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도 있었다 늘 다니던 길이다 그 길은 정문이 아닌 담과 담의 사이길, 끝나는 곳까지 붉은 덩굴장미가 온화하다 내 얼굴은 붉어졌다 지워지곤 했다 꽃이 지워진 겨울, 떠오름으로도 활짝 핀다 무슨 생각에서 공룡처럼 발자국을 남겼을까 예순다섯 발자국에서 나무가 막아선다 가로등은 나무를 창백하게 데운다 쿵, 쿵, 쿵, 돌계단을 내려선다 계단 사이가 깊어 그것에만 마음이 써져 다른 것은 눈이 먼다 열네 개의 계단 끝에서 고개 숙인다
조금 전 가볍게 던진 발자국이, 온기가 떠난 무심, 죽음은 내 앞에 선 미루나무가 아니었다 내가 지나온 명치 같은 나무, 그 밑에 있는 돌계단, 마지막 계단에서 머뭇거린 발자국에 죽음이 숨겨진 것을 문득, 알게 되었을까 계단을 보자기처럼 활짝 펼치면 누군가의 걸음나비를 나비라고 불러주는지 알게 된다 어떤 날은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이의 편한 걸음을 위한 계단이, 어떤 날은 계단이 아닌 낯선 상대, 무얼 칭칭 동여맨 마음과 생각이다 내 앞에 선 낯선 상대에게 골몰하고 있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