이 많습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박아 놓은 금기의 표지판이 즐비하고 가지 말아야 한다고 세워놓은 붉은 신호등이 많습니다. 그 길만을 따라 걷고 계산된 몸짓과 표정을 지어가며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는 날들이 많습니다. 규격에 맞는 구두에 발을 맞춰가며 살아오는 동안 억눌린 맨 가장자리 발가락에 딱딱한 티눈이 생기듯 마음 군데군데 박힌 티눈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오늘은 그런 신발을 벗고 편안한 신발로 갈아 신은 뒤 천천히 걸어 내게 오라고 가을 햇살은 말합니다. 몸을 빠듯하게 조이던 허리띠를 조금 늦추고 여유 있는 차림으로 나오라고 말합니다. 목에 꼭 끼던 단추도 하나 끄르고 목과 어깨에 힘도 빼고 그렇게 오라고 가을바람은 말합니다. 복잡한 머릿속도 비우고 털어내고 가을 들녘으로 나와 보라고 합니다. 코스모스란 코스모스, 과꽃이란 과꽃, 억새풀이란 억새풀 모두가 몸에 힘을 빼고 편하게 제 몸을 바람에 맡기고 있어서 가을길이 환하다는 걸 가르쳐 줍니다. 무심이 무엇인가를 알려 줍니다. 쉬고 있으면 마음이 텅 비어지고, 비워야지만 다시 실하게 채울 수 있으며, 그렇게 가득 찰 때 비로소 모든 일이 순서대로 잘 다스려져 간다고 일러줍니다. 그렇게 텅 비워 무심해지면 비로소 고요해 지고, 고요해져야 모든 것이 제대로 움직이게 되며, 제대로 움직여야 얻어지는 것이 있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휴즉허 허즉실 실즉윤의 허즉정 정즉동 동즉득의'(休則虛 虛則實 實則倫矣 虛則靜 靜則動 動則得矣)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무심히 움직이는 마음. 장자 천도편에서 이야기하는 무심(無心)한 동심(動心)이 가을 햇살 속에서 가을바람을 맞으며 걸어갈 때 생기는 것임을 가을은 알게 합니다. 도종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