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아닌 글자 어릴 때 한자 중에 ‘용’(龍)자가 제일 멋졌다. 꼬리 쪽 획을 삐쳐 올려 쓰면 용이 꼬리를 튕기며 솟아오를 것 같았다. ‘부모 성명을 한자로 못 쓰면 상놈’이라는 소문에 아버지 이름에 있는 ‘목숨 수’(壽)자를 기억하려고 위에서 아래로 ‘사일공일구촌’(士一工一口寸)을 외웠다. 글자 하나가 이리 복잡한 걸 보니 목숨은 만만찮은가 보다 했다. 소리글자인 한글을 쓰다 보니 우리는 글이 말을 받아 적는 거라는 생각이 강하다. 하지만 글은 말의 졸개가 아니다. 글/자는 소리로 바꿀 수 없는 고유한 ‘문자성’이 있다. 글 자체는 시각적이다. 목소리를 가다듬듯이 글도 잘 읽히도록 공간적으로 ‘편집’된다. 서체를 비롯하여 들여쓰기, 문단 구분, 줄 간격, 쉼표, 마침표, 따옴표, 느낌표, 물음표, 말줄임표, 괄호와 같은 고유의 소통 장치를 쓴다. 시에도 글이 하나의 그림이 되는 구체시가 있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는 비가 내리듯, 에펠탑 앞에 선 듯, 애인의 초상화를 감상하는 듯하다. 황지우의 시 ‘무등’도 정삼각형 안에 시어를 배열하여 산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글자가 갖는 고유성을 활용한 예술과 디자인이 꽃을 피우고 있다. 다른 얘기지만, 학생들에게 야들야들한 명조 계열의 서체로 과제를 하라 해도, 열에 예닐곱은 울뚝불뚝한 고딕 계열을 고집한다.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기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와 취향의 표명이었다. 둘러보면 어디든 고딕체가 우위이다. 종이 매체가 아닌 온라인 매체에 쓰이는 글자는 고딕 계열이 압도적이다. 맥도날드의 방탄소년단 티셔츠에 새겨진 ‘ㅂㅌㅅㄴㄷ’도 고딕체다. 거짓말 거짓말의 기준 세 가지. 사실이 아닐 것. 자신이 믿는 것과 하는 말이 정반대임을 알고 있을 것. 상대방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을 것. 이 중에서 한두 가지가 빠지면 착각이거나, 실수, 기억의 오류, 아니면 농담이나 과장이다. 속이려는 목적과 수법에 따라 위로의 거짓말, 달콤한 거짓말, 면피용 거짓말, 추악하고 악의적인 거짓말 따위가 있으려나. 좋게 보면 거짓말은 상상력이다. 누구나 하루에 200번 정도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나처럼 과묵한(!) 사람이라면 두 마디 중 한 마디는 거짓말인 셈이다. 거짓말을 피할 길이 없다. 모든 언어에 ‘만약’이라는 가정법이 있고, 그 가정이 과거(‘중대재해처벌법이 제대로 만들어졌더라면’), 현재(‘만약 우리에게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미래(‘만약 손실보상금을 준다면’)를 넘나드는 걸로 봐서, 거짓말은 상상력의 열매다. 다행히 거짓말은 상호적이다. 말 자체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한 손으로는 손뼉을 못 치듯, 동의하고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있어야 완성된다. 그 동의는 대부분 듣는 사람 속에 있는 크고 작은 욕망 때문이다. 채우고 싶은 무엇, 사리사욕, 심신의 안위, 명예와 권력의 획득, 인정 욕구, 또는 현실 극복 의지일 수도 있다. 요사이 절실히 느껴지는 건 이런 거다. 거짓말인 게 뻔히 보이는데, 당사자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걸 아는지, 아니면 그의 굳건한 신념인지 당최 모르겠다는 거다. 마음속에 두 갈래의 말이 있을까? 갈라진 목소리가 없다면 그는 무오류의 언어를 가진 거다. 이런 사람은 사기꾼보다 무섭지만, 10원짜리 한 장보다 가볍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마음의 작은 표현들 며칠 전에 오랜만에 바닷가에 나갔다가 모래 속에 깊이 묻혀 있는 아주 작은 조가비들을 주워 왔고, 오늘은 솔숲길을 산책하다 깨끗한 모양의 솔방울과 도토리들을 주워 왔습니다. 나는 이것을 한동안 소식이 뜸했지만 마음으로 가까운 어린 시절의 벗에게 편지와 함께 보내려고 상자에 담아 두었습니다. 요즘처럼 좋은 물건들이 넘쳐나고, 돈만 주면 못 사는 것이 없을 만큼 풍요로워진 시대일수록 상점에서 흔히 살 수 있는 선물보다는 주는 이의 정성과 따스한 마음이 담긴 요란하지 않은 선물이 오히려 더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주 작은 메모쪽지 하나라도 때로는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음을 여러 차례 경험하게 됩니다. 여권과 비행기표마저 잃어버리고 상심해 있던 몇 년 전의 여행길에서 누군가 나뭇잎에 `굿 나잇`이라고 써서 내가 머무는 방에 놓아 주고, 박하사탕 한 개와 함께 놓고 간 격려의 말은 힘든 중에도 작은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나는 특히 해외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친지들에게 고국을 느끼게 하는 그림옆서나 나뭇잎, 현재의 사회적 상황이 가장 잘 요약된 신문의 만화, 미담, 아름다운 시들을 오려 보내곤 하는데 긴 글을 못 쓴 채 보내더라도 다들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나의 서랍엔 지금도 친지들이 보내 준 각종 편지, 카드 엽서, 메모지들이 가득합니다. 축일이나 기념일, 어떤 강의 끝에 우리 자매들이 정성을 다해 한마디씩 짤막하게 이어서 쓴 글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나 조각보처럼 여겨져서 선뜻 버릴 수가 없습니다. 무선전화기와 호출기 사용자가 늘어나고, 편지도 컴퓨터로 찍어 모사전송으로 보내는 이들도 많아지는 요즘엔 친필편지 받아 보기도 그리 쉽지 않은 듯합니다. 나도 가끔은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할 때가 있지만 그럴 때라도 꼭 친필로 쓸 여백만은 남겨 두곤 합니다. 기계로 찍힌 글씨와 비록 악필일지라도 손으로 직접 쓴 글씨를 받아 볼 때의 느낌은 크게 다르기 때문이지요. `친구야, 편지 한 번 안하는 무심함에다 세상에 없는 천하태평이라구? 하지만 내 편에선 늘 너를 짝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소식이 없어도, 안 봐도 넌 늘 내 가장 가까운 마음의 친구이다. 너무 유명(?)한게 흠이긴 하지만 친구야. 너를 늘 생각하고 사랑한다.` 며칠 전 열다섯 살 때의 글씨 그대로인 중학교 친구 혜숙의 쪽지를 오랜만에 받은 나는 그가 불쑥 전화로 얘기한 것보다 더 찡한 감동을 받고 행복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벗과 친지들에게 건강한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지만 의미 있는 사랑과 기쁨의 표현을 부지런히 하고 사는 소박한 부자가 되자며 강조하곤 합니다. 생전엔 거의 발표되지 않고 있다가 사후에 출판된 에밀리 디킨슨의 1700여 편이나 되는 제목 없는 많은 시들은 그가 생일이나 기념일을 맞은 그의 가족 친지들에게 적어 보낸 카드나 편지글들을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새봄을 맞아 우리는 가족, 친지, 이웃에게 적어 보낼 좋은 생각과 좋은 글귀들을 많이 모아 둘 수 있는, 그래서 열기만하면 언제라도 작은 보물섬이 되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문집 한 권을 준비하면 어떨까요? 시. 의미있는 그림이나 만화, 격언, 감동적인 체험담 등을 열심히 모아서 꾸미다 보면 그 자체가 기쁨이 되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하고 싶어도 선뜻 쓸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엔 좋은 길잡이 노릇을 해줄 것입니다.
Board 삶 속 글 2022.09.18 風文 R 571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효석편" 이효석(1907__1942) 소설가.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숭실 전문 학교 교수 역임.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주옥 같은 단편 소설을 썼던 이효석은 수필에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간결체 문장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우유 '모던 타임스'에서 채플린이 고따드와 가정 생활을 공상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집이 교외에 있는 탓도 있겠지만 바로 문 밖에 열린 포도를 따먹고 우유는 문간에 매어 둔 소에게 직접 짜서 그 자리에서 마신다. 이 목가적 취미는 아마도 현대인의 누구나가 환상하는 것일 듯하다. 목가적 취미의 사치한 치장은 그만두고 그저라도 우유를 풍족히 먹고 싶다는 원부터가 우선 급하다. 나날의 곡량은 물론이거니와 시민마다가 우유를 풍족히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된 사회일까. 만반 문제의 출처인 요점을 이렇게 간단히 말해 버린다면 어리석은 잠꼬대가 될는지 모르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든 우유를 중요한 양식으로 삼고 그것을 때마다 흡족하게 마시는 습관과 처지에 있는 서방인이 확실히 우리보다는 행복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유를 마시는 풍습은 물론 근래의 것, 적어도 피유리가 흑선으로 동방에 시항해 온 이후에 속한다. 그 이전에는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면 그만큼 불행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극동인이 인도에 여행하였을 때에 간디는 인도의 서민층의 생활을 생각하고 두부 만드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영웅으로서 오히려 이러한 세밀한 배려가 있음은 하찮은 식물 한 가지의 보통화가 족히 백성 전부에게 큰 복지를 가져오는 까닭이다. 백성 전체가 우유를 흡족하게 마시는 나라야말로 두말할 것 없이 이상 사회일 것이다. 학교 농장에서 아침 저녁으로 배달해 오던 우유를 흔하게 마실 때에는 아무 걱정 없던 것이 농장의 우유가 끊어진 이후로는 크게 공황을 느끼게 되었다. 질과 값으로 거리의 우유가 도저히 농장의 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그 어느 날이나 번기는 법 없이 마치 성탄옹의 선물과도 같이 어림없이 듬직한 5흡들이 콜병이 유회색 문등 아래편 시멘트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로이드 영화에 나오는 커다란 그 병이다. 여름에는 담쟁이의 이슬을 맞고 겨울에는 언 채로 오뚝 놓여 있는 그 풍모부터가 우선 상 줄 만하다. 물론 새벽에 갓 짠 생우유다. 냄비에 붓고 표면에 얇은 유막이 앉을 때까지 끓여서 식후에 숭늉을 대신으로 벌떡벌떡 켜는 것이다. 겨우 한 잔의 우유로 혀를 댈까 봐 고양이같이 홀짝홀짝 핥는 것과는 운치와 격이 다르다. 특히 겨울에 얼어서 살얼음이 잡힌 것을 끓여서 흡사 풋옥수수 삶은 냄새 나는 눅진한 액체를 입안에 그득 머금었을 때 우유의 진미는 그 한 모금에 있다. 해외를 돌아온 학자가 스위스에서 먹었다는 우유 자랑을 하나 농장에서 오는 우유가 결코 그에 밑지지 않을 듯하다. 한 홉에 실비로 3전, 한 콜에 15전, 하루에 두 콜이라도 30전, 한 달에 서 말의 우유를 위 속에 부어도 9원이면 족하다. 그것이 요사이 와서는 사정이 너무도 달라졌다. 농장이 없어진 까닭에 당장에 우유 기근을 만난 셈이다. 한 홉 7전의 거리의 우유를 하루에 한 되를 마시려면 한 달에 20원을 넘는다. 미곡과 신탄대를 합한 액수보다도 많다. 농장에 있는 배달부가 K목장으로 고용을 간 날로 구면이라고 즉시 주문을 맡으러 왔다. 하는 수 없이 하루 아침에 세 홉씩을 부탁해서 식구들과 나누게 되었으나 당초에 부족한 양일 뿐 아니라, 아무래도 협잡물이 든 것 같아서 농도가 옅고 맛이 덜하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전과는 달리 아치형의 좁은 홍예문 아래편 시멘트 바닥 위에 가느다란 한 홉 병이 세 개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이 콜병의 위용과는 엄청나게 빈약하게 보인다. 겨울보다 체중이 반 관이나 준 것을 우유 부족의 탓으로 돌린대도 과장을 아닐 듯싶다. 어떻든 농장의 우유는 생각할수록에 행복스런 선물이었고 지금 우유는 그래도 나으나 더 못한 악질의 우유를 찾는다면 함경선 식당차에서 파는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 우유치고 이보다 더 못한 것을 구하려면 지옥으로 가야 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유를 넉넉히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지금에 있어서는 가장 원하는 세상이며 바라건대 거리의 복판마다 냉장의 우유 탱크를 세우고 오고 가는 시민에게 자유로 마시게 하거나 혹은 수도와 마찬가지로 지하에 우유를 묻고 각 가정에서 나사만 틀면 적량의 신선한 우유가 언제든지 졸졸 쏟아지게 하는 설비가 국가 경영으로서 하루바삐 생겨질 날을 공상이 아니라 충심으로 원하는 바이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말할 수 없으면 편지를 써라 - 레오 톨스토이가 미래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피 안드레에브나, 나는 이런 식으로 더이상 버틸 수 없소. 지난 삼 주일 동안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해 왔소. "오늘 그녀에게 말을 해야 해." 그런데도 내 가슴은 당신을 향한 기쁨만큼이나 공포와 후회와 슬픔으로 뒤엉켰다오. 매일밤 나는 하루를 되돌아보고 당신에게 아무 말도 못한 나 자신을 저주하고, 말 이외에 다른 방법을 궁리해 왔소. 나는 이 편지를 지니고 있다가. 내 용기가 또 다시 나를 실망시킬 때 이것을 당신에게 전하겠소. 3. 전문가에게 요청하라 - 스텐 데일 안전지대는 푹신푹신한 관이다. 그 관속에 누워 있을 때 당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긍정적인 기대를 갖고 요청하라 - 마르시아 마틴, 세미나의 수석 조교이자 책임자 샌프란시스코 특급 호텔에 들렀을 때, 나는 현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호텔 프론트 데스크에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생각을 했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내가 이 호텔에 투숙한 손님이 아니기 때문에 호텔 측에서 내 수표를 바꿔주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운전 면허증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당시, 내 운전 면허증이 먼 곳에서 우송되어 오는 중이었으므로 나는 일반적으로 수표를 현금화하는데 필요한 신분 증명서를 지니지 못한 셈이었다. 나는 데스크로 가서 이런 말을 하는 평소의 내 모습을 상상했다. "저기,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이 호텔의 투숙객도 아니고 운전 면허증도 없습니다만 당신이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주시면 고맙겠는데요." 그리고 그 다음에 이런 대답을 듣게 되리라. "안됩니다. 당연히 당신의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드릴 수 없습니다. 당신은 운전 면허증도 없고, 이곳의 손님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나는 다른 결과를 얻으려면 다른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무슨 밀을 하고, 어떻게 걷고,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인지에 대해 머리 속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생생하게 상상한 다음, 내 자신을 그 확실한 입지에 끼워 놓고 그대로 행했다. 나는 조금도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프론트 데스크로 걸어가서, 데스크 직원에게 말을 거는 동시에 지갑에서 수표책을 꺼냈다. 나는 내 수표가 현금화되리라는 것을 하는 상황에서 굳이 직원의 대답을 기다렸다가 수표책을 꺼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데스크 직원을 똑바로 응시하며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주실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주는 최대 금액이 얼마나 됩니까?" 나는 수표책을 그의 앞 카운터에 내려놓고, 즉시 펜을 꺼내 수표 하단의 수신자 난에 호텔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데스크 직원은 나의 확신에 말려들었고, 나에게 이 호텔의 투숙객이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내 태도로 투숙객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그는 대답했다. "백 달러입니다." 나는 그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소! 완벽하게 잘될 거요." 그 태도는 내가 현금을 받으리라 확신하고 취할 수 있는 말과 어조였다. 나는 백 달러 수표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말했다. "운전 면허증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좋소, 아무 문제없소." 그리고 나는 지갑에서 운전 면허증이 아닌 다른 신분증을 꺼냈다. 나는 그것을 건네며 말했다. "여기 있소, 다 잘될 거요." 나는 신분증을 건네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차하게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나는 그 신분증으로 통하리라는 입지에서 나올 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내 신분증을 확인하고 말했다. "운전 면허증이 필요한대요." "좋소, 아주 좋소. 아무 문제없소"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 받아들였다. 그리고 좀전에 확신에 찬 말을 다시 확인했다. "그것을 사용해봐요, 운전 면허증과 똑같은 거요. 그러니 운전 면허증과 똑같은 효력을 발휘할 거요. 다 잘될 거요." 나는 신분증을 그에게 다시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가 신분증을 운전 면허증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양 한참 들여다봤던 것이다. 그러더니, 그는 다시 한 번 미약하게 시도했다. "저기, 진짜 운전 면허증이 필요합니다만..." 나는 그냥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것을 사용해봐요. 잘될 거요." 그는 덩달아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그는 그 신분증과 내 수표를 번갈아 봤다. 나는 그가 정말 그것을 운전 면허증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봤고, 결국 그가 그 두 가지를 동일시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고개를 들고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백 달러를 건넸다.
Board 추천글 2022.09.18 風文 R 1359
불교, 불꽃의 비유 우리는 사회 전체를 본 적이 없다.(사회가 있기나 한가?) 그럼에도 사회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람에 따라 사회는 유기적인 생명체이기도, 적재적소에서 돌아가는 기계이기도, 계급투쟁의 전쟁터이기도, 말(담론)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어떤 이미지를 갖느냐에 따라 세상사에 대한 해석과 해법이 달라진다. 불교철학에서는 이 세계를 ‘불꽃’에 비유한다. 초를 켜면 몇 시간 동안 불꽃이 계속 타오른다. 한 시간 뒤의 불꽃은 처음 불꽃이 아니다. 두 시간 뒤의 불꽃은 처음 불꽃이 아니다. 불꽃은 순간마다 다 다르다. 하지만 앞의 불꽃이 없다면 뒤의 불꽃도 없었을 것이므로 아무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본래의 것도 없지만, 단절된 것도 아니다. 불교는 본성 없는 연속성을 말한다. ‘본성 없음’과 ‘연속성’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은 독립적이지도 본래적이지도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모든 것은 변한다. 불변하는 본질이란 있을 수 없다. 말이야말로 한순간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단어든 문장이든 글이든 변치 않는 의미를 갖는 말은 없다. 시공간과 사람 따위의 인과적 조건(맥락)이 다르므로, 어제 한 말과 지금 하는 말이 다르다. 당신의 말과 내 말은 다르다. 순간순간 타오르는 말의 불꽃이 있을 뿐이다. 허무주의나 상대주의가 아니다. 억압하고 후벼 파는 말이 아닌 자유롭고 해방적인 말이 되려면 말을 둘러싼 인과적인 연관을 포착하려는 실천의지가 필요하다. 말은 돌덩이가 아니다. 일렁거리는 불꽃이다. 백신과 책읽기 나는 천성이 맑고 선하며 예의가 바르다(=맹탕이고 비겁하며 남들 눈치를 본다). 여간해서는 어른들 말씀에 토를 달지 않는다. 맞는 말에도 허허, 틀린 말에도 예예. 마을 일로 마을회관에 갔더니 동네 원로 몇 분이 와 계셨다. 모임 시작 전에 한 분이 백신 얘기를 꺼냈다. 아스트라제네카가 백신 중에서 제일 ‘싸구려’인데, 그걸 왜 우리보고 맞으라고 하냐는 것이다. 20만원짜리도 있는데 이건 꼴랑 4천원. 조용하던 마을회관이 노인 차별 규탄의 장으로 바뀌었다. ‘늙은이들은 싼 거나 맞으라는 거냐?’ 카톡에서 얻은 정보다. 백신 가격과 백신 효과는 관계가 없다거나 이윤을 남기지 않고 공급하려는 정책 때문이라거나 유럽 각국의 총리도 다 이 백신을 맞았다는 얘기는… 안 꺼냈다. 한국의 디지털 정보 문해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바닥권이라는 피사(PISA)의 발표가 있었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내용은 학생이 읽어야 하는 글의 길이였다. 핀란드, 덴마크, 캐나다 등 상위 국가는 100쪽이 넘는 글이 전체 글의 70~75%를 차지한다. 한국은 10%에도 못 미쳤다. 76개국 중 67위이다. 긴 글을 읽는 행위와 문해력은 상관관계가 높다. 또한 디지털보다 종이책으로 읽고, (시험이나 강제가 아닌) ‘즐거움’을 위해 읽어야 문해력이 길러진단다. 방법은 많지 않다. 문해력을 기르려는 공동 노력뿐이다. 나도 마을 어른들과 책읽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맹탕처럼 보이는 처방이지만, 가짜 정보와 사특한 논리를 가려내어 남녀노소, 빈자와 부자가 어울려 사는 마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먼 듯 가까운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은 어제보다 죽음이 한치 더 가까워도 평화로이 별을 보며 웃어 주는 마음 살아라 오늘을 더 높이 나 불던 피리 찾아야겠네 오래 전에 쓴 나의 시 `11월의 기도` 한 구절을 가끔 기도삼아 외워 볼 때가 있다. 수녀원에서는 매일 낮기도 후 죽음에 대한 시편을 낭송하며 성당에서 퇴장하고,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봉헌하는 끝기도에서는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고 마무리 한다. 늘상 습관적으로 반복하다 보니 본래의 지향을 잊을 때도 많지만, 어느 날은 더욱 정성들여 외우며 문득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곤 한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안식을 빌어 주며 언젠가 닥치게 될 우리 자신의 죽음도 묵상하게 만드는 이 기도문들을 나는 사랑한다. 며칠 전에 내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꿈을 꾸었는데 문득 눈을 떠서 다시 맞는 아침이 참으로 눈부시게 느껴졌다. 거의 10년 전쯤의 어느 날 꿈엔 나를 데리러 온 죽음의 사자인 듯싶은 이에게 꼭 5년만 더 지상에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한 적이 있었고, 혹시 그때부터 5년 후엔 정말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고 내심 불안했는데 이제 그 5년도 훨씬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기대한 것만큼 열심히 깨어 살지 못했음을 인정하며 요즘도 가끔 그 꿈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같은 식구끼리조차 얼굴을 마주하기 어려울 만큼 바쁘게 살고 있는 우리는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에 죽음에 대한 생각은 미리 하지 않게 되고, 아예 잊고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가까운 친지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좀더 깊고 진지한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오래 갖기 어려울 만큼 늘 무언가에 쫓기며 사는 듯하다. 죽은 이들이 남긴 물건을 대하는 일은 왠지 으스스하고 두려운 느낌이 들어 어떤 이들은 싫다고 하지만, 나는 평소에도 의미 있는 유품들을 가까이 두는 편이라 조금도 싫은 느낌이 들지 않은다. 그래서 나의 침방 문 앞에는 어느 사형수가 쓰던 조그만 나무십자가를 걸어 두었고, 침대보는 거룩하게 살다 돌아가신 어느 선배 수녀님이 남기고 간 것을 쓰고 있다. 책상 위엔 지난해 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촌 언니 수녀님이 준 은십자가와 묵주가 있고,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어떤 소녀가 마지막 선물로 준 종이학도 있다. 또 휴대용 게시판엔 여러 종류의 메모와 함께 장례 미사에 다녀올 때마다 받아 온 성직자, 수도자들의 기념 상본들이 열 장도 넘게 꽂혀 있다. 간단한 약력과 짧은 기도문이 적힌 손바닥만한 크기의 종이 위에 인쇄된 고인들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절로 기도가 되고 숙연해지는 마음이다. 깊은 영성 시인이셨던 최 신부님, 너무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의 슬픔을 자아냈던 박 신부님, 바닷가에서 다른 이의 목숨을 구하려다 숨지신 배 신부님, 친지의 결혼식에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숨지신 최 수사님, 대만에서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윤 신부님...그중엔 내가 조시를 써드렸던 분들도 계시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하다 심장마비로 숨지신 마르티나 수녀님의 마지막 성탄카드는 커튼위에 달아 두었다.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생생한 그들의 정다운 웃음, 농담 그리고 생전의 여러 모습들을 떠올리며 앉아 있노라면 세상엔 그리 숨차게 바쁠 일도 아등바등 싸우거나 욕심을 부릴 일도 없는 것 같다. 사소한 일들로 번민하고 화를 내며 누구를 미워하거나 용서 못하는 일들이 너무도 어리석게 여겨진다. 고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 상황, 장소는 그들의 삶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함을 새롭게 느끼게 하면서 언젠가 맞을 나 자신의 죽음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의 죽음을 한치도 예측할 수 없는 인간. 때론 자기도 모르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행동을 하게 되는 인간은 강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얼마나 무력하고 유한한 존재인가. 가끔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죽음에 대한 묵상을 함으로써 좀더 겸허하고 온유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다른 책들도 많이 읽는 편이지만, 특히 죽은 이들이 남긴 수기, 일기 등의 글모음과 병상에서 임종자들을 돌보아준 의사나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절절한 체험담, 그리고 죽음에 대한 연구나 단상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즐겨 읽는 편이다. 이유 없이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해질 때면 솔숲으로 둘러싸인 우리 수녀님들의 묘지에 올라가 잠시 앉았다 오기도 한다. 쓸데없는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언제라도 때가 되면 죽음의 강을 건너는 법을 땅 속의 수녀님들은 내게 조용히 일러주시는 것만 같다. 주어진 모든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소중하게 받아 안으며 감사하라고. 오늘이란 강 위에 사랑의 징검다리를 부지런히 놓아야 한다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같은 음성으로 정답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나 역시 누구보다 죽음에 초연해야 할 수도자이지만, 이 세상에서 정을 나누며 살았던 사랑하는 이들과의 영원한 이별은 미리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슬프고 서운하다. 간혹 다른 이들로부터 수도자는 일찍 죽을수록 좋지 않느냐는 말을 들으면 문득 야속한 생각도 든다. 이승을 하직할 때도 잠시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의 가벼운 기쁨과 설레임으로 친지들과 이별인사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 날 임종의 고통으로 말문이 막히고, 너무 갑자기 떠나게 되어 제대로 인사를 못하더라도 큰 아쉬움이 없을 만큼 평소에도 조금씩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살아야겠다. 얼마 전 동료 수녀가 함께 외우자고 건네준 기도문의 일부를 오늘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읽어 본다. `...제가 세상을 떠날 때 지혜를 자유로이 사용할는지 지금 알지 못하오니 이제부터 저의 임종의 고통과 모든 괴로움을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주님, 저의 마지막 순간이 당신 죽음의 순간과 일치되기를 원하오며, 제 심장의 고동은 당신을 위한 순결한 사랑의 행위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오늘부터 당신이 원하시는 죽음의 종류와 그 모든 아픔과 모든 번뇌와 임종의 고통을 저는 즐거이 또한 순종하여 당신 손으로부터 받아들이나이다. 아멘.`
Board 삶 속 글 2022.09.17 風文 R 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