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논길을 걸어가다, 멈칫 나를 보고 선다 내가 걷는 만큼 그도 걷는다 그 평행의 보폭 가운데 외로운 영혼의 고단한 투신이 고여있다. 어디론가 투신하려는 절대의 흔들림 해거름에 그는 일생일대의 큰 싸움을 시작하는 중이다 시골 개들은 이빨을 세우며 무리진다 넘어서지 말아야할 어떠한 경계가 있음을 서로 잘 알고 있다 직감이다 그가 털을 세운다 걸음을 멈추고 적들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나도 안다 지구의 한 켠을 걸어가는 겨울 나그네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나도 안다 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대식 (1965~ )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등.
시적 주체는 어느 날 산책길에서 올무에 걸렸다가 풀려난 너구리를 만난다. 그는 공교롭게도 마을을 향해 걸어간다. 민가의 개들이 짖는다. 이제 곧 생사를 건 일생일대의 싸움이 벌어지리라. 그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다. 시인에게도 언젠가 저 같이 생사를 건 절대 절명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는 단호하다. 너구리는 우리 시대의 시인의 비극적 운명을 표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