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개의 노래」(소설가 김종광) 2009년 6월 9일_서른번째 그 똥개는 그 고장의 들개 두목으로서 오랜 세월을 군림했다. 인간들과 싸우느라 스트레스가 많았다. 호구산 꼭대기에 올라 노래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그 개의 주인이었던 여자가 ‘똥개의 노래’라면서 지어 준 노래가 있다. 조용필이라는 인간 가수가 부른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노(래)가(사)바(꾸기)’한 것이라고 했다. 똥개는 그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그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졌다. 한 번을 부르더라도 온 생애를 다하여 불렀다. 부르고 나면 마음에 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정상에 선 똥개를 본 일이 있는가? 인간과 끝없이 투쟁하는 호구산의 똥개! 나는 똥개가 아니라 천연기념물 개이고 싶다. 어디에서나 대접받는 태평천국의 그 천연기념물이고 싶다. 싸우면서 위대해지고 지도하면서 강건해지는 나는 지금, 호구산의 제일 꼭대기에서 울고 있다. 살의 찬 인간의 그 불빛, 어디에도 개는 없다. 이 큰 인간세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살아남으니 부끄럽도다! 나보다 먼저 죽은 똥개들의 피가 마르지도 않았다! 바람처럼 왔다가 보신탕으로 갈 순 없잖아! 우리 개들이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갈비 수육으로 가뭇없이 먹혀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싸우려고 애썼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똥개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개로 사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개로 사는 것을 위안해 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건 우리 개들의 투쟁 때문이다! 투쟁이 똥개들을 얼마나 개답게 만드는지 인간들은 모르지. 투쟁만큼 개가 위대해진다는 걸 모르지. 인간들은 개고기를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 개들은 사람고기를 먹지 않는다. 인간들은 보신탕을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 개들은 사람탕을 본 적도 없다. 인간들은 애완견을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 똥개들도 애완견처럼 사랑받고 싶다. 그리고 또 우리 개들은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우리들의 이념! 애완견과 똥개를 차별하지 마라! 모든 개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라! 투쟁이 살벌한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살벌한 거야! 투쟁도 사랑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살벌한 거야! 투쟁이란 실패가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투쟁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투쟁했다 할 수 있겠지. 아무리 강고한 인간세상이라 할지라도 나는 한 마리 똥개로 남으리. 인간만 활개 치는 땅일지라도 나는 한 가닥 불타는 똥개가 되리. 인간의 군홧발이 초목을 휩쓸어도 꺾이지 않는 한 마리 똥개 되리. 우리 개들이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우리 개를 원했기 때문이야! 공존인가 전쟁인가 저 많은 인간들! 최후까지 우리 똥개는 가리! 이빨을 곧추세우고, 길에서 만나는 동지와 악수하며, 최후까지 싸우다 죽는 넋이 되리! ■ 필자 소개 김종광(소설가) 197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98년 계간 《문학동네》에 단편 소설 「경찰서여, 안녕」이, 2000년 《중앙일보》신춘문예에 희곡 「해로가」가 각각 당선되었다. 소설집으로 『경찰서여, 안녕』『모내기 블루스』『짬뽕과 소주의 힘』『낙서문학사』가 있으며, 장편 소설로는 『71년생 다인이』『야살쟁이록』이 있다. 대산창작기금, 신동엽창작상을 받았다.
「친구를 찾습니다」(소설가 한창훈) 2009년 6월 8일_스물아홉번째 중년에 접어들면서 예전 친구들이 생각나곤 합니다. 요즘은 무엇을 하는지, 자식들은 어떻게 자라는지, 큰 병이나 앓고 있지는 않는지 궁금하죠. 간혹 보기도 하고, 못 본다 하더라도 그럭저럭 근황을 듣기는 하는데 그중에는 전혀 소식을 모를 친구도 있게 마련입니다. 저에게는 인규라는 친구가 그렇습니다. 인규는 고등학교 때 친구였습니다. 일생 중에서 가장 감정적이고 불안한 시기를 함께 보냈으니 유난히 추억거리가 많죠. 서로의 자취방을 숱하게 오가며 라면 끓여먹고 팔씨름도 하고 술에 취하면 쓸쓸한 노래도 함께 불렀습니다. 담양에 있는 그의 집에서 딸기밭 갈고 소똥도 같이 치웠죠. 심지어 낭인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던 20대 초반, 지쳐 버린 저는 한동안 그의 자취방에서 밥 끓여먹으며 지내기도 했습니다. 만나면 반갑고 떨어지면 서운하고 못 보면 엉덩이가 근질근질한 그런 사이였죠. 저는 20대 후반에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한 시절 또 떠돌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를 만났죠. 졸업반 취업 준비 중이던 그는 내 몰골을 보더니 혀를 차며 식당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토플, 공무원 시험, 기업의 면접 형태 따위가 자꾸 나왔죠. 내가 심드렁하자 따지듯 물어 왔습니다. “너는 임마, 도대체 어떻게 살려고 아직도 이 따위로 돌아다니는 거냐.” 나는 소설가가 되겠노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피싯, 피싯 웃었습니다. “소설가가 된다고?” “그래.” “소설가 다 뒈졌는갑다. 개나 걸이나 다 소설가 되는 줄 알어.” “왜, 나는 소설가 되면 안 되냐?” 가소롭다는 얼굴을 하던 그는 별안간 열 손가락을 쫙 펴보였습니다. “뭔데?” “니가 소설가가 되면 이 열 손가락 모두 장을 지진다.” “정말?” “걱정 말고 돼 보기나 해라.” 득의만만한 웃음은 쉬 떠나지 않았는데 그게 마지막으로 본 거지 뭡니까. 오래 전 통화가 한두 번 되었는데 첫 번째 소설집이 나온 뒤로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이 친구를 찾습니다. ■ 필자 소개 한창훈(소설가) 1963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다.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가던 새 본다』『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청춘가를 불러요』가 있다. 산문소설 『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 본다』와 장편소설『홍합』『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열 여섯의 섬』등이 있다. 동화 『검은섬의 전설』과 공동 산문집 『깊고 푸른 바다를 보았지』를 펴냈다. 제3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그녀 생애 단 한 번」(소설가 정미경) 2009년 6월 5일_스물여덟번째 이 비행기는 이미 출발했는데요? K는 발권 코너 남자의 푸른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얘가 무슨 소리야, 시방.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요? 남자가 볼펜으로 티켓에 적힌 숫자를 톡톡 쳤다. 오늘 날짜가 적혀 있고 그 뒤에 0030이라고 적혀 있는 그 부분을 새삼스럽게 쳐다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니까, 이 비행기는 오늘 새벽 0시 30분에 이미 출발한 것이었다. K가 착한 남자랑 결혼한 건 사실이다. 남편은 짧게 한숨을 쉬었을 뿐, 단 한 마디도 힐난을 하지 않았다. 뒤늦은 비탄과 자책으로 10분을 보내고서야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K가 인터넷을 뒤져 더 이상 쌀 수 없다며 의기양양하게 예약한 티켓은 싼 대신, 예약 변경이나 환불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100만 원짜리 두 장. 200만 원이 간단히 사라졌다.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남자가 스케줄 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번 비행기에 이코노미석이 하나, 일등석이 딱 한 장 남아 있네요. 이후 일주일 동안 한국행 비행기는 남은 좌석이 하나도 없어요. 일등석은 편도에 500만 원입니다. 남자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듯 K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름방학이 막 끝난 주였다. 남편이나 나나 늦어도 모레는 학교에 출근해야 했다. 일주일이나 휴강했다간 알량한 시간강사 자리마저 위태로웠다. 게다가 일주일치 호텔비와 식비를 합하면…. 카드를 내미는 K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탑승구 앞에서 다시 약 5분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K는 혈압이 말썽인 남편에게 일등석으로 가라 했고 남편은 신우염이 채 낫지 않은 K가 그 쪽으로 가야 한다고 우겼다. 비행기가 지연되고 있다는 방송이 나오고서야 K가 떠밀리듯 일등석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하고부터 K는 울기 시작했다.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파산이다. 500만 원으로 할 수 있는, 하고 싶었으나 참아야 했던 것들의 리스트가 태평양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예쁜 여승무원이 울고 있는 K를 내내 지켜보아 주었다. 기내식이 나왔지만, 번번이 손만 내저었다. 뼈가 쏙쏙 저렸다. 내리 세 시간을 울고 났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500만 나누기 12는? 시간당 41만6,666원. 벌써 4분의 1이 날아갔잖아. 눈물을 뚝 그쳤다. 앞 포켓에 꽂힌 메뉴판을 꺼내 펼쳐보았다. 트뤼플을 곁들인 프로방스산 치킨. 푸아그라가 토핑된 메로구이. 하몽으로 감싼 멜론. 와인은 그랑크뤼급 2001년 보르도산. 그렇다면 아까 울고 있을 때 눈앞을 오가던, 번쩍이는 은쟁반에 놓인 것들이 평생 소문으로만 들었던 송로버섯과 푸아그라와 기가 막힌 와인이었단 말인가. 울음 그친 걸 귀신같이 알아챈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무얼 좀 갖다 줄까 물어 보았다. 설거지까지 끝난 마당에 밥 달라고 할 수 없어 라면이나 한 그릇 갖다달라고 했다. …얘기를 마치고 긴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물었다. “라면은 먹었어?” “먹었어.” 귀여운 K. 너무 속상해하지 마. 500만 원짜리 라면 아무나 먹나. ■ 필자 소개 정미경(소설가) 1960년에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폭설」이, 2001년 <세계의 문학> 소설 부문에「비소 여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장밋빛 인생』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2006년『밤이여, 나뉘어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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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이기분」(소설가 김종광) 2009년 6월 5일_스물일곱번째 난 이씨 성에, 이름자가 ‘기분’이야. 터 기(基) 자에 가루 분(粉). 국민학교 시절, 동무들은 툭하면 ‘아, 이 기분!’, ‘기분이 좋아!’ ‘기분아, 기분이 꿀꿀해!’ 해댔지. 내 별명이 ‘눈물순이’, ‘울탱이’였는데, 십중팔구는 이름 때문에 눈물 흘리고 엉엉 운 거였어. 딴에는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 무식한 것들, 이 한자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 근동에서 가장 많이 배운 우리 아빠가, 서울에서 전문대학 근처까지 다녔던 우리 아빠가 특별히 신경 써, 아마도 ‘꽃가루가 분분하게 흩날리는 아름다운 터 같은 사람이 돼라’는 바람을 담아 작명해주신 것을, 자 자, 희 자, 경 자, 숙 자, 수 자, 식 자, 호 자… 자 자 돌림밖에 안 되는 것들이 무시하고 지랄들이야, 하고 속으로는 당당했던 거지. 한데 꽃가루보다는 쌀가루에 가까운 가루 분 자였던 거야. 막연히 꽃가루 분 자로 알고 있다가 한참 실망했던 기억이 나.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역시 좋은 이름이었어. ‘쌀가루가 언제나 흩날리는 풍족한 터처럼 부유한 사람이 돼라’는, 요새 말로 하면 ‘부자가 돼라’는 거 아니겠어. 꿈보다 해몽이었지. 부르는 사람들이야 그런 거 생각하나. 기분이란 이름을 들으면 일단 웃음을 머금었고, 남의 이름 가지고 장난말 할 생각이나 했지. 그러나 돌이켜보면 국민학교 때가 이름이 가장 빛날 때였어. 그때는 이름을 무시로 불러 주는 동무들이 있었지. 국졸로 학창 시절을 마감한 이후로는 이름 불러 주는 사람이 없었어. 열여섯 살 때인가 어떤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읽고 펑펑 울었던 게 생각이 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시구는,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으니 나는 다만 하나의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처럼 느껴졌어.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라는 시구에서는 철철 울었지. 제발 ‘누가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지. 엄마, 아빠조차도 이름을 안 불러 줬거든. “야!”, “이 년아!”, “첫째야!”, “처녀!”, “십장네 딸내미야!”가 전부였지. 스물두 살에 결혼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어. “이봐!” “새댁!”, “작은 엄마!”, “엄마!”, “광이 엄마!”, “라원리 댁”이 전부였지. 하지만 이름이 사라졌던 건 아니야. 난 노상 병원 출입을 하게 되었는데, 그 약냄새 진동하는 곳에서 잠깐이나마 이름을 되찾고는 했지. 또 마흔 넘어서부터는 농협과 우체국에 계좌를 갖게 되면서 이름이 불리게 됐어. 병원 사람들과 농협, 우체국 사람들은 언제나 이름을 불러 주대. 또 동무들하고 계를 하면서부터는 한 달에 한 번 내 이름에 광을 냈지. 특히 저번 중국 나들이 4박5일 동안, ‘이기분’이라는 내 이름은 원없이 불려 봤네. 동창애들이 다들 처음 하는 구경 아냐. 어디를 가도 보는 것마다 좋았을 것 아니야. 좋다는 표현을 달리 할 수도 있을 땐데, 애들이 하나같이 “기분좋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워낙 아픈 데가 많았고 특히 다리가 아픈데, 내가 과연 중국 관광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웠어. 삼일째까지는 괜찮았어. 그것도 다른 애들 높은 데 먼 데 갔다 올 동안 나는 차 안에서 혼자 기다리면서 조금 걸어서 그나마 괜찮았던 거지만. 그런데 마지막 날은 조금도 걷지를 못했어. 그러니 동무들 열여섯이 돌아가면서 “기분아, 괜찮냐?”라고 해 대니, 아주 내 이름이 반짝반짝 빛났다니까 ■ 필자 소개 김종광(소설가) 197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98년 계간 《문학동네》에 단편 소설 「경찰서여, 안녕」이, 2000년 《중앙일보》신춘문예에 희곡 「해로가」가 각각 당선되었다. 소설집으로 『경찰서여, 안녕』『모내기 블루스』『짬뽕과 소주의 힘』『낙서문학사』가 있으며, 장편 소설로는 『71년생 다인이』『야살쟁이록』이 있다. 대산창작기금, 신동엽창작상을 받았다.
「스페인 유모어」(시인 민용태) 2009년 6월 4일_스물여섯번째 우리는 노래로 밤을 지새우지만 스페인이나 중남미 라틴계 사람들은 서로 유모어 들려 주기로 밤을 새운다. 스페인 유모어에는 잘하는 사람이 따로 없다. 더러 입담이 좋아 인기 있는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손짓 발짓 써가며 웃음을 퍼내기로는 울려도 순서도 없다. 소리 크고 입 크면 단연 주인공! 스페인 작가 고메스 세르나는 마드리드 유모어의 특징으로 “팝콘처럼 팍팍 터지는 웃음 도구”라는 말을 한다. 영국 유모어처럼 씹고 되씹어 봐야 웃음이 나는 "블랙 유모어"가 아니다. 들으면 금방 웃음이 터지는 “팝콘” 같은 웃음 장치란다. 그렇다고 물론 스페인이나 중남미에 깊고 고상한 유모어가 없는 건 아니다.예를 들어, "인생이란 무엇인가?" 해답은 "산파가 장의사에게 보내는 소포!" 어떤가? 그냥웃고 넘기기에는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그러나 역시 팝콘 같은 유모어가 스페인식이다. 스페인 어나 불어로 "뚜, 뛰tu)" 하면 "너"라는 뜻이다. 한 학생이 여학생에게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계속 통화 중이다. 신경질 난 학생이 참다 못해 전화통에 분풀이를 한다 : "이 병신 같은 전화가…" 그때 떨어진 전화기가 신호음을 낸다 : "뚜, 뚜, 뚜… (너, 너, 너야… 병신은)" 구라파 어디나 그렇지만 스페인에서도 주말이나 너도 나도 없이 모두 시가지 밖 야외로 나간다. 고속도로마다 나가는 차들이 붐벼서 곳곳마다 병목이다. 이럴 때일수록 차 뒷좌석에 있는 아이녀석들은 답답해서 더 미칠 지경이다. 괜시리 운전하고 있는 아빠에게, "빠빠, 삐삐, 삐삐…"하면서 조른다. 스페인어로 "삐삐(pipi)는 아이들 말로 오줌 눈다는 뜻. 이 말은 아이들 말로 "아빠, 나 쉬 마려, 쉬…"라는 소리.운전하다가 성질이 날 대로 난 아빠는, "까야오스(시끄러!)!" 소리친다.길이 꽉꽉 막혔는데 지금 쉬할 데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고속도로에서 한참 고생을 한 뒤에 마침내 시골길로 들어선다. 지금까지 아버지 꾸지람에 말도 못하고 뒷구석에 박혀 있는 아이들에게 드디어 사면이 주어진다 : "그래, 여기는 한가하니까 아무데서나 가 누어!" 그 말에 쏜살같이 뛰어나간 아들 딸아이가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길에다 실례를 한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큰 짐차가 달려오다가 길 한가운데서 실례를 하고 있는 이들을 발견하고 클랙슨을 누른다 : "삐삐이, 삐삐…" 이 소리를 듣고 아직 일을 덜 끝낸 딸아이가 두 손으로 뒷치마를 움켜쥐고 쪼그려 앉아 말한다 : "삐삐, 노. 까까…" 여기서 "까까(caca)"는 아이들 말로 "똥눈다"라는 뜻이다. 클랙슨의 "삐삐…" 소리를 "너 오줌 누니?"로 들은 딸아이, 천진하게 치마를 움켜쥐고 급한 현 상황을 알렸던 것. 우선 천진한 그 여자아이의 다급한 모습을 상상해보라 : "삐삐, 노! 까까…" 이런 말 때문에 처음 스페인을 찾은 우리 교포 아주머니가 백화점에서 혼쭐이 난 일이 있다. 여자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 우연히 과자점들을 지나게 되었다. 우리 여자아이가 과자가 먹고 싶어 엄마에게, "엄마, 까까, 까까…" 하며 졸랐다. 시간이 바빠 미처 딸아이의 요구를 들어 줄 겨를이 없던 엄마는 뜻밖의 황당한 일을 당해야 했다. 백화점의 여직원들이 갑자기 그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달아났던 것. 소리 소리지르며 내 아이 내놓으라고 여직원들을 붙들고, 여직원들은 여자아이를 억지로 화장실로 끌어가고… 이미 앞에서 배워서 알겠지만, 스페인 어로 "까까"는 "똥 마려워!"이다. 우리 아이는 과자가 먹고 싶다고 "엄마 까까…" 했지만, 여직원들 귀에는 "맘마, 까까…(엄마 똥 마려워)"로 들렸던 것. 이 매정한 동양 어머니가 딸 똥 마렵다는 소리도 못 들은 척 쇼핑만 하니까 여직원들 스스로 긴급 동원령을 발동한 것. ■ 필자 소개 민용태(시인) 1943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한국외대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페인 메넨데스 펠라요 국제대학, 한국외대, 고려대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고려대 명예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