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병원에서 개안 수술을 받았다. 눈에 늘 안개가 끼어 있는 백내장. 흐리게 떠돌던 팔 다리 묶인 채, 혈안이 되어 인제 세상 더 볼 것 없다는 말인지. 안개 속에서 아버지는 잠적했으며 안개 끝에서 어머니마저 잃었다. 그리하여 나도 결국 안개가 되었으며 눈 시린 아내는 말할 것 없고 안개 낀 나를 따라, 두 딸과 한 아들도 안개 속에서 허망하고 뼈저린 삶. 딸들에겐 선명한 안개꽃을, 아들에겐 안개 터는 날개를. 안개의 자본주의를 헤집어나가야 한다. 안개의 사회주의는 안개를 털어야 하는 것이다. 개안의 의미를 나는 믿지 않으며, 개안의 의미를 나는 믿는다. 백내장 수술 후 눈은 새로 열렸으며 나는 다시 이 지상을 보게 되었다. 세상과 나는 변함없이 변하였으며, 새로 피는 안개꽃은 안개가 아니라는 것과 안개 걷은 집, 안개 터는 나무, 그들로 인하여 나도 다시 보였다.
마종하
1943년 원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겨울행진」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귀가」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노래하는 바다』, 『파 냄새 속에서』, 『한 바이올린 주자의 절망』, 『활주로가 있는 밤』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하늘의 발자국』을 펴냈다.
마종하는 시가 시인 자신의 존재 증명임을 보여주는 드문 시인이다. 그는 이미 알고 있다. 생활이 시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 매끈한 장식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 치열하게 자기를 반성하지 않는 자는 이 시대의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의 시들은 잘 가꾸어진 언어나 고도의 형이상학보다 거칠고 어눌한 삶의 육성을 지향한다. 그의 내면에는 순결한 시에 대한 믿음과 속악한 현실에 대한 절망이 공존하고 있다. 그 믿음과 절망의 팽팽한 긴장이 마종하의 시를 지탱하는 힘이다. 현실이 시의 헛꿈을 감시하고, 시가 현실의 절망을 감싸안아 일으킨다. 시와 현실의 다른 이름은 사랑과 분노이다. 노동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불의와 위선에 대한 정직한 분노를 동반한다. ‘눈물’은 백내장 수술로 개안한 그의 삶과 시가 새롭게 열고 가는 길이다. 그 길의 끝이 환하고 따뜻하다.
* 이 글은 심선옥 문학평론가가 마종하 시인의 시집 『활주로가 있는 밤』 발간에 부쳐 써주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