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오신 뜻 예수님은 따뜻하고 안락한 침대 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짐승이 거처하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같은 세계적인 도시에서 성장하지 않으셨다. 갈릴래아에 위치한 나자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나자렛은 구약성서에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시골 변방이었다. 우리가 어느 특정지역 사람을 편견을 가지고 대하듯 그렇게 유대인들이 천하게 바라보는 지역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으므로 목수 일을 도우며 젊은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예수님은 30년 가까이 무명의 인물로 살았다. 예수님은 당대 사회의 지식인, 종교인, 식민지 지배자의 편에 서지 않으셨다. 정신적으로 병들고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을 함께 아파하며, 지식인 계급의 위선과 모순을 지적하고 비판하며, 외세의 폭정과 착취에 시달리고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예수님을 따르는 열두 제자 중 대부분이 어부였고, 마태오는 세리였으며 유다는 돈을 좋아하는 이였다. 제자들은 학문이 뛰어나거나 종교적으로 경지에 이른 이들이 아니었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하고 마음이 약했으며, 토마는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소외받는 이들, 병든 이들, 여성과 어린이 같은 사회적 약자들, 남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창녀가 모여 있었다. 예수님이 마태오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도 많이 와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마태오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차동엽 신부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교육의 원리를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가 사랑의 원리이다.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지위 고하, 남녀노소, 부자와 가난한 이들, 정상인과 장애우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향하였다. 둘째, 가능성의 원리이다. 사람을 과거나 현재의 모습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믿어서 교육적 노력을 기울였다. 예수님이 교육시켰던 제자들은 대부분 계발되지 못한 사람들, 충동적인 사람들, 죄인들, 무지와 편견에 빠진 사람들, 불안정한 사람들이었으나 그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았던 가능성대로 변화하였다. 셋째, 본보기(Modeling)의 원리이다. 예수님은 스스로가 가르침의 구체적인 모델이었고, 제자들이 예수님에 동화됨으로써 그들의 삶이 변화되게 하였다. 섬김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넷째, 인격적인 만남의 원리이다.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은 그 자체로 탁월한 가르침이었다.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직접 다가가 인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다섯째, 깨달음의 원리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고 진리 그 자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강요하거나, 지시하거나 주입시키려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스스로 깨달아 변화하도록 인도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믿고 따르고 있는 것일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가며, 온유하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가. 마음이 깨끗하여 예수님의 제자 되기에 부끄럽지 않으며,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을지라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는가. J 아리아스 신부는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사려 깊은 사람, 총명한 사람, 조리정연한 이론에 밝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해되는 하느님, 자기 집 문 밖에서는 굶주림과 비참이 심한데 집안에서는 포식하는 부자들로부터 흠숭을 받는 하느님, 계속 약탈하고 비방을 일삼으면서도 미사 참여하러 가는 이들에게 흠숭을 받는 하느님, 인간과 사랑에 빠질 줄 모르는 하느님을 나는 믿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일까.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제자일까. /도종환 시인
그때에 베드로가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22) 미워한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더 큰 사랑, 더 큰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사랑입니다. 때론 바다보다 넓고 산보다 크다고 하는 사람의 마음도 바늘구멍 들어갈 틈이 없는 때가 있는 걸 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합니다. 부족하고 부조리하고 유한합니다. 완전하고 결함이 없고 조화로우며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릅니다. 인간은 애당초 부족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동안 잘못도 저지르고 죄도 짓고 실수도 하고 뉘우치기도 하며 탄식하기도 하는지 모릅니다. 『중용(中庸)』에 보면 '誠者는 天之道요, 誠之者는 人之道'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誠)스러운 것은 하늘의 도(道)요, 성(誠)스러워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완전한 것은 하늘의 도요,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곧 인간의 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으로서 인간다울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는 것, 성실한 마음과 자세를 견지하며 사는 것,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 그런 속에서 올곧은 삶,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하느님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아직도 얼마나 부족하고 흠이 많으며 하느님 가까이 갈 수 없는가 하는 생각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사는 동안 몇 시간이나 본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와 있으며, 몇 시간이나 바르게 깨어 있습니까. 보다 더 겸손하게 행동할 걸, 조금 더 이해하고 너그럽게 대할 걸, 좀 더 바르게 행할 걸, 좀 더 온유하고 참을성 있게 지낼 걸 하는 후회가 드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도 그러하고 남들도 그러하다면 우리는 정말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나도 남들과 같이 잘못을 저지르고 죄악에 빠질 때가 많기 때문이며 아직도 그 많은 죄와 허물을 벗지 못한 불완전한 인간이 또 다른 불완전한 인간을 단죄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야말로 남에 대한 더 큰 사랑이요, 남에 대한 사랑의 근본적인 태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고 어떻게 내가 나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더 큰 사랑입니다. 베드로 같은 분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형제에게 일곱 번을 용서해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태 복음』에는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사랑이란 한계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요 너그럽고 관대해지는 마음입니다. 용서야말로 인간의 근본적인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태도요, 인간으로서 완전에 가까워지기 위한 어려운 걸음의 첫발을 디디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는 마음에는 꼭 인내를 필요로 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기도』의 저자 J. 갈로는 「용서」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듯 우리도 이웃을 용서할 줄 알게 해 주십시오. 잠시라도 마음에 원한을 품는 일 없이 즉시 용서할 줄 알게 해 주십시오. 입으로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용서할 줄 알게 해 주십시오. 조건을 붙이거나 제한을 두지 않고 온전히 용서할 줄 알게 해 주십시오. ( …… ) 저 자신도 많은 잘못을 저질러 이웃의 용서를 받아야만 했으니 (…… ) 모쪼록 겸허한 마음으로 용서할 줄 알게 해 주십시오. /도종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