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장마 끝 반짝 개인 오후 43번 국도로 차를 몰고 나갔다. 불어난 강물을 끼고 돌아가는 굽은 길이 갑자기 나를 가로막는다. 빗물에 씻겨 내린 황토가 아스팔트를 붉게 뒤덮고 철망을 덮씌운 절개지의 흙들이 쏟아질듯 위태롭다. 차를 멈추고 가만히 보니 시뻘건 흙과 바위로 뒤엉킨 그 곳에 꿈틀, 토끼풀이 있다. 털을 한껏 곤두세우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 보고 있으려니 얘들이 수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심해! 조심해!! 나를 짓누른 이 돌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어젯밤 내린 비에 심통이 났거든.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어? 아무도 봐주지 않는 비탈진 자리에 꼼짝 않고 있자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토끼풀은 손끝을 바늘처럼 세워 그의 말을 천천히 들려준다. 곤두선 털들은 하나하나 작은 손가락이 되어 내 마음의 수틀에 오색의 실을 잣는다. 나를 걱정하시던 할머니의 축 늘어진 젖처럼 말랑말랑 따스한 정이 만져진다. (내 말을 들어줘서 고마워. 세찬 빗방울을 견디느라 힘이 다 빠졌거든. 하지만 네게 말을 전했으니 아무래도 괜찮아! 이젠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