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봄은 차례차례 옵니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의 몸속에 우주의 섭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질서정연하게 옵니다. 우주의 커다란 계획 속에서 차례차례 옵니다. 꽃다지 보다 민들레가 먼저 피는 법이 없습니다. 민들레는 꽃다지가 들판 가득 자기의 날들을 만드는 것을 본 다음에 제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똑같이 노란빛의 꽃이라 해도 산수유 꽃보다 먼저 피는 개나리는 없습니다. 산수유 꽃이 제일 먼저 벌들을 자기 꽃으로 가득 가득 불러들이는 것을 보고도 개나리는 시샘하여 피지 않습니다. 천천히 자기 때가 되어 피어도 자기를 찾아오는 것들은 또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자연은 다 예비해 놓고 있을 것임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할미꽃이 피지 않았는데 가을 구절초가 먼저 와서 피는 법이 없습니다. 이게 우주의 질서입니다. 철쭉이 진달래보다 결코 먼저 오는 법이 없으며 백목련이 다 지고 난 뒤에라야 그 뜨락에 불두화가 피는 것입니다. 화단마다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어도 장미는 팽팽하게 초록 물이 오른 줄기를 담 밑에 걸어 두고 때를 기다립니다. 자기가 피어야 할 철이 언제인가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압니다. 먼저 피었다고 교만한 꽃이 없으며 나중에 핀다고 초조해 하는 꽃이 없습니다. 제가 피어야 할 차례가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인간의 세상에 살면서 제가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시간이 언제인가를 꽃과 나무들은 알고 있습니다. 때론 그걸 모르고 일찍 피는 꽃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제 차례가 아니었음을 알면 얼른 다시 들어갑니다. 꺼내 놓았던 꽃을 거두어 다시 뿌리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찾아 올 제 때를 기다립니다. 같은 목련나무 안에서도 꽃피는 순서가 있고 같은 모과나무 줄기에서도 순이 돋는 잎차례가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가 피는데도 다 질서가 있고 차례가 있습니다. 우주만물을 이 땅에 내는 데도 그런 순서와 섭리를 따르는 것을 보면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봄도 그렇게 이미 계획해 놓은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오는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봄은 소리 없이 옵니다. 겨우내 언 나뭇가지에 내려와 온종일 그 나무의 살갗을 쓰다듬으면서도 봄 햇살은 말이 없습니다. 메마를 대로 메마른 나무 둥치에 내려 나무의 살 속으로 들어가려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자 더 많은 친구들을 불러와 기어코 단단한 각질 아래로 스며들어가면서도 봄비는 조용합니다. 나무의 속을 적시고 새순을 키워 껍질 밖으로 밀어내면서도 봄비는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않습니다. 웅크린 몸을 좀처럼 펴지 못하고 있는 꽃봉오리를 입김으로 조금씩 열어 내면서도 봄바람은 쇳소리를 내는 법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며 눈을 감고 있는 봉오리마다 찾아가 감싸고 다독이고 쓰다듬으며 꽃이 되게 하는 봄 햇살, 봄비, 봄바람은 늘 소리 없이 움직입니다. 혼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없습니다. 바람이 영혼을 불어넣어 주고 햇살이 몸을 데워 주며 빗방울이 실핏줄을 깨워 주고 흙이 흔들리는 몸을 붙잡아 주어 꽃 한 송이가 피는 것입니다. 꽃 한 송이 속에는 그래서 자연의 온갖 숨결이 다 모여 있고 우주의 수 없는 손길이 다 내려와 있습니다. 그걸 꽃이 제일 먼저 알기 때문에 조용할 줄 아는 것입니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고 모든 꽃이 다소곳할 줄 아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피었다가 저를 꽃으로 있게 해 준 자연의 품으로, 우주의 구극(究極) 속으로 말없이 돌아갈 줄 아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피는 꽃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 꽃을 발견할 뿐입니다. 살아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고 하루아침에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없습니다. 꽃 한 송이를 둘러싼 우주의 모든 생명들이 오랜 세월 그 꽃과 함께 존재하고 일하고 움직이면서 꽃 한 송이를 피우는 것입니다. 억겁의 인연이 그 속에 함께 모여 꽃과 함께 나고 살고 아파하고 기뻐하며 살아 있는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303232707&Section=04 봄은 먼데서 옵니다. 남쪽 먼 섬 비탈 밭이나 거기서 바다 쪽을 바라보며 섰던 매화나무 찬 가지에서부터 옵니다. 바람을 타고 옵니다. 바람을 데리고 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자기만 아는 거인」에 나오는 거인처럼 봄이 오는 정원에 높은 담을 쌓고 지내듯 문을 꼭꼭 걸어 닫고 지내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 문이란 문을 다 열어 놓았더니 바람이 더미 더미 창문을 타고 들어옵니다. 내 방 북쪽 창문도 열고 베란다가 있는 남쪽 이중창도 엽니다. 방안 가득 바람을 불러 드렸더니 머리 아픈 것이 조금씩 잦아듭니다. 답답하던 가슴도 풀리고 숨도 깊게 쉬어집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는 바람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에는 겨울바람의 냄새가 있고, 저녁 바람에는 저녁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 속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목을 파고 들어오던 거리의 냉기 그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머리맡에서 걸레가 얼던 월셋방 담 밑의 긴 골목 어둑어둑 하던 벽에 기대서서 꺼진 연탄불이 다시 붙기를 기다리던 날의 냄새가 있습니다. 저녁 바람 속에는 노을 묻은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강가를 따라 내려가며 오지 않는 것을 끝없이 기다리던 날들의 아득한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지친 몸 허기진 육신을 추스르며 혼자 저음의 노래를 부를 때 다가와 머리칼을 날리던 샛강의 냄새 같은 것이 묻어 있습니다. 봄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다가와 얼굴을 쓰다듬는 봄바람에는 봄바람의 냄새가 스며 있습니다. 초년 교사 시절 처음 가보는 낯선 산골 학교, 부임 인사가 끝나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던 무렵 혼자 운동장 끝을 따라 거닐다 만났던 바람의 냄새가 떠오릅니다. 차가운 기운은 벗었지만 아직 완전히 따스한 몸으로 바뀌지 않은 봄바람이 앞산 기슭 온갖 나무와 꽃들의 묵은 껍질을 벗기려고 산비알을 따라 올라가다 내려오기를 여러 차례 꽃망울을 완전히 벗기진 못하고 내 곁에 내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숨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낯설음도 곧 익숙해지겠지, 갑자기 바뀐 환경에도 서서히 적응해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바람에 묻어오던 흙냄새 바람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낯익은 냄새에 실려 봄은 옵니다. 개울물이 땅을 녹이며 다시 살아난 벌레들과 물고기 새끼, 도롱뇽알, 개구리의 앳된 비린내를 한데 섞어 바람에 실려 보냅니다. /도종환 시인
욕 모악산 금산사는 템플스테이로도 유명합니다. 종교가 다른 이들이나 외국인들도 금산사의 절 체험에 많이 참여합니다. 일주일간의 참선을 끝내고 돌아가는 날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템플스테이를 주관하시는 일감 스님에게 인사를 하며 "스님, 저 이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아내가 자기에게 욕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그 남자는 말했습니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 "야 이 나쁜 놈아"하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갑자기 반말로 욕을 해대는 스님을 보며 남자는 "아니 스님 왜 욕을 하십니까?" 하고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스님은 "나는 한 번 욕을 했지만 너는 일주일 내내 백번도 더 욕을 했잖아."하고 소리치셨습니다. 참선을 한다고 절방에 앉아서 일주일 내내 아내를 미워하고 속으로 욕하고 그것이 결국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스님은 생각하신 거겠죠. "너 같이 모자란 놈에게 네 아내가 십 년 동안 한번밖에 욕을 안했다면 네 아내는 참으로 착한 여자야." 스님의 욕설을 듣고 있던 그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세 번 절하고 산문을 내려갔습니다. 스님은 그 남자도 착한 남자라고 하셨습니다. 스님의 꾸지람과 호통 소리에 눈물을 흘리고 절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참선이란 자기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도를 깨닫는 것도 결국 자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살면서 가장 절실하게 고민하는 것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게 깨닫는 것이라는 거지요. 상대방에게서 느끼는 실망스러운 감정은 바로 자신 속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남편은 화를 내거나 아내를 욕하지 않았는데 아내가 자기에게 어떻게 욕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지만, 욕설과 분노는 남자의 마음속에 있던 것이라는 겁니다. 일주일을 선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내가 왜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욕을 해서라도 깨닫게 해 주는 스님이 곁에 계신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도종환 시인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98090227110420&Section=04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습니까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습니까? 오늘 하루의 삶, 오늘 하루의 생활은 만족할 만했습니까? 무엇인가를 얻은 하루였는지요? 다른 날보다 훨씬 새로웠던 하루였는지요? 아니면 어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지루하고 답답했던 하루는 아니었습니까? 서류더미 사이에서 하루 종일 쓰고 지우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정신없이 보낸 하루는 아니었습니까? 전화에 시달리고 똑같은 계단을 몇 번씩 오르내리거나, 똑같은 대답을 수십 번씩 반복해야 하는 하루는 아니었는지요? 먹을 것을 준비하고 치우고 다시 차리는 동안 설거지 물통을 따라 아래로 빠져 내려가는 하숫물처럼 그렇게 땟물을 안고 흘러가 버리는 나날은 아니었는지요? 새롭게 생산하고 창조하는 삶이지 못했다고 느끼는 생활의 연속은 아니었는지요? 저무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차에 실려 돌아오는 길 지친 어깨보다 먼저 지치는 내 영혼을 바라보다 '이것이었는가, 내가 꿈꾸던 삶은?' 하는 물음을 나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그러면서 다시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조건 속에서 더 힘들고 버거운 일을 하면서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서류만을 복사해주는 사람도 있고, 하루 종일 전화로 물어오는 물음에 대답만을 해 주어야 하는 사람도 있고,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나사를 끼우는 일을 몇 달씩 해야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돌을 깎아 아름다운 조각을 만드는 일은 작품 하나가 만들어 지는 몇 달 몇 년의 기간 동안 즐겁기만 할까요. 향기도 맛도 없는 진흙을 빚어 아름다운 그릇을 만드는 일은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한 나날이었을까요. 정말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무엇인가를 창조해 냈다고 생각하는 일도 어렵고 짜증스럽고 답답하기만 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집니다. 오늘 하루 힘겨웠던 당신의 일을 통해 다만 지쳐 쓰러지지 말고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삶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도록 방향을 다잡아 자신을 끌고 가십시오. 오늘 하루 바쁘고 벅찼던 당신의 삶을 의미 없었다고 여기지 말고 당신의 인생이 뿌듯한 피로함으로 벅차오르도록 살아낸 결과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내일 아침 당신의 인생이 희망으로 다시 밝아올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아름다운 새가 징그러운 벌레를 잡아먹는 걸 볼 때가 있습니다. 거친 털에다 금방이라도 독을 뿜을 것만 같은 모습으로 몸부림치는 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그 새는 필사적인 노력을 쏟아 붓습니다. 꿈틀거리는 벌레와 새의 부리짓이 너무 처절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는 노래 부릅니다. 조금 전에 징그러운 벌레를 잡아먹던 그 부리로 영롱한 소리를 내며 숲속 가득 아름다운 노래를 쏟아 붓습니다. 고고한 몸짓으로 날아가던 새들이 물가 진흙탕에 내려 물고기를 잡아먹는 걸 볼 때가 있습니다. 비린 물고기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 그 우아하던 날개에 온통 진흙칠을 하고 있는 다리 긴 새들. 꽉 다문 조개의 입을 벌리기 위해 부리로 여기저기 두드리거나 들었다 놓는 동안 깃털과 입가에 온통 흙물을 묻힌 채 분주하게 움직이는 새들. 점점 더러워지는 물가, 줄어드는 먹이, 그래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선 뻘흙을 파지 않으면 안 되는 새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먹이를 찾는 그 새들의 처절한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다른 생각이 듭니다. '소름끼치는 털투성이 벌레를 잡아먹어 가면서도 저 새들은 저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구나. 온 몸에 흙칠을 해가면서도 저 새들은 다시 하늘로 날아가는구나. 제 하늘 제 갈 길을 찾아 가는구나. 저렇게 하면서 제 소리 제 하늘을 잃지 않고 지켜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다운 새들이라고 이슬만 마시거나 귀한 나무열매만을 먹으며 고고하게 사는 게 아니라 처절하게 사는구나. 그들의 그런 처절함을 보지 않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바라보며 그저 편한 생각, 인간 위주의 한가한 생각만을 해 왔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사실은 사람도 짐승도 다 그렇게 사는 게 아닙니까? 생존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런 뜨거운 면이 있으면서 그걸 못 본 체 안 본 체 외면하며 사는 때는 없는지요. 물론 제 한 목숨 지탱하는 일만을 위해 약한 자를 짓밟고 착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생존의 최고 가치는 약육강식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탐욕스러움만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짐승이 있습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먹이를 찾고 그 힘으로 다시 아름다운 소리를 숲에 되돌려 주는 새처럼, 힘찬 날갯짓으로 하늘에 가득한 새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땀 흘려 일하고 그 건강한 팔뚝으로 인간다움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성실히 최선을 다해 일하고 나서도 제 빛깔 제 향기를 지니는 사람은 훌륭하게 보입니다. 궂은 일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고생스럽게 일하면서도 자상한 엄마와 따뜻한 아빠로 돌아와 있는 이들의 모습은 존경스럽습니다. 거기에 여유와 나눔과 음악 한 소절이 깃들어 있는 것을 상상해 보는 일은 상상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그래서 오늘 똑같은 그 새들이 다르게 보입니다. 아니 똑같은 그 새들을 다르게 봅니다. /도종환 시인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222213941&Section=04 이 모래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 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祭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정영효 「저녁의 황사」중에서 나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곳은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사막이라서 타클라마칸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끝없는 모래벌판과 모래 언덕, 오아시스도 찾을 수 없고 겨울이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추운 곳 그곳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떨립니다. 봄철만 되면 온나라의 하늘과 땅을 뒤덮는 황사도 거기서 불어온다고 합니다. 저 혼자 수십만 년 충분히 고독하였을 사막의 모래들이 가끔씩 몸서리를 치며 일어서 하늘 멀리 몸을 날리거나 풀밭이 있고 물이 있고 사람이 있는 땅을 향해 움직일 때면 우리들은 입을 닫고 눈을 감고 귀를 막습니다. 그 모래는 시인의 말대로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모릅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모래언덕뿐인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라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막을 찾아갑니다. 그 언저리 어디에 비단길이 있어서 그 죽음의 사막을 찾아 들어갑니다. 아니 우리가 사는 이곳도 한 번 발을 디디면 돌아올 수 없는 사막인지 모릅니다. 죽음을 향해 기는 길인 줄 알면서 오늘도 낙타의 등에 오르는 이는 얼마나 많습니까.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순례를 떠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찾았다가는 잃을 때도 있고, 길을 만나도 길인 줄 모른 채, 그저 지향 없는 길을 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앞으로 가고 있다고 믿으며 모래언덕을 넘지만 지평선 역시 다시 넘어야할 벌판이고, 오아시스는 신기루일 뿐 우리는 지쳐 있습니다. 황사의 질감에서 우리가 사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저녁, 낙타도 우리도 고단한데 따뜻한 불빛은 보이지 않고 자꾸 목이 마릅니다. /도종환 시인
Board 추천글 2009.03.01 바람의종 R 11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