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효석편" 이효석(1907__1942) 소설가.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숭실 전문 학교 교수 역임.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주옥 같은 단편 소설을 썼던 이효석은 수필에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간결체 문장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영화 수업 제한에서 오는 양화 결핍으로 말미암아 요사이 거의 어느 상설관에서나 한 번 상영했던 영화의 재상영을 번번이 본다. 여간한 예술품이 아니고는 두 번 이상 감상하고 싶은 흥이 솟지 않는 것이나 영화의 감상은 짧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 한 번 기억에 남았던 일편에는 식욕이 동하지 않는 바도 아니어서 두 번째 보러 간다. 그러나, 세상에 좋은 영화라는 것은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다. 대개는 처음에 느꼈던 감흥이 반감되고 품고 있던 아름다운 환상까지 도리어 부서져 버리고 마는 것이 통례다. 한절 한절의 컷의 구성에는 간혹 치밀한 수법과 자연스러운 연기가 보여 그 이상의 표현 방법은 없으리라고 감탄되는 대목도 있으나 전체로 흠이 보여 오고 결함이 드러나게 되어 겨우 이 정도의 영화였던가 하고 환멸을 느끼게 된다. 감독과 연기자들이 인생을 여실히 그려 내겠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눈물겨운 노력을 하나 나타나는 화면이--불과 몇 센티 평방의 셀룰로이드 딱지가 종시 말 안 듣는 것이다. 연기의 부족으로 허덕거리는 장면을 대할 때는 꾸며 놓은 세트 장치 앞에서 상을 찡그린 감독이 메가폰으로 고함을 치며 삼군이 아니라 삼문 배우들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가엾게도 귀에 들려 오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배우뿐만 아니다. 참으로 감독자 자신의 두뇌와 천분에 더 많이 달렸으니 그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고 연기자에게 가르쳐 주는 표정과 동작이 과연 진실을 포착한 것이어서 만인을 똑같이 감동시켜 줄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슈탄벅이나 크레엘이나 듀비베가 아무리 능청맞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각각 한 개의 형이 있는 것이요, 결국 자기류의 발휘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개성의 조작이니 그것으로 족할지 모르나 문제는 그 자기류로서 어느 정도 리얼리티를 잡았고 보다 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여간한 천재를 가지지 않고는 벌써 현대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게 되었다. 한다하는 천재도 까딱하다가는 일개 무명의 관객에게 뜀을 받고 계발을 입게 될는지 모른다. 거리의 구석구석에 할거하고 있는 군웅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그래도 가장 많은 사람을 속여 왔을 것인가. 폐데일까 루놜일까 채플린일까. '제7천국'을 보려니 성탄제 때의 아동 연극의 정도 밖에는 못 되어서 는적거리는 남배우의 낯짝에다 정신이 번쩍 들게 물을 끼얹고 싶은 충동이 났다. '장군 새벽에 죽다'도 두 번째는 지루하고, '유령 서로 가다'는 장난과 꾀가 너무나 드러나 보였다. '미모사관', '춘희', '다드워스', '대지' 등이 아무리 힘을 들였다고 해도 이 역 두 번 본다면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며 비교적 솔직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마라, 샵드레드', '야성의 부르짖음'이었다. 제작들이 교묘한 꾀를 피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작품의 품격에서 받는 감동 속에 숨어 버려서 순진한 눈으로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영화보다는 원작인 소설편이 한층 우수함은 웬일일까. 훌륭한 영화라고 하여도 그것이 소설의 풍미와 암시를 항상 덜어 버리는 것은 일단 시각화된 화면은 아무리 우수한 한 폭이라고 하여도 벌써 결정적 운명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까닭에 소설이 주는 풍부한 환상을 옹색하게 한 까닭으로 규정해 버리고 이지러뜨리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영화란 아주 잘 된 영화가 영화이지 섣불리 되었을 때는 가장 졸렬한 소설보다도 더욱 졸렬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소설은 그래도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난은 이 점에도 있다. 차라리 '미완성 교향악'이나 '악성 베토벤'을 허물없이 본 것은 음악의 덕이었고 '모던 타임스'에서 끝까지 진진한 흥미를 느낀 것을 풍자보다도 웃음의 덕이었다.(이 작품의 풍자란 너무도 진부하고 상식적이다. 채플린의 독창적인 교태와 거기서 솟아나오는 웃음이야말로 마땅한 듯하다.) 섣불리 본격적으로 겨루다가 실패라는 편보다는 차라리 웃음과 음악으로 대독시키는 곳에 영화의 다른 길이 암시된다. 근대의 걸작은 '아부일족'이었고 앞으로 기대되는 것은 봐이에 주연의 '마이아링크'다. 하기는 봐이에의 연기도 벌써 코에 냄새가 미칠 지경으로 되고 말았다. 대체 배우의 생명이 그다지 긴 것이 못 되어서 아무리 명우라고 해도 작품을 4,5편 거듭하면 연기의 형이 결정되어 버린다. 아리볼이나 풀무니, 가르보나 다류가 아무리 차례차례로 연기를 보인다고 하여도 신축자재한 애교가 아니고 사람인 이상 어느 정도에 이르러 고정해 버림은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데아나다빈이 첫 작품에서 벌써 싫증이 남은 웬일일까. 가령 애수가 얼굴에 잔뜩 서리어, 보기만 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특이한 종류의 배우는 나타나지 않는가. 국외자의 욕심이란 한량이 없는 것인 듯하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2.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라 기회를 만들어라 - 마이클 헤세 나는 비디오 데이트 서비스인 '큰 기대'를 통해 아내를 만났다. 제일 먼저, 나는 자기 소개서를 써야 했다. 나는 소개서를 써서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더 괜찮게, 더 재미있게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요청했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야 했다. 대부분의 신청자가 '큰 기대'에서 추천한 사진사를 찾는 것과 달리 나는 배우의 명함 사진을 찍는 할리우드 사진사에게 갔다. 그는 필름 세통을 허비한 끝에 얻은 원판 위에 수정 작업까지 더했고, 나는 훨씬 젊어 보이는 좋은 사진을 손에 넣었다. 그 다음에 나는 내 친구에게 비디오 촬영을 부탁했다. 내가 생판 모르는 타인보다 친구에게 훨씬 편안하게 말하고 친밀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 추측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여성들과 데이트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자신을 잘 포장하여 그들에게 '예스'라는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전화를 받고 데이트를 청하는 과정이 어색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숫자 게임이고, 일주일에 두 세명의 여성과 데이트를 나가는 것은 좋은 경험이라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경험이 쌓여 갈수록 나는 그 과정에 더 익숙해졌다. 결국 50명 정도의 여성과 데이트를 한 끝에 마리안느를 만났고, 그녀는 내 아내가 되었다.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라 - 릭 겔리나스 나는 공포를 극복하지 않는다. 아주 자주, 나는 거절당하는 공포로 녹초가 된다. 그러면 나는 가만히 앉아서 빌어먹을 전화기를 시한 폭탄처럼 노려본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상태는 보통 하루를 넘지 않지만, 아주 드물게 여러 날까지 이어진다. 5년 전에 한 번은 일주일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나는 무기력증에 빠져서 게으름을 피웠다. 우울한 기분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텔레비전만 봤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혹시 무기력증이 호흡을 비롯한 신체 다른 기능까지 방해한다는 의심이 들었고, 어쩌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장으로 돌아갔다. 나는 직장에서 요청하는 일을 다시 시작하든가, 아니면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는 요청하는 공포보다 훨씬 컸다. 아까 말했듯이, 그렇게 심했던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대부분은 하루에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씩 일주일 내내 즐겁게 일한다. 하지만 거절당하는 공포의 변형인 그런 무기력증을 경미하고, 짧게 종종 경험한다. 나는 사람들이 '우리 자녀에게 투자하십시오(기부금을 내십시오)'라는 나의 초대에 이끌리고 나를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임을 안다. 하지만 거절을 너무 많이 계속해서 듣는 일은 사람을 녹초로 만든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전 녹초가 되어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지기 일보 직전에 전화기 뒷벽에 작은 메모를 붙였다. 거기에는 거절당하는 공포가 너무 오래 지속될 때마다 나 자신을 무기력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말이 적혀 있다. 리코에게 다음에 네가 우울해질 때마다 일을 다시 시작한 순간의 기분이 최고였다는 사실을 명심해. 너를 사랑한다. - 리코가......
Board 추천글 2022.09.17 風文 R 1489
아이들의 말 아이를 돌보는 어른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는 아이가 말을 배울 때다. 아이의 말은 대부분 짧거나 비슷한 소리를 거듭한다. 맘마, 까까, 찌찌, 응가, 쉬야, 냠냠, 지지, 떼찌, 맴매. 동물 이름도 소리를 연결하여 꼬꼬닭, 야옹이, 멍멍개, 꿀꿀돼지라 한다. ‘어서 자!’ 말고, ‘코 자!’라 해야 잔다. 아이를 묘사하는 말도 따로 있다. 아이는 아장아장 걷고, 응애응애 운다. 운동 감각을 키워주려고 도리도리, 죔죔, 섬마섬마를 한다. 어른은 대(大)자로 누워 자지만 아이들은 잠투정을 하다가도 나비잠을 잔다. 먹은 것 없이 처음 싸는 배내똥은 늙어 죽을 때 한 번 더 싼다. 걸음마를 배우고 아장아장 걷게 될 무렵부터 아이의 말도 팝콘처럼 폭발한다. 낱말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른들이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냉소와 무심함으로 살 때, 그들은 이 복잡미묘한 세계를 처음 겪는 낯섦과 혼란에 맞선다. 아이는 인과관계를 생각하는 마음의 습관을 타고난다. 이유나 근원을 자꾸 묻는다. 그러다가 엉뚱해진다. 추리는 대부분 틀리지만, 중요한 것은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사물과 현상을 직접 관찰한다는 점이다(말 그대로 직-관(直觀)!). 게다가 이 세계를 분리하지 않고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하려는 본능적 성향을 보인다. 이 세계에 대한 관심과 열정, 그리고 끝없는 질문과 의심하는 태도를 지성이라고 한다면, 어린이야말로 지성인이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행복하다. 세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언어를 재료 삼아 삶을 건축해 나가는 한 인간의 집념을 목격하는 일이다. 외로운 사자성어 ‘당신의 어휘력’을 평가하는 약방의 감초. “‘당랑거철’이 뭔 뜻이지? 마부작침’은?” 하면서 상대방 기죽이기용 무기로 자주 쓰인다. 한국어능력시험에서도 한두 문제는 거르지 않고 나오니 달달 외우지 않을 수 없다. 딸에게 ‘마이동풍’을 아냐고 물으니, 들어는 봤지만 정확한 뜻을 모른다고 한다. 어릴 적 마을학교에서 소학이나 명심보감을 배웠는데도 모르냐고 하니, 배우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를뿐더러 아는 것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며 사뭇 진지한 ‘변명’을 했다. 모두 한 뭉텅이의 ‘옛날 말’이나 ‘꼰대말’처럼 보이겠지만, 사자성어도 각자의 운명이 있다. ‘표리부동, 명실상부, 시시비비’처럼 한자를 알면 쉽게 알 수 있는 단어는 생명력을 갖지만, ‘교각살우’처럼 겉의미와 속의미를 연결해야 하는 말은 덜 쓰인다. 한술 더 떠서 고사성어는 ‘초나라 항우가’라거나 ‘장자의 제물론을 보면’ 같은 식으로 관련한 옛이야기도 알아야 한다. 사자성어가 유창성이나 어휘력을 판별하는 척도인지 의문이다. 알아두면 좋다는 식으로 퉁칠 일은 아니다. 자신의 문장에 동원되지 않는 말은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식이니 버리자거나 쉬운 말로 바꿔 쓰자고만 할 수도 없다. 문체적 기교든, 아는 체하려는 욕망이든 그것을 써야 하는 순간이 있다. 게다가 축약어 만들기에 면면히 이어지는 방식의 하나다. ‘내로남불, 찍먹부먹, 내돈내산, 낄끼빠빠, 할많하않’. 실질이 요동치지만 형식은 남는다. 뒷방 늙은이 신세이지만 시민권을 깡그리 잃지도 않았다. 시험에 자주 나오지만, 외롭고 어정쩡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사람 사이의 틈 아파트 사이사이 빈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 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 사람은 틈 새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김지하 시인의 <중심의 괴로움>이란 시집을 읽다가 만나게 된 `틈`이라는 이 시가 요즘 내내 마음 안에서 떠나질 않는다. 창 틈으로 스며들어 오는 햇빛, 달빛, 바람, 높은 산에서 바위틈을 비집고 돋아나는 아름다운 들꽃. 우리집 장독대 옆,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좁은 돌틈을 비집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들. 그리고 바쁘게 일을 하다 잠시 쉬어 보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틈, 하루에도 수없이 어떤 틈들과 만난다. 자연과 일상의 시간 사이에 어떤 틈이 있듯이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틈이 있다. 상대방을 넉넉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백으로서의 밝고 긍정적인 틈이 있는가 하면, 서로를 오해하거나 완강히 거부해서 벌어지는 어둡고 부정적인 틈도 있다. 그래서 어떤 관계가 안 좋을 땐 `그들에게 틈이 생겼다` 또는 `틈이 벌어졌다`는 표현을 하는가 보다. 희망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랑의 틈이야 많을수록 좋고 살아가는 데 힘이 되지만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아 빚어지는 불신, 오해, 미움의 틈은 항상 슬픔과 우울함을 안겨 준다. 내가 30년이 넘는 세월을 수녀원에 살면서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일을 돌이켜보면 함께 사는 이들과의 관계에 어떤 보이지 않는 틈이 생겼을 때였다. 어느 땐 정말 큰 이유도 없이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이와 사이가 벌어져 한없이 어색해지면서도 서로 표현을 못할 때가 있는데 이런 종류의 틈은 큰소리로 싸우는 것보다 더욱 깊은 괴로움을 안겨 준다. 어떻게 이 틈을 메워 가야 할지 방법조차 알지 못해 애를 태우다 보면 `연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들고 `이래서 공동생활이 어렵구나`하고 탄식하며 잠시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사실은 좀더 잘해 주고 싶어 좋은 뜻으로 한 행동까지도 곡해되어 어색한 틈을 만들어 버렸을 땐 울고 싶도록 답답하다. 일반 가정에서 같으면 금방 툭 터놓고 한마디해서 그 틈을 메울 수도 있을텐데 수도원에서는 서로서로가 너무 조심스럽게 대하다 보니 이 틈이 필요 이상으로 오래 벌어져 있는 적도 많은 듯하다. 마냥 내버려두어도 안되고 너무 성급히 메우려고 해도 안되고 기회를 보아 자연스럽고 슬기롭게 메워 가야 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 무엇보다고 용서와 화해로 서서히 메워 가야 할 틈과 틈. 새해를 맞으며 나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동안 나의 탓으로 썰렁하게 벌어졌던 친지들과의 틈을 따스한 사랑으로 메워 가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가깝다고 너무 만만하게 여겨 예의 없이 굴었던 나의 말과 행동, 장담해 놓고 지키지 못한 작은 약속들,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 주지못한 무분별과 무관심, 그의 기대를 저버린 나의 이기적이고 교만한 태도, 너그러운 이해심과는 거리가 먼 선입견, 고정관념, 편협한 태도 등등. 이 모두는 평소에 잘 지내던 이들과도 조금씩 틈이 벌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아마 어떤 틈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금세 메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내 탓으로 한번 벌어진 틈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누가 나를 거부하고 나에게 심한 말로 모욕을 주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묵묵히 견뎌낼 수 있는 용기와 참을성을 지녀야겠다. 실은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이 일은 새해 결심으로뿐 아니라 평소에도 가장 최선을 다해야 할 과제임을 알고 있다. 가장 겸손하고 온유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이 틈을 메워 가지 않는 한 나에겐 결코 참된 평화와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Board 삶 속 글 2022.09.16 風文 R 427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효석편" 이효석(1907__1942) 소설가.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숭실 전문 학교 교수 역임.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주옥 같은 단편 소설을 썼던 이효석은 수필에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간결체 문장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소설 B씨에게서 나는 여러 차례나 만찬의 대접을 받고 어간유의 선물을 받고 했으나 그가 거리의 내 집을 찾아오기 전에는 똑같은 형식으로 갚아 줄 도리는 없다. 찻집에서 마시는 차가 아니라 집에서 손수 만든 차를 낼 수 있으며 손수 요리한 도미와 굴과 아이스크림을 대접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자가용 차는 없어도 구경만은 부자유스럽지 않게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가 직접 나를 찾기 전에는 어쩌는 수 없는 것이며 옷가지나 과자 상자쯤을 소포로 보낸댔자 별로 신통한 것이 아닐 것이요, 차라리 그렇다면 소설책을 보냄이 더 뜻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B씨는 소설을 유난히 좋아한다. 난로 전을 싸고 앉아 늦도록 이야기한 것도 말하자면 대부분이 소설 이야기와 문학 이야기였다. 광범한 그의 소설 지식에는 놀랄 만한 것이 있으며 신문 소설을 등한히 보는 나로서 부끄러울 때가 많다. 그 대신 나는 고전으로 그를 이기며 그의 지식에 그 무엇을 첨가하여 줌을 기뻐한다. 소설책이라고 하여도 자신의 것은 초라하니 훌륭한 책, 가령 해외의 것이라면 맨스필드의 단편집쯤이 적당할 듯하다. 이와나미판쯤으로는 체재가 너무도 빈약하니 좀더 고가의 호화판이나 나오면 한 부 보내리라. 그의 단편집은 확실히 B씨의 시골 살림에는 윤택과 위안을 줄 것이며 특히 "행복" 같은 걸작은 기어이 추천하고 싶은 일편이다. 물론 그 내용보다도 예술적 향기를 그에게 띄워 주고 싶은 것이다. 남편 해리와 미스 팰튼, 아내 영과 에디워렌의 두 쌍의 미묘한 관계를 나는 즐겨하지 않는다. 다만 해리와 영 부처의 행복스러운 가정적 윤곽, 집뜰 앞에 선 한 포기의 만발한 배꽃으로 상징되는 아내의 행복감, 그것이 그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주제이다. 배꽃이라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임을 사실 나는 이 작품에서 처음 알았고 그것의 행복감의 상징이 이 작품에서같이 여실하게 울려 온 적은 없다. '...저 쪽편 담으로 향해 한 포기의 밋밋한 배나무가 가지가지에 그득 꽃을 달고 있었다. 마치 구슬같이 푸른 하늘에 고요하고 화려하게 뻗치고 있다.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가 한 개나 있을까. 시들어 버린 송이가 한 송이나 있을까 - 한창 깨끗하고 흐뭇하게 활짝 피어 있는 것이 멀리 서 있는 피어사에세 완연히 보여 왔다-' '...그 나무는 고요하게 그러나 타는 촛불의 불꽃과도 같이 하늘에 뻗치고는 아름답게 떨리고 있다. 볼 동안에 자꾸만 높아져서 금시에 하늘 위 둥근 달에 채일 듯하다...' 봉실한 꽃송이가 바로 행복감 그것이다. 능금꽃과는 달라서 배꽃은 일률로 희다는 점에 작자가 특별히 배꽃을 든 비유와 암시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만발했을 때의 능금꽃이라는 것도 물론 아름다운 것도 물론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나 지금까지에 능금꽃의 아름다움만이 눈에 뜨이고 배꽃의 미를 등한시했음은 무슨 까닭이었던가 의심한다. 어떻든, 나는 배꽃을 맨스필드의 단편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셈이다. 하기는 맨스필드만이 아니라 이 곳의 젊은 시인 중에도 배꽃을 노래한 사람은 이미 있으니 그의 시구가 나의 배꽃의 인상을 도와 주었을 것도 사실이다. 돌배꽃 필 때면 뻐꾸기 울고 뻐꾸기 울면 하늘이 파아랗나니 배나무 그늘이 가슴에 푸르고 연두색 잎새 햇볕에 손뼉치고 우거진 가지마다 쫙 펴진 가지마다 웃음 또 웃음...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2.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라 거절에 감사하라 - 래리 윌슨, <게임을 바꿔라:새로운 판매술> 중에서 첫 번째 판매 일에 뛰어들었을 당시, 나는 내 믿음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항상 나를 좋아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의 잘못된 점은 '모든 사람'과 '항상'이었다. 그리고 판매 실전에 돌입하자마자, 내 믿음은 그에 반대되는 즉각적이고 강력한 반응을 얻었다. 대다수가 보험 판매원을 기피했던 것이다. 복도에서 나를 보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나는 상처를 받았고 자존심이 무너졌다. 나의 판매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죤에게 보험 가입을 권유한다. 그는 거절한다...... 나는 미련없이 엘렌에게 간다. 그녀는 거절한다. 그럼 나는 자존심을 짓밝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빌에게 간다. 빌 역시 거절하낟. 계속 그런식이었다. 나는 그 굴레에 갇혀서 옴짝달짝 못했다. 그래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집어치우기로 한 것이다. 그 정도에서 실패를 인정하는 편이 보험업계와 나 자신을 위해서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충고를 원했던 시점에서 우연찮게 한 친구가 빅터 프랭크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을 주었다. 그 책은 나에게 믿음의 힘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줬고, 내 자신과 내 일에 대한 믿음을 점검하게 했다. 그것은 진정으로 축복받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믿음의 변화를 실행했다. 나는 판매를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의 가치와 무관하다고 믿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에 나는 한 걸음 더 진전했다. 그 당시 내 실적은 평균 스무명의 고객을 만나야 생명 보험 하나를 파는 꼴이었고, 판매 수수료는 약 500달러였다. 그러니 500달러를 스무 번의 방문으로 나누면 고객 한 명을 만나는데 25달러가 떨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믿음 게임을 변화시킨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메리를 만나 보험을 권유하고, 그녀는 거절한다. 나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그녀에게 유감을 품는 대신 속으로 말했다. "25달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다음 18명의 잠재 고객에게도 그런 식으로 했다. 그들이 거절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네, 25달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스무 번째 잠재 고객이 보험에 가입했을 때, 나는 다시 말했다. "25달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지 눈 깜짝할 사이에 스무 명의 잠재 고객이 열 명으로 줄고, 500달러의 수수료는 천달러로 올라갔다. 그 즈음, 나는 빨리 밖으로 나가서 '25달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내 판매술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단지 내 믿음을 변화시켰을 뿐이다. 나는 잠재 고객의 거절을 실패의 징조로 보는 생각을 버리고, 이성의 힘을 발휘하여 나의 가치가 판매 실적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을 나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켰다. 그것은 하나의 일상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나는 내 자신에게 줄기차게 말했다. "나는 절대로 실패할 수 없어, 내 가치는 판매 실적과 관계없어." 나는 혼잣말을 반복해서 자아의 목소리를 변화시켰고 더욱 긍정적인 믿음을 선택했다. 그것이 큰 차이를 만들었다. 거절의 의미를 재조명하라 W. 클레망 스톤은 콤바인드 재단의 창설자이자 동기 부여의 천재이다. 그는 판매 사원들에게 요청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분야의 대가이다. 그는 판매 사원이 '예스'라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그들을 지탱해 줄 방법을 갖지 못한다면, 딱 열번째 고객 방문을 끝으로 일을 그만두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판매 사원들에게 25개의 콩을 전부 오른쪽 주머니로 옮길 때까지 일을 그만두지 말라고 했다. 판매 사원들은 25개의 강낭콩을 한쪽에서 다른 쪽 주머니로 모두 옮겨 넣을 때까지 판매를 계속하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퇴근 시간 즈음, 그들은 일정하게 하나씩 판매 실적을 올렸다. 그것은 판매 사원들에게 일을 계속할 동기를 부여했다. 그들은 결국 '예스'라는 대답을 얻게되리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거절을 견딜 수 있었다. 이 단순하고 강력한 방법은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판매 사원들까지 거절의 공포를 극복하고 판매업계에서 유리한 경력을 쌓도록 도왔다. 당신도 이와 똑같은 원칙을 당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기 바란다.
Board 추천글 2022.09.16 風文 R 1676
어이, 택배! ‘하나를 알면 백을 안다.’ 사람은 일부분만 보고 전체를 넘겨짚는 습성이 있다. 애당초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란 글렀다. 사람을 만나면 주로 얼굴을 본다. 다 보지 않고 눈을 본다. 관자놀이나 뒤통수, 귓바퀴는 잘 안 본다. 큰 점이 하나 있으면 그걸 곁눈으로 본다(점박이). 머리 모양이 특이하면 그걸 기억한다(노랑머리). 옷이나 장신구가 색다르면 그걸로 기억한다(‘저 반바지가 막말을 했어’). 행동 하나만 보고 인품을 평가한다. 젓가락질이 서투르면 ‘저런 것도 못하다니 볼 장 다 봤다’며 내친다. 예절이라는 게 타인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발달된 건지도 모른다. 말에도 부분이 전체를 대신하는 일이 흔하다. ‘밥’이 모든 음식을 대신한다거나(‘밥 먹자!’), 가수명이 노래를 대신한다거나(‘요즘 방탄소년단만 들어’), 물건이 사람을 대신하기도 한다(‘버스 파업’).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일 때가 많다. ‘여기요, 저기요, 아저씨, 아줌마, 언니, 이봐요, 사장님, 선생님, 어르신’. 며칠 전 택배노동자들이 택배 차량의 아파트 지상도로 출입금지를 풀어달라며 기자회견을 했다. 아파트 주민이 이들을 향해 시끄럽다며 ‘어이, 택배!’라고 불렀다. 전에도 ‘때밀이, 배달, 노가다’처럼 일이 사람을 대신하기도 했지만, 이것도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나 쓴다. 사람이 있다면 ‘○○ 아저씨, ○○ 아줌마’처럼 호칭을 붙인다. 호명은 누군가를 불러 세운다는 점에서 소통의 출발점이자 상대에 대한 규정이다. 그 짧은 호명 안에 당신의 품격이 담긴다. 그림과 말 하와이 마노아계곡에 낮게 깔린 무지개. 이 형태의 무지개는 ‘우아코코’라고 불린다. 무지개를 뜻하는 하와이 말은 ‘아누에누에’이지만 낮게 깔린 무지개, 쌍 무지개, 곧추선 무지개, 원형 무지개 등 다양한 형태의 무지개를 가리키는 단어와 문구가 20여가지나 된다. - 미 기상학회지 말을 배우기 전 아이는 세계를 그림 비슷하게 받아들인다. 이름 없는 세계를 그림(이미지)으로 받아들인다. 쪼개고 베어내어 이름 붙이지 않는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먹여주고 씻겨주다니 이 세계는 믿을 만하다. ‘빨주노초파남보’를 모른 채 보는 무지개는 얼마나 온전하고 아름다운가. 희로애락의 감정은 추상적이지 않고 몸으로 체험되고 기억 속에 각인된다. 머릿속 그림은 살아 움직이며 꿈틀거린다. 구체의 세계, 육감의 세계이다. 말은 세계를 베어내는 칼이다. 세계를 그림처럼 아로새기고 있던 아이를 습격한다. 말은 개체가 갖는 단독성과 관계성을 없애고 공통점을 찾아 추상화한다. ‘나무, 괴롭다, 동물’이란 말은 추상적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껴보기도 전에 꽃이 아름답다는 말을 먼저 배운’ 사람에게, 그 말은 ‘꽃의 아름다움을 꺾는다’(<최초의 습격>, 고은강). 사람들이 글보다 이미지나 동영상에 환호하는 것도 달리 보면 어릴 적 본능을 회복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미지는 세계를 인식하는 가장 원초적인 도구이니까. 그런데 그림이든 말이든 이 세계를 무심히 그려내지는 못한다. 차별한다. 이 세계를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 먼 곳보다는 가까운 곳에 더 눈길을 준다. ‘나’와 ‘나 아닌 자’, ‘지금’과 ‘지금 아닌 때’, ‘여기’와 ‘여기 아닌 곳’을 기준으로 구별한다. 물리적 거리는 마음속 거리감으로 바뀌어 친한 사람은 가깝고 모르는 사람은 멀다. 도덕, 즉 옳고 그름의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가까움’은 옳고, ‘멂’은 그르다. 이 구별 본능을 피할 수 없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