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는 "덕이 아니면서 오래 가는 것이란 이 세상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문심조룡』에서는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할 구덕(九德), 즉 아홉 가지 덕의 노래가 있다고 합니다. "관대하면서도 위엄이 있을 것, 온화하면서도 자존심이 있을 것, 거침없이 말하면서도 공손할 것, 남을 다스리면서도 존경을 받도록 할 것, 남에게 순종하면서도 영향력이 있을 것, 강직하면서도 온화할 것, 검소하며 깨끗할 것, 단호한 결단력과 실천력이 있을 것, 정신이 강건할 것이며 도에 따라 행동할 것." 이 아홉 가지는 덕이 있는 사람이란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온화라는 말이 두 번씩이나 나오는 걸 보면 덕이 있는 사람은 온화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저 너그럽고 부드럽기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관대하면서도 위엄이 있고 온화하면서도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관대하고 온화하지만 위엄도 없고 자존심도 없이 가볍게 처신하거나 비굴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보다 윗자리에 있으며 남을 다스리는 일을 해도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덕이 있는 사람이고, 남보다 아랫자리에 있어서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도 거침없이 자기 소신을 밝혀 말하면서도 공손한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장수를 일컬어 덕장이라고 하면 아랫사람을 다스리되 존경을 잃지 않는 너그럽고 온화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위엄이 없으면 덕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덕은 아랫사람에게 무언가 베풀 것이 있는 윗사람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서 윗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영향력은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성품과 검소하면서도 깨끗한 삶, 단호한 결단력과 실천력 있는 태도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정신이 강건하고 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일 때 비로소 덕 있는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문심조룡』에서 이야기하는 아홉 가지 덕 중에는 지키기 쉽지 않은 내용도 있지만 '위엄이나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너그럽고 온화한 것이 아니라, 너그럽고 온화하면서도 위엄과 자존심을 잃지 않는 삶의 태도'가 덕 있는 모습이라는 걸 새롭게 깨닫습니다. 도종환/시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산과 들의 나무들이 황홀하게 물들고 있는 가을입니다. 단풍이 든다는 것은 나무가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나무를 나무이게 만든 것은 나뭇잎입니다. 꽃이나 열매보다 나무를 더 가까이 하고, 나무와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나뭇잎입니다. 꽃은 아주 잠깐 나무에게 왔다가 갑니다. 열매도 나뭇잎처럼 오랜 시간 나무와 함께 있지는 않습니다. 봄에 제일 먼저 나무를 다시 살아나게 한 것도 나뭇잎이고, 가장 오래 곁에 머물고 있는 것도 나뭇잎입니다. 나뭇잎을 뜨거운 태양 볕으로부터 보호해 준 것도 나뭇잎이지만, 바람에 가장 많이 시달린 것도 나뭇잎입니다. 빗줄기에 젖을 때는 빗줄기를 막아주었고, 벌레와 짐승이 달려들 때는 자기 몸을 먼저 내주곤 했습니다. 나무도 나뭇잎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알겁니다. 나뭇잎은 '제 삶의 이유' 였고 '제 몸의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나뭇잎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무는 압니다. 그것까지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섭니다. 나는 단풍으로 황홀하게 물드는 나무를 보며, 버리면서 생의 절정에 서는 삶을 봅니다. 방하착(放下着)의 큰 말씀을 듣습니다. 도종환/시인
Board 추천글 2008.10.30 바람의종 R 11139
가을 오후 상당산 고갯길을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단풍이 참 아름답게 물들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원을 거쳐 보은으로 가는 길을 지나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노란 은행잎을 보면서 황홀하였습니다. 나는 길가에 줄 지어 선 은행나무 사이를 지나오며 나무들에게 거수경례 하였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은행나무는 순간순간 제 삶에 충실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목마른 날들도 많았고, 하염없이 빗줄기에 젖어야 하는 날도 있었으며, 뜨거운 햇살에 몸이 바짝바짝 타는 날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햇살에도 정직하였고 목마름에도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시달릴 때는 시달리는 대로 바람을 받아들였고, 구름 그림자에 그늘진 날은 그늘 속에서 담담하였습니다. 제게 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노란 황금빛 잎들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은행나무 밑에 서서 은행나무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황홀의 편린들을 하나씩 떼어 바람에 주며 은행나무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 빛나는 순간이 한 해의 절정임을 은행나무도 알 것입니다. 우리도 이 순간을 오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일도 보고 다음 주에도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닙니다. 한 해에 한 번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가을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 아래서 남아 있는 우리 생의 어느 날이 이렇게 찬란한 소멸이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 충실하고 정직하였던 삶이 황홀하게 단풍지는 시간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도종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