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조카 허친이 집을 짓고서 통곡헌(慟哭軒)이란 이름의 편액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크게 비웃으며 세상에는 즐길 일이 얼마나 많거늘 무엇 때문에 곡(哭)이란 이름을 내세워 집에 편액을 건단 말이냐 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허친이 이렇게 대꾸하였습니다. "저는 이 시대가 즐기는 것은 등지고, 세상이 좋아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이 시대가 환락을 즐기므로 저는 비애를 좋아하며, 이 세상이 우쭐대고 기분 내기를 좋아하므로 저는 울적하게 지내렵니다. 세상에서 좋아하는 부귀나 영예를 저는 더러운 물건인 양 버립니다.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는 것은 언제나 곡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저는 곡이란 이름을 내세워 제집의 이름을 삼았습니다." 말하자면 시대의 비천함과 세태의 천박함을 보면서 통곡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저항의 마음을 편액에 담아 표현한 것입니다. 잘못된 세상과 불화하며 맞서고자 하는 사연을 듣고 허균은 조카를 비웃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국가의 일은 날이 갈수록 그릇되어 가고, 선비의 행실은 날이 갈수록 허위에 젖어들어가며, 친구들끼리 등을 돌리고 저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배신행위는 길이 갈라져 분리됨보다 훨씬 심하다. 또 현명한 선비들이 곤액(困厄)을 당하는 상황이 막다른 길에 봉착한 처지보다 심하다. 허친이 통곡한다는 이름의 편액을 내건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허균은 타락한 한 시대의 모습이 말세에 가깝다고 비판하며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런 허균이 "국가의 일은 날이 갈수록 그릇되어 가고" 있는 지금의 정치 사회 상황을 보면 똑같이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부자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회, 가난한 농민들을 등치는 뻔뻔한 행정, 역사를 자기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뜯어 고치려는 위험한 발상, 근본을 잊은 채 경쟁의 채찍만을 휘두르는 교육, 약자들에게는 추상같고 부자들에게는 너그럽게 적용되는 법률을 보면서 허균 또한 '통곡의 집'이란 편액을 써서 집집마다 나누어 주고 있을 것 같습니다. 도종환 시인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며 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품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 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 밖에 나갔다 산방으로 돌아오는 가을 오후. 나를 가장 먼저 아는 체 하는 건 쓸쓸함입니다.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고 서 있는 가을.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는 가을. 그 가을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으면 가을도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집니다. 가을이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질 때마다 추녀 끝에선 풍경소리 들립니다. 그러나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는 압니다. 쓸쓸함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지 압니다.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 사람도 나무 한 그루도 내가 마주하고 선 고적한 시간도 늦게까지 남아 있는 풀꽃 한 송이도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들인지 알게 합니다. 나는 이 가을의 쓸쓸함과 만나는 시간이 좋습니다. 쓸쓸한 느낌, 쓸쓸한 맛, 쓸쓸한 풍경, 쓸쓸한 촉감이 좋습니다. 나도 쓸쓸해지고 가을도 쓸쓸해져서 가을도 나도 착해질 수밖에 없는 이 순간이 좋습니다. 도종환/시인
함양 황대선원 성수스님 지난 6일 황대선원을 찾았을 때, 스님은 산자락에 새롭게 조성한 불상 아래 조용히 홀로 앉아 있었다. 멀리서 인사를 하자 스님은 가벼운 손짓으로 가까운 자리를 청했다. 스님과의 인터뷰는 황석산자락에서 진행됐다. 활산(活山) 성수(性壽)스님. 올해 세수 여든여섯으로 1994년 원로의원으로 선출된 최고령 원로의원이다. 서울 법수선원에 이어 함양 황대선원, 2년 전에는 여든넷의 고령에도 산청에 해동선원을 개설하며 선지식으로서 길을 걷고 있다. 입동(立冬)을 하루 앞둔 지난 6일 지리산 자락 황석산 황대선원에 주석하고 있는 스님을 친견했다. 마침 엿새후면 100여개 선원에서 2000명 이상의 스님들이 동안거 결제에 들어가고 선방을 갈 수 없는 수많은 불자들은 각자의 생활현장에서 산사의 선방대중 못지않은 정진을 다짐한다. 때가 때이니만큼 스님의 한 말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어 야외법당에서 좌선삼매에 든 스님을 깨웠다. “사자새끼는 어미 물어죽일 수 있는 용기 있어야” 발심하면 바른 스승 만나 묻고 닦는 게 순리 道 해결 못하면 맞아 죽을 각오로 정진해야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니야. 회초리 석단을 이고 와서 천대를 맞고 나서 해야지.” 석 달간 용맹정진에 들어가는 선방 대중과 재가불자들을 위해 청한 한 말씀에 대한 스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돌아왔다. “도(道)를 배우는 데 전력하지 않고 도를 닦는데 전력하거든. 고려시대에는 세인들이 스님들을 ‘을축갑자(乙丑甲子)’라 했어. 배우지도 않고 거꾸로 간다는 말이야. 선방에서 입선하는 게 문제가 아니야. 도를 배워야 해. 도가 뭔지 알고 해야지.” 묻고 답하는 가운데 익힐 것은 익히고 버릴 것을 버려야 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알음알이로 무턱대고 용맹심만 자랑해서는 세월만 낭비한다는 지적이다. 유교적 풍습이 진한 집안에서 성장한 스님은 어린 시절 ‘햇노인’으로 불렸다. 서너 살 때부터 학자들이 많은 동네에서 성장하며 어른들로부터 고담성어 듣기를 즐겼지만 공부는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곱 살 때부터 지개를 지고 나무를 해 날라야 했다. 장에 나가 나무를 팔아 아버지 반찬을 사들이며 고사리 같은 손은 투박하게 변해갔지만 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은 원효대사 같은 선지식이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9살이 돼서야 스님은 그 꿈을 펴기 위해 각서를 쓰고 집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 볼 낮이 없으니 가려면 나를 죽이고 가라”는 백형(伯兄)의 입장을 저버릴 수 없어 내린 결단이었다. 마음에 속 깊이 자리한 ‘원효’를 찾아 ‘도’를 찾아 전국 산사를 누빈 끝에 천성산 내원사 조계암에서 후에 은사가 되는 성암스님을 만났다. 도를 찾기 위해 온 총각을 성암스님은 아무 말 없이 방을 한 칸 내 주었고 성수스님은 그 곳에서 홀로 수행을 계속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성암스님에게 불려 나가 ‘초심’ ‘발심’ ‘자경문’을 각각 한나절씩 사흘 만에 모두 외우고, 다시 40일 만에 10만 독(讀)을 마치자 정암사 적멸보궁으로 이끌어 10만배를 하게 했다. 말 없는 가운데 제자로 인정한 것이다. “(은사 성암스님) 그 어른도 11살 때 사서삼경을 마친 분이야. 자기 자신도 특이한 사람인데 (성수스님 자신을 지칭하며) 그런 놈 보기 드물었거든. 나 때문에 (은사스님도) 내원사를 내 놨어.” 조계암에서부터 스님은 5년여 간 다섯 가지 풀로 끼니를 해결하며 정진을 계속했다. 약초 캐러온 마을 노인으로부터 해방됐다는 얘기를 듣고 토굴을 나섰다. 수소문하여 다시 만난 은사에게 스님은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해 던지듯이 “골치 아픈 절 주지는 그만 하시고 ‘스님주지’나 하시라”고 쏴 붙이고 해인사로 발길을 옮겼다. “새로 총림을 열게 됐으니 거기 가서 배우라”는 은사의 배려가 있었다. 하지만 ‘도’를 찾기 위한, 배움에 대한 열정이 앞서 스님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지식들과 도를 넘는 대화로 상하의 격을 깨뜨리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스님은 ‘도를 배우겠다’며 공양주 소임을 거부해 도감 구산스님, 도총섭 청담스님, 부조실 인곡스님 등을 곤혹스럽게 하던 끝에 조실 효봉스님에게 불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7일안에 도를 해결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상선원인 퇴설당에 들었다. “도를 해결하지 못하면 조실 주장자로 맞아 죽어도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으니 바쁘잖아. 죽을 날이 7일밖에 안 남았으니.” “天下萬物 無非禪이요, 世上萬事 無非道” “도야 이 놈의 자식아! 네가 안나오면 내가 죽고 네가 나와야 내가 산다” 그렇게 도를 구하기 위해 ‘악’을 쓰던 엿새째 펄펄 끓던 열이 내리면서 ‘철’이 났다. 찾아가 “도를 가져왔다”고 고했지만 되돌아 온 효봉스님의 답은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닐 세.” 하지만 스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성수스님이 대뜸 “효봉 네 것 내놔라”하며 달려들었다. “그럼 못 쓴다“며 효봉스님이 타일렀지만 스님은 “천하만물 무비선(天下萬物 無非禪)이요, 세상만사 무비도(世上萬事 無非道)”라고 답을 할 정도로 배움을 위한 문답을 늦추지 않았다. “사자새끼는 어미도 물어 죽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돼.”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들을 찾아 이렇게 몸을 익혀가며 수행을 계속, 70여년의 올곧은 길을 걷고 있다.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데 믿는다는 것을 번역하면 ‘따라간다’는 말인데 따라간다는 말도 중국말이야. 우리말로 완전히 바꾸면 부처님 본보러 가는 거야. 앉는 것부터 부처님처럼 반듯하게 앉고…. 정구업진언의 진언(眞言)만 제대로 해도 불교를 제대로 아는 계기가 돼. 참말만 하라 이거야. 지혜로운 말, 참 말만 잘해도 집안이 화목하게 돼.” 스님은 불교가 무엇인지, 절이 뭐 하러 가는 곳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알고자 발심하면 바른 스승을 만나 올바로 묻고 닦는 것이 순리인데 참선의 참(參)자 선(禪)도 모르면서 가르치고 닦으려고만 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니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 부처님이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삼처전심(三處傳心) 이야기를 하며 스님은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 한국의 부설거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여 채의 건물 뒤편 황석산 자락에 새로 모신 불상 앞에서 좌선 삼매에 들었던 스님을 생각하며 발길을 돌려 나오는데 들어갈 때 미처 보지 못했던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禪法滿十方(선법만시방)’ 스님에게 끝없이 묻고, 스님이 그런 중생들에게 들려주려 했던 것이 천지에 가득했던 것인가. 성수스님은… 전계대화상 역임한 최고령 원로의원 1923년 경남 울주에서 태어나 성인들의 얘기를 많이 들으며 성장한 성수스님은 원효대사와 같은 선지식을 마음에 두고 집을 나섰다. 1년여 간 전국 산하를 누비던 끝에 천성산 내원사 조계암에서 성암스님을 만나 1년간 홀로 정진한 후 수행납자의 길에 들어섰다. 초심.발심.자경문을 각각 한나절씩 사흘 만에 모두 외우고 다시 40일 만에 10만 독(讀)을 마치고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을 10만 배 기도에 들어갔다. 인근 원효대사가 정진한 곳으로 알려진 토굴터에서 홀로 정진하다 해방이 된 후 내원사로 돌아왔다. 1944년 내원사에서 성암스님을 은.계사로 득도.수계, 1948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후 전국 선원을 찾아 정진했다. 조계사 범어사 해인사 고운사 표충사 주지, 총무원장 소임을 맡아 가람수호와 불교발전에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도 수행자의 길에 소홀함이 없었다. 김현욱 서울시장 당시 그에게 신도회장 제의를 하여 서울시내 모든 구청장을 부회장으로 위촉을 시도하는 등 사회지도층과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불교발전을 이끌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부처님오신날 명칭 공인에 앞장서 그 날을 ‘잔칫날’로 인식을 새롭게 심기도 했다. 1994년 이후 현재까지 최고령으로 원로의원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2005년 말에는 전계대화상에 위촉되어 최근까지 그 소임에 정성을 다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안된다’ ‘묵은 땅에서는 새 사람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서울 법수선원을 비롯한 선원 개설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함양 황대선원을 열고 정진하는 하는 가운데 2년 전 84살에 산청에 해동선원을 개설, 세 번째 선불장(選佛場)을 연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70여 동의 건물을 새로 지으며 가람발전에도 힘을 기울였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30여 년 전 경봉스님이 ‘명인도사가 쉽지 않고 흔치도 않은데 성수 자네가 금년내로 오십년 지도한 결과를 내 보이라’ 하면서 등을 세 번 두드려 준 것”이 인연이 되어 평생을 명안종사를 배출하는 선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10여동의 건물을 갖춘 황대선원 터를 최근 5000여 평까지 늘리고 야외법당에 불상을 새로 모셨다. 함양=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476호/ 11월15일자]
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지면 신라 경덕왕 때 이순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였는데 갑자기 세속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습니다. 왕이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않고 단속사(斷俗寺)란 절을 지어 거기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왕이 음악에 빠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궁문에 나아가 간언을 올립니다. "신이 들으니 옛날 걸주가 주색에 빠져 음탕하고 안락하여 그칠 줄 모르다가 마침내 정사가 문란하고 국가가 패망하였다 하오. 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지면 뒤에 가는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 엎디어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시고 스스로 새롭게 하시어 나라의 수명을 영구케 하옵소서." 불러도 나오지 않던 신하가 직접 찾아와 이렇게 간언하는 소리를 듣고 왕은 감탄합니다. 음악을 멈추고 궁 안으로 불러들여 도와 진리와 이세지방(理世之方), 즉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듣습니다. 벼슬자리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일도 쉽지 않거니와 한 번 자리에서 물러나면 왕이 아무리 불러도 나아가지 않다가, 왕이 정사를 조금이라도 게을리 합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단걸음에 달려가 개과자신(改過自新) 하기를 직간 하는 태도는 얼마나 늠름합니까. 또한 이런 신하의 말을 듣고 감탄하는 왕도 훌륭합니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이 감탄(感歎)이라는 한자를 바라보며 나는 묘한 감동 같은 것을 받았습니다. "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지면 뒤에 가던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게 아니냐?" 이렇게 대놓고 자기의 잘못을 질책하는 신하의 말을 듣고 감탄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경덕왕 15년에도 이 비슷한 기록이 나옵니다. 상대등 김사인이 나라에 재앙과 이변이 자주 나타남을 들어 글월을 올려 시정의 득실을 호되게 따지니 왕이 아름답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천재지변이나 재앙이야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인데도 그걸 계기로 왕이 하고 있는 정치의 잘잘못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 정사를 돌아보게 하는 신하나 그것을 가납(嘉納), 기쁘게 받아들이는 왕이나 다 열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국문학에서 경덕왕은 오히려 충담사라는 스님 때문에 잠깐 이름이 나오는 왕 정도로만 기억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삼월 삼짇날 왕이 귀정문 누상에 나아가 "누가 능력 있는 스님 한 분을 데려 올 수 있겠소." 하고 말합니다. 때마침 위의를 갖추고 지나가는 큰스님을 데리고 오자 왕은 "내가 말하는 스님이 아니다." 하고 물리칩니다. 다시 납의(衲衣)를 걸치고 앵두나무통과 삼태기를 걸머진 스님 한 분이 왔는데 왕이 누구냐고 물으니 충담이라고 대답합니다.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드리고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 왕은 그가 「찬기파랑가」라는 사뇌가를 지은 사람이냐고 묻고는 자기를 위하여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어달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충담스님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할지면 /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안민가」를 짓습니다. 이 향가를 보고 왕은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합니다. 왕사면 당시로서는 엄청난 권력과 존경이 뒤따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충담스님은 두 번 절하고 사양하며 받지 않고 떠납니다. 자기에게 올바른 소리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꾸준히 찾고 있는 왕도 훌륭한 왕이지만, 권력에 연연해하지 않고 낡은 옷에 삼태기를 걸치고 표표히 일어설 줄 아는 사람도 장부다운 사람입니다. 이런 인물들이 주위에 많은 왕은 복 받은 왕입니다. 권력이 있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아랫사람의 올바른 소리를 귀에 거슬려 하고, 아랫사람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눈치만 보고, 권력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나를 언제 불러줄 것인가 노심초사하다 부르는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단걸음에 달려가고, 자리에 앉으면 자리를 비우고 쏘다니는 날이 대부분인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세월이 흐른다고 세상이 나아지는 게 아님을 알게 됩니다. 도종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