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다녀가셨다!」(시인 정끝별) 2009년 5월 25일_스무번째 '엄친딸'과는 촌수가 좀 먼 '내친딸'은 모 가수의 열혈 팬이다. 봄축제를 맞아 재직 중인 대학의 총학생회에서 모 가수의 초청공연을 기획했다. 그러나 나는 못 본 것이다! 그 날 그 시간이면, 내친딸은 마땅히 학원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이고, 며칠 전 모 가수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매일 밤 두 시간씩 작파하고 들어 대는 딸과 한판의 혈전이 있지 않았던가. 내친딸에게 이 소식을 알린다는 건, 불타는 가슴에 기름을 끼얹는 일! 그 날은 오게 마련이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내친딸은 내 방으로 직방했다. 내친딸이 어떤 딸인가. 오늘의 공연이 포착되지 않았을 리 없다. 내친딸은 급기야 눈물까지 주루룩 흘리며 '제발, 엄마, 이번 중간고사 국어 100점 맞았잖아". 이렇게까지 내친딸을 구차하게 해서야, 나는 또 졌다. 내친딸과 들어선 운동장은 인산인해였다. 흰색 밴에서 내리는 모 가수를 보자마자 내친딸은 '어떡해-' 탄식하며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자동반사였다. 두세 곡을 끝낸 모 가수가 무대 구석에 마련된 생수를 마시더니 남은 물을 관객을 향해 뿌렸다.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리고는 빈 생수병을 던졌다. 그런데, 그런데, 그 생수병이,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이 비상했고 생수병을 낚아챘다. 자동반사였다. 어디서 그런 힘과 순발력이 솟았는지 묻지 말라. 그때 나는 확인했을 뿐이다. 아이가 떨어지면 엄마가 정말 받을 수 있구나! 생수병을 내친딸에게 건네주는 내 마음이 어땠는지도 묻지 말라. 그때 나는 확인했을 뿐이다. 질투는 나의 힘! 내친딸은 빈 생수병을 신물(神物)처럼 품에 안고 또 다른 눈물을 주루룩 흘렸으니. 모 가수의 초청공연은 TV에, 인터넷에 마구 떠돌아다녔다. 특히 생수병을 던진 그 장면이! 초인적으로 날아 그 생수병을 잡는 내 모습은, 다행히, 카메라 밖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밤이었다. 내친딸 방에서 일찍이 들어 본 적 없는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모두 뛰쳐나와 무슨 일이냐 물었으나 대답조차 못하며 숨만 넘어가고 있었다. 재차 다그쳤을 때에야 "할머니가, 할머니가, 내 생수병을, 내 생수병을…" 그 날, 할머니가 다녀가셨다! 그러니까 그 날, 신물(神物) 생수병은 이미 쓸고 닦기 좋아하시는 할머니의 슬리퍼에 한번 꽉 밟힌 채 분리수거장에 들어가 다른 페트병들과 뒤섞여 있을 터였다. 그 밤 내내 내친딸은 분리수거장이 보이는 창가로 서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 밤 내내 나는, 내일 당장 저 창에 자바라 설치를 다짐했으며, 창으로부터 내친딸을 떨어뜨려 놓느라 안했어도 될 말까지 하고 말았으니, “대신 싸인 받아다 줄게, 꼬옥, 알았지, 응?” ■ 필자 소개 정끝별(시인) 1964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문학사상》신인 발굴 시부문에 「칼레의 바다」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94년 〈동아일보〉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2005년 현재 명지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근」(시인 김기택) 2009년 5월 22일_열아홉번째 김과장의 이마와 등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침인데다 에어컨에서 찬바람이 나와 시원해야 할 텐데, 전철 안에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온몸으로 열기를 뿜어 대니, 오히려 체온으로 에어컨을 데워 주는 꼴이었다. 사람들이 주위에서 빈틈을 남김없이 조여 오니 숨 쉬기가 거북했다. 승객들은 냉동박스에 든 동태처럼 네모난 모양의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서로 꽉 붙어서 따로 떼어 내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역에 정차해도 덩어리에서 떨어져나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철을 타려고 한두 사람이 필사적으로 그 덩어리 속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기가 질려 승차를 포기했다. “아유, 저 역에서 꼭 내려야 되는데, 못 내렸어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전동차가 출발한 후에, 누군가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그 정도면 행복하신 거네요. 나는 벌써 다섯 정거장이나 지나쳤어요. 도저히 내릴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그냥 계속 가고 있는 중이에요.” 여기저기서 와하하하, 키득키득, 낄낄낄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짜증과 불만과 비명과 한탄이 일시에 웃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나도 못 내리고 그냥 가고 있다'는 공감의 웃음도 있는 것 같았다. 김과장은 잔뜩 구겨진 양복을 애써 펴면서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꽉 찬 엘리베이터에 억지로 끼어 탄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출근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둘러보니 오늘도 역시 단골 지각대장 박대리 자리는 비어 있었다. 직원들의 얼굴엔 제각각 덜 풀린 숙취와 졸음과 피곤과 짜증이 그려져 있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박대리가 허겁지겁 땀을 흘리며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제가 오늘은 지각 안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평소보다 10분 일찍 집에서 나왔거든요, 그런데 내리려고 해도 항상 승객이 너무 많아서 못 내리는 지하철역이 있어요. 오늘은 단단히 벼르고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결사적으로 온몸을 비틀며 지랄발광을 해서 겨우 내리는 데 성공했어요. ‘야, 오늘은 드디어 지각은 면했구나.’ 하고 기분좋아서 뛰어가려고 하는데 뭔가 허전한 거예요. 그래서 돌아보니까 내 양복 윗도리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잖아요. 얼른 들어가서 양복을 꺼내는데 전철문이 닫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사방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배가 많이 나온 뚱보 이동보 씨가 한 마디 했다. “저는 오늘 지하철에서 어떤 여자한테 뺨 맞을 뻔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꽉 차서 숨 쉬기 곤란한데, 바로 앞에 있던 여자가 자꾸 도끼눈을 뜨고 날 쳐다보다가 이러는 거예요. ‘왜 자꾸 등 뒤에서 사람을 밀고 그래요!’ 나는 전혀 밀지 않았거든요. 정말 억울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한 마디 했죠. ‘아, 그럼 사람이 숨도 못 쉬어요?’” 숨 쉴 때마다 쑥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이과장의 풍만한 배를 보며 여기저기서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숙취도 졸음도 피곤도 짜증도 함께 배꼽을 쥐고 웃고 있었다. ■ 필자 소개 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영어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89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 『태아의 잠』과 『바늘 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등을 냈고, 『태아의 잠』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칠번출구」(시인 정끝별) 2009년 5월 21일_열여덟번째 문자가 날아왔다. “사호선○○○역칠번출구방의원입니다 031-383-××××”. 뭠미? 어젯밤 모임에서 만났던 지인이었다. 문자를 날렸다. “메시지잘못왔어유^^ 난아직도몽롱@@중인데 벌써또한껀을?^^”. 문자를 잘못 날린 지인이 갑자기 정다워졌다. 나만 잘못 날리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훈훈한 동지애로 화하는 찰나였다. 모처에 심사하러 갔을 때다. 소설 부문 심사위원으로 후배가 와 있었다. 부문별로 방을 달리해 진행되었기에 먼저 끝나면 문자를 날리기로 했다. 내가 먼저 날렸다, “우린끝!”. 심사 뒤풀이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선배 마누라로부터 부르르 부르르 진동이 계속 왔다. 식사를 끝내고 후배와 함께 나오면서 전화를 걸 때까지도 몰랐다. “우린끝!”이 후배가 아닌, 선배 마누라에게 잘못 갔다는 걸. 문제는 뜬금없는 ‘우린끝!’을 받은 선배 마누라. 상상력이 마구마구 발동하기 시작. 선배에게 득달같이 전화해 “혹시 당신에게 올 메시지 아냐?" 심문도 해보다 급기야 선배와 머리를 맞대고 아귀를 맞추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도 전화로. 결론은, 연애하는군, 그런데 싸웠나, 아니 헤어졌군, 이었단다. 그리고는 딱 걸렸으니 대란다, 누구였냐고. 아쉽게도(!) 선배 마누라가 후배를 아는 사이여서 전화까지 바꿔주며 버선목을 뒤집어 버리기는 했으나… 문자는 늘 짧게 마련이고, 선배 마누라가 후배와 이름이 비슷했다는 게 문제였다면 문제. 수신자 이름 입력 검색 중 커서가 한 칸 더 내려갔었나 보다. 뭐, 한두 번 일도 아니다. 시집을 낼 때였다. 추천의 글을 메일로 확인한 후 인쇄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오후가 다 가는데도 도통 기별이 없었다. 문자를 날렸다. "종일기다리다눈이빠질지경이야요@@". 느닷없는 스승뻘 소설가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기다려라달려간다칠번출구!" 아, 이건 또 뭠미? 어쨌든, 어젯밤의 지인에게 문자를 날린 직후였다. 어젯밤 모임에서 발모제 효과를 톡톡히 봤다는 지인이 십 년은 젊어 보며 그 연락처를 물었던 기억이 때늦은 전광석화처럼 떠올랐다. ‘속알머리’ 없는 나도 나려니와 ‘주변머리’까지 총체적으로 부실한 남편을 위해 물었던 것이다. 훈훈한 동지애가 싸늘한 열패감으로 화하는 찰나였다. 다시 문자를 날렸다. "아하^^ 헤어! 제가착각@@ 감솨-*_*" 금세 문자가 날아왔다. "병원이름이방이에요ㅋㅋ 즐모 성취하소서!" ■ 필자 소개 정끝별 (시인) 1964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문학사상》신인 발굴 시부문에 「칼레의 바다」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94년 〈동아일보〉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2005년 현재 명지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 부자(父子)가 사는 법」(소설가 한창훈) 2009년 5월 20일_열일곱번째 굳이 콤플렉스 관련 정신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버지와 아들은 갈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수컷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겹치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웃음 말고도 아버지의 존재라고 하니 (그 역사가 짧아서 그러겠지만) 부자간의 갈등과 경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한 아버지가 있다. 그는 어부이다. 이른 새벽 어장을 나가기 위해서는 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들은 술에 취해 늦게 들어왔다. 깨우긴 했는데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고 있는 몰골을 보고 있자니 화가 솟구친다. 하지만 한바탕 해 버리면 어장은 파산이다. 꾹 누르며 평소에 준비해 둔 말을 내뱉는다. “이런 말 너도 들어 봤을 것이다.” 무슨 소리냐며 아들은 고개를 든다. 눈은 아예 떠지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말 말이다. 먹고살려면 새고 사람이고 모두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들은 그 상태로 답한다. “그럼 그 벌레는요?” “......”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잡아먹힌 벌레는요?” “이 자식아, 그 벌레는 너처럼 술 퍼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놈이야. 그러니까 잡아먹히지.” 아들은 비로소 눈을 슬며시 뜬다. “그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새도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겠네요?” 아버지는 기가 찬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대응이 궁하다. 속만 끓어오른다. 교육의 창이 막힌 것이다. 한동안 이를 물고 있던 아버지는 소주병을 열고 밥그릇 가득 술을 부어 준다. “오냐, 술이 그리 좋다면 이 애비가 직접 따라 주마. 그동안 한잔도 못 준 거 한꺼번에 주는 것이니까 시원하게 마셔라.” 기세로 밀어붙이는 방법이 남았던 것이다. 숙취에 끙끙거리는데 어떻게 그 많은 소주를 마실 것인가. 잘못했습니다, 소리가 나오기를 아버지는 기다린다. 그런데 아들은 한동안 술 찰랑거리는 그릇을 바라보다가 정 그러시다면, 하고는 마신다. 아버지는 숨이 콱 막힌다. 사약 먹듯 간신히 들이킨 아들은 “저도 그동안 진심으로 술 한잔 못 올렸습니다, 사과드리는 의미에서 저도 한잔 올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 앞에 찰랑거리는 술사발이 놓인다. 자존심이 있지. 아버지는 마신다. 그리고 쓰러진다. 결국 아들이 아버지를 업다시피 하고 바다로 어장을 나간다. 협력의 전제조건은 갈등이다. 갈등이 소박한가 아닌가가 문제이다. ■ 필자 소개 한창훈 (소설가) 1963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다.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가던 새 본다』『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청춘가를 불러요』가 있다. 산문소설 『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 본다』와 장편소설『홍합』『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열 여섯의 섬』등이 있다. 동화 『검은섬의 전설』과 공동 산문집 『깊고 푸른 바다를 보았지』를 펴냈다. 제3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