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323063203&Section=04고맙고 대견한 꽃 피반령 고개를 넘어오다 진달래꽃을 보았습니다. 차창을 열고 진달래꽃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아름답게 확인시키는 것이 봄꽃이라서 봄꽃이 더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산수유꽃은 제밀 먼저 피는 꽃이라서 사랑받습니다. 누구든지 저렇게 먼저 나가는 이가 있어야 봄이 오는 것임을 알려주는 꽃이라 사람들은 박수를 보냅니다. 매화꽃은 천천히 피면서 은은하게 아름답습니다. 겨울을 이기고 난 뒤에 환호하거나 소리치기보다 말없이 웃고 있는 은은한 모습이 미덥습니다. 백목련의 희고 밝고 고아한 모습은 애틋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저렇게 고운 사람 하나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람들을 모조리 밖으로 불러내어 꽃보다 더 들뜨게 하는 건 벚꽃입니다. 사람들은 벚꽃을 보고는 박수를 보내지 않습니다. 그저 그 꽃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합니다. 여럿이 몰려다니며 공연히 흥에 겨워 마음이 꽃잎처럼 여기저기 흩날리곤 합니다. 개나리는 그런 꽃에 비하면 화려하거나 고매하지 않습니다. 그저 잿빛으로 겨울을 견뎌온 도심의 구석구석을 환하게 바꾸고 있을 뿐입니다. (.......)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개나리꽃에 마음이 더 간다 그늘진 곳과 햇볕 드는 곳을 가리지 않고 본래 살던 곳과 옮겨 심은 곳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 때문이다 깊은 산 속이나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라 산동네든 공장울타리든 먼지 많은 도심이든 구분하지 않고 바람과 티끌 속에서 그곳을 환하게 바꾸며 피기 때문이다 검은 물이 흐르는 하천 둑에서도 피고 소음과 아우성 소리에도 귀 막지 않고 피고 세속의 눅눅한 땅이나 메마른 땅을 가리지 않고 피기 때문이다 ---「개나리꽃」중에서 개나리꽃은 진달래처럼 산속에서만 피지 않습니다. 백목련처럼 정원에서만 자라지 않습니다. 산동네 언덕에도 피고 공장 울타리에도 핍니다. 하천 둑에서도 피고 소음 속에서도 핍니다. 본래 살던 곳에서도 잘 자라지만 옮겨 심어도 까다롭게 굴지 않고 자랍니다. 개나리꽃은 세속에서 피는 꽃입니다. 먼지와 티끌과 바람 속에서 피지만 그곳을 환하게 바꾸는 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개나리꽃이 고맙고 대견합니다. 꽃 한 송이는 별로 주목받을만한 데가 없지만 모여 피어서 아름다운 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개나리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낭창낭창 휘어지는 개나리꽃 줄기 옆에서 까닭 없이 즐거워지는 봄날입니다. /도종환 시인
아침에 집을 나서다 막 피기 시작하는 개나리꽃을 보았습니다. "어, 개나리 피었네!" 하는 소리가 나오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좋아서 혼자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좋아'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나리꽃이 피었다고 뭘 어찌 해야 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백목련 잎이 막 벌어지면서 속에 있던 연한 연두색을 띤 잎이 입을 조금 열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하루 이틀만 있으면 백목련도 하얀 등불 같은 꽃을 피울 것 같습니다. '백목련이 피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훈풍에 가지를 맡긴 채 가볍게 몸을 흔들고 있는 백목련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데 갑자기 반가운 손님이 들이닥쳤을 때의 심정과 같은 마음으로 꽃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날이 풀리면 한 번 내려오겠다곤 했지만 햇살 좋은 날 오후 느닷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물 묻은 손 바지춤에 문지르며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 하듯 나 화사하게 웃으며 나타난 살구꽃 앞에 섰네 헝클어진 머리 빗지도 않았는데 흙 묻고 먼지 묻은 손 털지도 않았는데 해맑은 얼굴로 소리 없이 웃으며 기다리던 그이 문 앞에 와 서 있듯 백목련 배시시 피어 내 앞에 서 있네 (......) 나는 아직 아무 준비도 못했는데 어어 이 일을 어쩌나 이렇게 갑자기 몰려오면 어쩌나 개나리꽃 목련꽃 살구꽃 이렇게 몰려오면 어쩌나 ---「꽃소식」 "어어 이 일을 어쩌나 / 이렇게 갑자기 몰려오면 어쩌나" 지금 그런 심정으로 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
민들레 뿌리 / 도종환 날이 가물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때가 되면 햇살 가득 넘치고 빗물 넉넉해 꽃 피고 열매 맺는 일 순탄하기만 한 삶도 많지만 사는 일 누구에게나 그리 만만치 않아 어느 해엔 늦도록 추위가 물러가지 않거나 가뭄이 깊어 튼실한 꽃은커녕 몸을 지키기 어려운 때도 있다 눈치 빠른 이들은 들판을 떠나고 남아 있는 것들도 삶의 반경 절반으로 줄이며 떨어져 나가는 제 살과 이파리들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겉보기엔 많이 빈약해지고 초췌하여 지쳐 있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남들은 제 꽃이 어떤 모양 어떤 빛깔로 비칠까 걱정할 때 곁뿌리 다 데리고 원뿌리를 곧게곧게 아래로 내린다 꽃 피기 어려운 때일수록 두 배 세 배 깊어져 간다 더욱 말없이 더욱 진지하게 낮은 곳을 찾아서 올해는 겨울 가뭄이 참 오래갑니다. 사람들이 먹을 물도 부족하지만 대지도 목마름으로 쩍쩍 갈라집니다. 그 흙에 뿌리내리고 사는 것들도 목이 마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 소식 없는 날 "날이 가물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뭄이 깊으면 "튼실한 꽃은커녕 / 몸을 지키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메마르고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살기가 힘들고 목은 바짝바짝 탄다고 합니다. 하던 일을 접거나, 보따리를 싸거나 삶의 반경을 절반으로 줄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그럴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남들은 제 꽃이 어떤 모양 어떤 빛깔로 비칠까 걱정할 때 / 곁뿌리 다 데리고 원뿌리를 곧게곧게 아래로 내"립니다. "더욱 말없이 더욱 진지하게 낮은 곳을 찾아서" 깊어져 갑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침착하게 행동하고 진지해집니다. 경박하지 말고 진지해져야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낮아지고 겸손해져야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꽃은 소리 없이 핍니다 꽃은 어떻게 필까요. 꽃은 소리 없이 핍니다. 꽃은 고요하게 핍니다. 고요한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핍니다. 꽃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조급해 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아우성치지 않으면서 핍니다. 자기 자신으로 깊어져 가며 핍니다. 자기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해 언 땅속에서도 깨어 움직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눈감지 않고 뜨거움 속에서도 쉬지 않습니다. 달이 소리 없이 떠올라 광활한 넓이의 어둠을 조금씩 지워나가면서도 외롭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걸 보면서, 꽃도 그 어둠 속에서 자기가 피워야 할 꽃의 자태를 배웠을 겁니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지만 집착하지 않아서 꽃 한 송이를 이루었을 겁니다. 무념무상의 그 깊은 고요 속에서 한 송이씩을 얻었을 것입니다. 자아를 향해 올곧게 나가지만 자아에 얽매이지 않고, 무아의 상태에 머무를 줄 아는 동안 한 송이씩 꽃은 피어올랐을 겁니다.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다 말고 꽃 한 송이를 보며 웃음을 짓던 가섭의 심중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꽃 한 송이가 그렇게 무장무애한 마음의 상태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도 말씀 하나를 그렇게 깨닫고 삶의 경계 경계에서마다 화두 하나씩 깨쳐 나가야 한다는 걸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진흙 속에 살고 진흙에서 출발 하되 진흙이 묻어 있지 않는 새로운 탄생. 우리의 삶도 그런 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풀 한 포기도 그와 똑같이 피어납니다. 그렇게 제 빛깔을 찾아 갑니다. 나무 한 그루도 그렇게 나뭇잎을 내밉니다. 가장 추운 바람과 싸우는 나무의 맨 바깥쪽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되 욕심 부리지 않고, 욕심조차 버리고 나아가다 제 몸 곳곳에서 꽃눈 트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린 잎새를 가지 끝에 내밀며 비로소 겨울을 봄으로 바꾸어 놓았을 것입니다. 봄도 그렇게 옵니다. 아주 작은 냉이꽃 한 송이나 꽃다지 한 포기도 그렇게 추위와 어둠 속에 그 추위와 어둠이 화두가 되어 제 빛깔의 꽃을 얻습니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가 혹독한 제 운명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발견하였을 때 사람들은 봄이 왔다고 말합니다. 발치 끝에 와 발목을 간지르는 어린 풀들을 보며 신호라도 하듯 푸른 잎을 내미는 나무들. 사람들은 그걸 보고 비로소 봄이 왔다고 말합니다. 그 나뭇가지 위로 떠났던 새들이 돌아오는 반가운 목소리가 모여 와 쌓일 때 비로소 봄이라고 말합니다. 추상명사인 봄은 풀과 나무와 꽃과 새라는 구체적인 생명들로 채워졌을 때 추상이라는 딱지를 떼고 우리의 살갗으로 따스하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