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 도종환 북유럽이나 눈이 많이 내리는 추운 지방에서는 자작나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껍질이 희고 옆으로 얇게 벗겨지며 키가 큰 나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부 이북의 깊은 숲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자작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추운 삼림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내성적이고 과묵하다고 합니다. 자작나무 숲은 보기에는 좋지만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수렵어로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던 습성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고독과 사적 자유를 즐기고 술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않으며 타인과도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산다고 합니다. 저도 언젠가 자작나무를 보며 이런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졸시 「자작나무」전문 저는 자작나무를 보면서 희고 맑은 빛깔의 나무지만 한편으론 창백한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운 나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모습이 나와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추운 데서 자란 모습이 저하고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작나무는 눈보라와 북서풍이 아니었다면 희고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겁니다. 사는 동안 내내 그치지 않던 추위와 혹독한 환경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나무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소나무처럼 독야청청하기보다 옆의 나무를 찾아가 숲을 이루고 있을 때 자작나무는 더 아름답습니다. 자작나무가 많은 북유럽의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겉으로 보면 말이 없고 폐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이 깊다고 합니다. 수다를 떨거나 호들갑스럽지 않은 대신 성격이 차분하다고 합니다. 허세를 부리거나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정직하다고 합니다. 지리적 환경적 영향으로 끈기가 있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을 지니고 있으며, 자립심과 독립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감고 눈이 가득 쌓인 숲속의 눈부시게 희디흰 자작나무들을 생각합니다. 이 겨울, 고독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그 고독과 추위 속에서 안으로 깊어져 가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도종환 시인
불과 나무 - 도종환 (126) 불은 나무에서 생겨나 도리어 나무를 불사른다(火從木出還燒木)는 말이 있습니다. 『직지심체요절』에 나오는 고승대덕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나무에 막대를 비벼 불을 얻었습니다. 나무에서 불을 얻었으니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다른 나무들을 꺾어다 계속 불에 얹었고 그 불로 몸을 덥히고 먹을 것을 만들었습니다. 나무의 처지에서 보면 나무에서 불이 생겼으나 그 불 때문에 모든 나무들이 땔감이 되고 수없이 불태워지게 된 것입니다. 녹은 쇠에서 생겨나 쇠를 갉아 먹습니다. 쇠로 만들어진 것은 비길 데 없이 단단하지만 쇠를 못 쓰게 만들고 마는 것은 결국 쇠 자신에게서 생겨납니다. 쇠로 만든 연모는 모든 것을 베고 쓰러뜨리고 갈아엎지만 그 자신은 정작 그의 내부에서 생긴 녹으로 스러지고 맙니다. 내 몸을 무너뜨리는 것도 결국은 내 자신의 내부에서 움틉니다. 외부의 자극과 시련에는 꿈쩍도 않고 버티며 살아가다가도 내부에서 나를 녹슬게 만드는 것들로 끝내는 무너지고 맙니다.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언제나 나의 내부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좋아서 시작합니다. 그 일을 하며 기뻐하고 삶의 기쁨과 보람도 거기서 느꼈는데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로 결국은 괴로워하고 번뇌하는 때가 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몸에 자신 있어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서 가장 자신 있어 하고 자랑스러워하던 부분이 나이 들면 제일 먼저 고장 나고 병들게 됩니다. 사슴이 노루나 다른 짐승보다 더 멋있어 보이는 것은 화려하고 아름다움 뿔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슴도 그렇게 크고 멋진 관을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맹수가 나타나 도망을 가야 할 때 넝쿨과 나뭇가지에 가장 걸리기 쉬운 것 또한 그 뿔입니다. 사슴은 알고 있을까요, 사냥꾼들이 그 뿔 때문에 추적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명예를 얻고자 갖은 고초를 다 겪지만 명예를 얻고 나면 그 명예 때문에 늘 가파른 벼랑 끝에 서 있어야 합니다. 권력을 얻고자 뼈가 부스러지고 살이 짓뭉개지도록 고생을 하면서도 참지만 권력을 지키는 과정도 역시 뼈를 깎고 살이 타들어가는 듯한 삶이어서 제 살과 남의 살로 깎아 만든 권력의 산꼭대기에서 외줄을 타듯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가는 데 돈이 가장 전지전능한 물건인 것 같아서 돈을 벌기 위해 발버둥치다 돈 때문에 군데군데 벌겋게 녹이 슬어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씁쓸해지는 날이 있습니다. 사랑의 따뜻한 온기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사랑의 불길이 제 몸을 태우고 사랑하던 사람의 삶도 다 태워 결국 재밖에 남기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은 겪어서 압니다. 그러나 또 자신을 태우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게 사람이다. 저를 태우는 것이 늘 저에게서 비롯되고 저를 녹슬게 하는 것이 저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걸 알고도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고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부릅니다. 그 바다는 누가 만들고 있는지요. /도종환 시인
세한도(歲寒圖) - 도종환 (125) 세상이 나를 잊어도 나는 정신을 잃지 말자고 추사는 세한도를 그렸습니다. 세상이 엄혹할수록 꼿꼿한 정신을 지니는 일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을 겁니다. 그가 외로운 적거지에서 푸르게 살아 견딘 유배의 세월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에 따뜻한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는 여윈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려놓고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철 잎이 시들지 않아서 날이 추워지기 전에도 그대로의 소나무 잣나무요 날이 추워진 뒤에도 그대로의 소나무 잣나무"라고 한다고 제자 이상적에게 글을 적어 보냈습니다. 세상은 도도히 권력과 이익을 좇아 흘러가는데 권력과 이익을 뿌리치고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는 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세한도를 그려 보낸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한도는 정신의 한 표상이 되어 있습니다. 곽재구 시인은 「세한도」라는 시에서 이렇게 겨울을 노래한 바 있습니다. 수돗물도 숨차 못 오르는 고지대의 전세방을 칠년씩이나 명아주풀 몇 포기와 함께 흔들려온 풀내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나는 또 쓰고 싶다 방안까지 고드름이 쩌렁대는 경신년 혹한 가게의 덧눈에도 북풍에도 송이눈이 쌓이는데 고향에서 부쳐온 칡뿌리를 옹기다로에 끓이며 아내는 또 이 겨울의 남은 슬픔을 뜨개질하고 있을 것이다 은색으로 죽어 있는 서울의 모든 슬픔들을 위하여 예식조차 못 올린 반도의 많은 그리움을 위하여 밤늦게 등을 켜고 한 마리의 들사슴이나 고사리의 새순이라도 새길 것이다 ---곽재구「세한도」(이근배 엮음, 『시로 그린 세한도』) 중에서 수돗물도 숨차 못 오르는 고지대의 전세방을 시인은 추사의 대정 적거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방안까지 고드름이 쩌렁대는 혹한이 유배의 세월을 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정신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와 서울의 변두리나 산동네에 거처를 정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들의 슬픔, "은색으로 죽어 있는 서울의 모든 슬픔들을 위하여"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추사가 붓을 들고 먹을 갈아 세한도를 그리는 심정으로 "칡뿌리를 옹기다로에 끓이며""이 겨울의 남은 슬픔을 / 뜨개질하"는 아내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오늘도 권력을 가진 이를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불쌍한 이들을 마구 짓밟고 내쫓는 일을 되풀이합니다.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고 난 뒤에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어디로 어떻게 책임을 떠넘길 것인지만을 궁리합니다. 인면수심의 세월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냉혹해져도 소나무와 잣나무의 정신으로 푸르게 살아 깨어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 세월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도종환 시인
Board 추천글 2009.02.02 바람의종 R 22200
기뻐 할 일 - 도종환 (124) "참 기쁜 일이다. 이렇게 느끼고 싶을 때가 있죠? 선생님은 어떤 때 그런 기쁨을 느끼세요?" 연초에 덕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받은 질문이라 대답할 말이 금방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다가 빨간 신호등이 제 바로 앞에서 파란 신호등으로 바뀔 때에요. 우리 인생길에서도 앞 사람들은 길을 건너갔는데 당신은 거기 서라는 신호를 받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정반대로 이제 멈추어야 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갈 수 있도록 신호가 바뀌었을 때 그런 때 참 기뻐요." --저는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기쁨을 느끼죠. 한동안 글이 안 쓰여지다가 어느 날 시 한 편을 완성했을 때 그럴 때 말이에요. "또 있어요. 바위틈에 꽃이 피어 있는 걸 볼 때나 보도블록 사이에 작은 민들레가 피어 있는 걸 발견했을 때요." --한동안 잊었던 제자들이 어른이 다 되어 연락이 왔을 때나 전화나 편지로 안부를 물어올 때나 꼭 지금의 내 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글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나이든 사람끼리 어린애처럼 그런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그동안 작은 일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잊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이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속상해 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주위에 늘 내가 하는 일을 알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걸 기뻐해야겠습니다. 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답답할 때가 많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힘과 재능을 주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아이들이 남의 아이들보다 더 뛰어나지 않아서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비뚤게 크지 않고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남보다 더 튼튼하거나 빼어난 몸매를 가지지 못했다고 주눅들 때도 있지만 병원 문을 나설 때면 우리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주위에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쁨. 엷은 햇빛으로 꽃 한 송이를 기를 수 있는 기쁨. 추운 겨울날 따스한 털목도리를 두를 수 있는 기쁨. 하루에 다만 몇 분이라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기쁨. 생각해 보면 우리 주위엔 기뻐할 일들이 많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반갑고 기쁜 사람으로 살고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한 통의 편지와 같은 사람. 얽혀 있는 일의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주는 사람. 돌멩이에 걸려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멀리서 예쁜 카드와 함께 배달되어 온 꽃바구니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일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핀란드의 아이들 - 도종환 (123) 지난주에 핀란드를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일 년 가까이 보내던 엽서를 일주일간 보내지 못했습니다.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여기도 눈이 많이 왔지만 핀란드는 사방이 눈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오후 4시도 되기 전에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길었습니다. 겨울이면 흐린 날이 많고 눈이 많이 내리는 추운 나라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들은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밖에서 재운다고 합니다. 기온이 내려가면 건조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밖에서 자야 산소를 충분히 마실 수 있다고 해서 밖에서 재운다는 겁니다. 아이가 건강검진을 받고 예방주사를 맞을 때 언제부터 앉기 시작했는지 손으로 물건을 잡기 시작한 건 언제인지 간호사가 일일이 체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림 보고 말하기, 도형 옮겨 그리기, 공 던지고 받기 구슬꿰기 등의 지적능력도 검사한다고 합니다. 라스텐 네우블라 라는 이름의 이 성장 발달 기록은 조기 교육 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처지지 않게 하려는 노력의 하나라고 합니다. 핀란드 교육의 목적은 영재를 키우는 데 있지 않고 뒤처지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하고 노력하는 데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참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없는지, 집중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테스트하는데 그중에서도 집중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도 집중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보충 교육을 통해서 집중력을 다시 기르도록 지도하고, 집에서도 놀면서 집중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한다고 합니다. 레고를 가지고 논다든가 집중해서 놀기 시작하면 아이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부모가 조용히 한다는 겁니다. 밖에서 한두 시간씩 뛰어 놀면서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들어와야 차분해진다고 생각해서 마음껏 놀면서 자라게 한다는 겁니다. 이 나라에는 학원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교육은 학교에서 이루어집니다. 교사와 아이와 부모가 상의해서 어디까지 공부할 것인가를 정하고 그 합의한 목표에 도달했는가를 측정하는 것이 이 나라의 평가입니다. 목표에 도달하면 다음 목표를 정하고 도달하지 못했으면 학습목표를 다시 협의해서 정합니다. 학생마다 목표가 다른 것은 개인별로 학습속도가 다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습의 원칙 중의 하나가 협력입니다. 공부는 모둠을 만들어 서로 협력하며 배워나갑니다. 친구는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협력하는 존재이고 내가 넘어야 할 것은 친구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학생간의 학력 격차가 적고 학교간의 차이가 적습니다. 학생들은 지역의 학교로 진학을 하고 어디서든 무상으로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사는 가장 존경 받는 직업 중의 하나이고 사회에서도 높은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중앙정부는 교육의 가이드라인만을 정하고 교육과정은 학교별로 자율적으로 구성하여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수업의 양은 우리나라의 절반도 안 되는데 학력수준은 세계 1위입니다.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에서 가장 높은 성취를 보여주고 있으며 부패수치는 가장 낮고, 복지에 투자하는 비율이 우리의 두 배 가까이 되며 특권의식이 없는 민족입니다. 우리도 상위권을 유지하는 과목이 있지만 우리와 가르치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양 많은 수업에 치중하며, 아이들을 휘어잡고 꼼짝 못하게 몰아 부치면서 얻어내는 성적이지만 이 나라는 시험도 별로 보지 않습니다. 이 나라는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돌보고 바르게 교육시킬 책임이 국가와 자치단체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이가 서로 도울 줄 알고 소통하고 협력할 줄 알며 지적능력과 함께 상대방을 존중하고 정직하고 민주적인 생각을 가진 젊은이로 자라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가장 큰 이익이요 재산이라고 이들은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서 작은 나라를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국민소득도 우리의 두 배가 넘습니다. 함께 간 분 중에 이 나라의 어린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학대받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우는 그의 눈물이 오래 우리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도종환 시인
설날 - 도종환 밤에도 하얗게 눈이 내렸습니다. 쌓인 눈 위에 또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하고 차들도 거북이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눈 때문에 걱정을 하면서 저도 버스를 타고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 우리들처럼 설을 기뻐하며 기다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설 전날 밤 일찍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해서 졸린 눈을 비비며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던 생각이 납니다. 장에 가서 설날 차례 상에 올릴 음식을 장만해 오고, 전을 부치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흘러 다니고, 방금 떡 방앗간에서 해 온 가래떡에서 따뜻한 김이 하얗게 솟아오르는 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오고가며 얻어먹는 부침개며 막과자가 하루 종일 기분을 좋게 만들었습니다. 김종해 시인은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신 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 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선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김종해 「어머니의 설날」 이 밤 "눈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 어머니 곁에서 /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 오르던 어린 시절의 설날을 생각합니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기쁘게 달아오르던 내 꿈을 생각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가슴을 달뜨게 하던 그 꿈 때문에 "밖에선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리던 어린 날을 생각합니다. 그 꿈을 하나씩 버리면서 우리는 나이가 들었습니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서 기쁜 소식이 찾아오길 바랐고, 우리 자신이 한 마리 어린 기쁨의 까치였던 날들은 가고 우리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설이 되면 무엇을 빚고 있는 걸까요? 무슨 소망을 빚어가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설날을 빚어 주시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실까요? 어머니가 산나물을 무치시면 산도 거기까지 따라 내려오고, 생선을 만지시면 바다가 올라와서 비늘을 털던 어머니는 지금 어떤 나라를 만들고 계실까요? 그런 어머니의 나라는 지금 지상 어디에 있는 걸까요? 설 전날 밤 내리는 눈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라고 생각하던 그 마음으로 맞이하는 설날이길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이 날리는 연이 어머니가 햇살로 끌어올려주시는 연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설날이길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래도 꿈이 달아오르는 설날이길 바랍니다. /도종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