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이문재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산책시편』,『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산문집 『내가 만난 시와 시인』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민들레는 꽃을 피운 후 꽃대를 밀어 올린다. 꽃씨를 멀리 살기 좋은 곳까지 날려 보내려는 민들레 마음에 꽃대는 점점 얇아지며 길쭉하게 솟아오른다. 속을 비운 꽃대로 바람을 읽으며 꽃씨를 멀리 날려주려 탄력을 쌓는 민들레 마음이 이 땅 어미들 마음 같다.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다’ 민들레의 삶은 오직 꽃씨를 날려주기 위한 것이었다니, 눈물나는 시 구절이다. ‘바람에 불려가는 씨앗은 물기에 끝, 무게의 끝이었다’니, 허공을 나는 민들레 꽃씨에 간절하여 쪼그라든 어미 마음이 가득 배어있었구나.
짓밟힘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스스로 박히는 압정이 있었다니, ‘민들레 압정’에 이 땅 모든 어미들 마음 짠하게 피어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