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다만, 다만 ‘사이시옷’ 규정을 아시는지? 두 단어가 만나 새 단어가 생길 때 뒤에 오는 단어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바뀌거나 ‘ㄴ’ 소리가 덧날 때 ‘ㅅ’을 붙인다. 그래서 ‘바닷가’, ‘나뭇잎’이다. 이 규정에 맞게 쓸 조건을 보자. 먼저, 두 단어의 출신 성분을 알아야 한다. ‘고유어+고유어’, ‘고유어+한자어’, ‘한자어+고유어’일 때만 적용된다. ‘한자어+한자어’에는 쓰지 않는다. [화뼝], [대까]라 해도 ‘화병(火病), 대가(代價)’이다. 다만, 다음 단어는 한자어인데도 예외. ‘곳간, 셋방, 숫자, 찻간, 툇간, 횟수’. 이유도 없다. 외우라. 게다가 해당 조항을 ‘두 음절로 된 한자어’라 한 게 더 문제다. ‘세 음절’이면 적용이 안 된다. 그래서 ‘전세방’은 ‘ㅅ’을 못 쓴다. ‘전셋집’은 ‘집’이 고유어라 사이시옷! 모아놓으면, ‘셋방, 전세방, 전셋집, 사글셋방, 월세방, 월셋집’(아, 헷갈려). 다른 규정과 섞어보자. 수컷을 이르는 접두사는 ‘수-’이다. ‘수나사, 수놈, 수소’라고 써야 한다. ‘숫나사, 숫놈, 숫소’는 틀린다. 다만, 다음 세 단어는 ‘숫-’으로 한다. ‘숫양, 숫염소, 숫쥐’. 법은 법, 그냥 외우라. 이 세 동물만 ‘숫-’을 쓰고, 다음 단어들은 발음 불문하고 ‘수-’를 쓴다. ‘수여우, 수지네, 수제비’(와우). 학생 중 열에 아홉은 잠이 든다. 법은 단순할수록 좋다. ‘위험한 일을 시키면 처벌한다. 다만, 50인 미만 3년 유예, 다만, 5인 미만 사업장은 제외, 다만 공무원은 제외.’ 더불어민주당은 사회를 안전하게 바꿀 기회를 ‘다만’으로 걷어찼다. 뒷담화 일종의 중독증이자 ‘인간적’ 성향. 끊기 쉽지 않다. 우리는 말을 통한 협력을 좋아하기 때문에 뒷담화를 즐긴다. 눈치 보지 않고 누군가를 통쾌하게 ‘씹을’ 수 있다면 기쁘지 아니한가. 십중팔구 선행보다 악행을 ‘씹게’ 되는데 유익한 면이 없지 않다. 자리에 없는 사람이 행한 각종 나쁜 짓을 다루기 때문에, 집단의 윤리적 기준을 재확인할 수 있다. 무릇 평범한 사람들은 이기심, 무례함, 비열함, 뻔뻔함, 폭력성, 부패를 반대한다. 뒷담화는 이런 기준을 어긴 사람에 대해 말로 내리는 징계이다. 뒷담화를 까는 동안, 우리는 누구보다도 ‘윤리적 존재’로 승화된다. ‘나 아직 걔처럼 안 썩었어!’ 남 씹으며 거룩해지기. 유명인에 대한 뒷담화야 ‘수다’ 차원에서 끝나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에 대한 뒷담화는 다르다. 관계를 규정하고 구성하는 직접성이 있다. 게다가 말하는 이가 연루된 얘기라면 더욱 열을 올리게 된다.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평가를, 자신에 대해서는 변호를 해야 한다. 일인이역은 뭐든 바쁘다. 총알이 당사자를 맞추지 못하니 본인이 내상을 입기 십상. ‘당사자 부재’라는 상황은 뒷담화의 결과를 예상하기 어렵게 만든다. 부풀었다가 이내 터지는 풍선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면 사라지는 걸로 보이지만, 자기 확신이 강화되고 분심만 쌓일 뿐. 사람을 소외시키는 배제의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부조리가 심한 곳에서는 약자 사이의 위안과 유대감을 확인하는 통로이자, 악행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성숙한 인간 되기는 이 피할 수 없는 ‘뒷담화’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양하편" 이양하(1904~0963) 영문 학자, 수필가, 평남 강서 출생. 일본 도쿄 제대 영문과 졸업. 서울대 문리대학장 역임. 영국의 정통과 수필을 도입하여 김진섭과 함께 서구적 본격 수필의 기초를 다졌다. 시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깊은 사색의 세계를 영탄에 가까운 정서로 노래한 시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신록 예찬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마산에 녹엽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 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오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 이래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놓은 듯이 옷을 훨훨 떨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자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오고 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하여 주고, 또 나 자신도 하루 동안에 가장 기쁜 시간을 이 자리에서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 있는 때마다 나는 한 특권이나 차지하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을 떠나 고고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은 이 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라도 우렁차게 터져 나와, 산과 들을 흔들 듯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동무가 있고,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사람이란-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 칠정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데 마음에 영일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 또는 한 잡음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서,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가지로 숨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말하자면, 나는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에도 신록이다. 주객 일체, 물심 일여라 할까, 현요하다 할까, 무념무상, 무장무애, 이러한 때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스럽고, 또 이러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도 없고, 심정의 고갈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의 유열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과 모든 우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모든 상극과 갈등을 극복하고 고양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는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이 없다. 가장 연한 것에서 가장 짙은 것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고 시 움과 어린 잎이 돋아 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한다면, 삼복 염천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 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 시대는 신록에 있어서 불행히 짧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2, 3주일을 셀 수 있으나,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 4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하고 겸허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지지 아니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고귀한 순간의 단풍 또는 낙엽송을 보라. 그것이 드물다 하면, 이 즈음의 도토리, 버들, 또는 심산에 있는 이름 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그의 청신한 자색, 그의 보드라운 감촉, 그리고 그의 그윽하고 아담한 향훈, 참으로 놀랄 만한 자연의 극치의 하나가 아니며, 또 우리가 충심으로 찬미하고 감사를 드릴 만한 자연의 아름다운 혜택의 하나가 아닌가?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2.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라 열렬하게 믿어라 - 레이몬드 R. 10일 야간 '목표달성 코스'의 첫날, 그녀는 우리에게 검정색 공책을 나눠주며 말했다. "여러분의 목표를 한 가지만 쓰세요." 그리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좋아요, 이제 한 가지를 더 쓰세요." 이런 식으로 10분 동안 계속되자, 우리는 약간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 그녀가 말했다. "다시 한 가지를 더 쓰세요." 그렇게 장장 세 시간이나 계속 되었다! 그녀가 한 말은 고작 '목표를 쓰세요,' '한 가지를 더 쓰세요,' '더 이상 쓸 게 없다고 생각을 버리고 그냥 계속 쓰세요'가 전부였다. 무려 세 시간씩이나! 끝마칠 시간이 되자, 그녀가 말했다.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목표를 한 가지 쓰시되, 이번에는 특별한 것으로 정하세요. 이제 여러분은 마법의 지팡이를 휘둘러서 원하는 것을 뭐든지 쓰실 수 있어요. 하지만 법에 저촉되는 목표는 안됩니다. 자연의 이치에 역행해서도 안돼요. 그리고 현실적인 조건에 부합되는 것도 안돼요. 그저 여러분이 마법의 지팡이를 갖고 있다고 상상하세요." 나는 이미 세시간이나 목표를 썼지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돈과 건강, 인간 관계와 여행 등이 전부였다! 나는 이미 세시간이나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법에 저촉되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지? 좋아, 나는 아름다운 나체의 여성들이 득실거리는 집에서 살고 싶어." 참, 부끄럽지만 나는 그렇게 썼다. 이후 십년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당시 내가 썼던 소원은 그것이었다. 나는 이미 세시간이나 마음 밑바닥까지 샅샅이 훑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떠올렸기 때문에 막판에 그 소원이 뇌리를 스쳤다. 지도 강사인 산드라가 말했다. "우리는 일주일 후 다음 시간에 만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즈음, 여러분이 가장 마지막으로 썼던 소원이 이루어져 있을 거예요." 강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헐떡거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나는 큰 충격을 받을 채 강의에 출석했다. 나는 그 주에 훗날 나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카를라를 만났었다. 우리는 데이트를 나갔고, 나는 그녀에게 홀딱 반한 나머지 그녀의 집에서 밤을 보내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녀는 승낙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녀의 두 딸이 알몸으로 그녀의 침실로 뛰어 들어왔다. 당연히 카를라도 나체로 옆에 내 옆에 누워 있었다. 나는 말했다. "맙소사, 내가 아름다운 나체의 여자들로 가득한 집에 있네." 그 미녀 중 두 사람은 각각 두 살과 네 살이었다! 내가 소망을 철저하게 세분화하기를 잊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수업에 참석했다. 지도 강사가 말했다. "여러분 중에서 전 시간에 마지막으로 썼던, 특별하고 법률에 저촉되지 않은 소망을 기억하시는 분은 손을 드세요. 그리고 그 소망이 지난 주에 이루어졌던 분, 손드세요!" 전 수강생의 1/4에 해당하는 15명이 손을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이런 예를 전에도 무수히 많이 봤어요. 여러분이 썼던 마지막 소원은 항상 실현되었어요. 그 이유는 내가 교사이고, 내가 완벽한 확신을 가지고 그 소망이 실현되리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원하시면 얼마든지 의심을 품도록 하세요. 나는 그저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하는 바입니다." 당연히 지난 주에 그녀의 말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강생의 1/4이 소원을 이뤘다니.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서 그들의 성취된 소원을 말하기 시작하자, 우리는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10%의 수입 증가를 원했다. 그들은 평범한 사회 복지원이나 교사인데도 60피트 요트를 원했다. 그런데 그 주일에, 얼굴도 모르던 친척이 죽으며 60피트 요트를 유산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드라가 못 박았던 단서를 떠올리며 입을 떡 벌렸다. "지구의 중력이나, 자연의 이치에 역행하는 소원은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그에 이어 그녀는 더욱 충격적인 말을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났던 이유는 여러분이 내 말을 믿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질문했다. "산드라, 가령 당신이 다른 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 말했더라도, 우리 중 1/4이 그것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럼요! 나는 가끔 여러분의 31번째의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말한답니다." 우리는 일제히 공책을 펴고 각자 31번째의 소원을 읽었다. 그 외에 다른 행동은 불가능했다. 우리는 넋 나간 사람들마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개중에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산드라는 우리에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하고 말했다. 거기에는 아무 규칙이나 제한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법자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강력하게 재창조할 수 있다는 편이 옳다. 믿는 것은 뭐든 가능하다는 편이 옳다.
Board 추천글 2022.09.05 風文 R 1634
차별금지법과 말 수영 강사에게 가장 가르치기 고약한 학생은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새로 배우기보다 이미 몸에 밴 동작을 고치는 게 훨씬 어렵다. 말도 그렇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때 쓰기도 했고 여전히 쓸 수도 있지만, 이제는 여러 윤리적인 이유로 쓰지 않는 말들’을 공유하자는 취지다. ‘확찐자, ○린이, ○○다움, 미성숙, 상남자, 장님, 벙어리, 병맛, 여배우, 아줌마, 정신연령, 암 걸릴 뻔했다, 어린애같다, 여자같다, 사춘기냐, 이래서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해.’처럼 다양하다. ‘건강하세요’나 ‘투병’(鬪病), ‘성적 수치심’, ‘결정장애’는 생각지도 못했던 예이다. 신분증을 받고 음성해설 기기를 빌려주는 알바를 한 청년은 한 어린이한테 ‘신분증이 있어야 하는데, 부모님과 같이 왔냐’고 물었다가 보육원 교사와 함께 온 걸 알고, 그때부터 부모 대신 보호자나 어른이라는 단어를 쓰게 됐다고 한다. 차별금지법은 성별, 연령, 장애, 성적 지향, 인종, 종교 등을 이유로 한 모든 차별과 혐오를 금지하는 평등법이다. 법 제정을 주장하는 이들이 ‘말’의 문제를 함께 다루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차별은 법 이전에 말과 닿아 있는 낱낱의 삶과 경험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차별은 날마다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관철된다. 가장 흔한 흉기는 말이다. 그러니 내 말에 대한 관찰과 발견의 과정이 필요하다. 차별과 혐오가 그랬듯이 ‘모두를 위한 평등’도 말에서 출발한다. 시간에 쫓기다 비극은 시간을 분리하면서 시작됐다. 죽음의 공포는 시간이 무한히 뻗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간의 무한성과 인생의 유한성. 결국 우리는 죽는다!(아, 무서워.) 반면에 공간의 무한성 앞에서는 안 떤다. 달에 못 가도, 뛰어봤자 금방 땅에 떨어져도 절망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과거와 현재만 있고 미래는 없다. 있어도 현재 벌어지는 사건이 이어지는 2~6개월 정도의 가까운 미래다. 무한한 미래라는 관념이 없다. 생명보험이나 종교가 잘될 리 없다. ‘씨 뿌릴 때, 소 꼴 먹일 무렵’처럼 사건이나 자연현상과 함께 표현될 뿐이다. 문명사회는 시간을 별개의 사물인 것처럼 객관화시키고 여러 유형의 표현을 만들었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진 직선 위를 움직이는 사물이다(‘시간이 간다, 온다, 흐른다’). 우리는 이 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보내기도’ 한다. 시간은 원처럼 거듭된다(‘봄이 돌아왔다’). 사물화하자 양이나 부피, 길이를 갖게 된다(‘시간이 많다, 적다’, ‘있다, 없다’, ‘시간을 늘리다, 줄이다’). 근대사회는 시간을 화폐로 대한다. 자본주의는 시간의 화폐화로 작동된다.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아끼고, 벌고, 절약해야’ 한다. 아무리 ‘쪼개어 써도’ 우리는 시간에 ‘쫓긴다’. 일정으로 꽉 찬 삶은 분쇄기에 빨려 들어가는 종이처럼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은 없애야 할 적이다. 강도에 쫓기듯 시간에 쫓기는 삶에, 시간에 쫓기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노동에 어찌 구원이, 해탈이, 해방이 찾아올 수 있겠나.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양주동편" 양주동(1903~1977) 시인, 국어 국문 학자. 호는 무애. 경기도 개성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문학 박사. 일찍이 향가의 해독에 큰 공격을 세운 바 있으며, '국보'라는 별명과 함께 변설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지적이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수필이 많으며 문장은 건축감이 있어 선명한 인상을 준다. 벌판 다 한 곳이 청산인데,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네. 나는 이 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종시 역설하여 왔거니와, 그 즐거움의 흐름은 왕양한 심충의 바다에 도달하기 전에, 우선 기구, 간난, 칠전팔도의 괴로움의 협곡을 수없이 경과함을 요함이 무론이다. 깊디 깊은 진리의 탐구나 구도적인 독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심상한 학습에서도 서늘한 즐거움은 항시 '애씀의 땀'을 씻은 뒤에 배가된다. 비근한 일례로, 요새는 그래도 스승도 많고 서적도 흔하여 면학의 초보적인 애로는 적으니, 학생 제군은 나의 소년 시절보다는 덜 애쓴다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야말로 한적 수백 권을 모조리 남에게 빌려다가 철야, 종일 베껴서 읽었고, 한문은 워낙 무사 독학, 수학조차도 혼자 애써서 깨쳤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하였을까마는, 독서 연진의 취미와 즐거움은 그 속에서 터득, 양성되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끝으로 소화 일편-내가 12, 3세 때이니, 거금 50년 전 일이다. 영어를 독학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로 삼던 나에게는 칼라일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 문법 설명의 '삼인칭 단수'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 백편 의자현'이란 고언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항목만 자꾸 염독하였으나, 종시 '의자현'이 안 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에 들어가 보통 학교 교장을 찾아 물어 보았으나, 그 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히 젊은 신임 교원에게 그 말뜻을 설명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 날, 왕복 60리의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일인칭, 너는 이인칭,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이다 삼인칭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