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 년 된 묘를 개장하기로 한다 헐벗은 봉분을 연다 흙을 물고 쓰러지는, 그물 같은 뿌리들 검고 축축한 집…… 그 속에서 한 점 한 점 벗어버리려 애쓰는 아버지 물로 풀어져 눈알이 흘러간다 풀로 솟아난 손가락이 허공의 급소를 더듬는다 벌레로 기어다니는 내장, 꿈틀꿈틀 곰팡이 슨 채로 거의 육탈이 안 된 다리 한 짝 걸어가야 할 많은 길들이 남아 있었다는 걸까
짓는 데 십수 년 그때 이룬 몸을 아직 허물지 못한 아버지 과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아이처럼 풀이 죽은 모습이다 어떤 간섭도 싫다는 듯 저 혼자 생성되고 무화되는 완강한, 몸
아버지가 남긴 몸을 이끌고 나는 덜그럭거리며 하산한다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산등성이 부근 진달래가 발진처럼 돋아나 있다
― 『실천문학』 2004년 가을호
박설희
1964년에 태어나 2003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우리 앞에 ‘실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에 대해 배반적이다. ‘실재’의 적(敵)은 시간이며, 시간은 실재를 부재로 만들거나 최소한 변형시킨다. 실재하는 개체로서 인간 역시 부재, 즉 죽음에 이르는 길은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모든 운명이 직선적이거나 일방적인 작용만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 직선적 운행을 완강히 가로막는 ‘기억’과 기억이 만들어낸 ‘관습’의 작용. 인간들은 그 복잡한 운동성 속에서 인간만의 운명을 만들어내는데, 생(生)을 알기 버거운 나는 늘 그러한 것들을 슬픔 또는 한(恨)의 일종으로 짐작하고 만다. 이 시는 고인(故人)에게 육탈을 조장하는 ‘시간’과 그 고인, 곧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묘의 개장이라는 ‘관습’이, 자연물 속의 우연한 한 지점에서 교차하는 과정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1연의 중반부까지 시간은 육신을 ‘소멸’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시간일 뿐 우주의 시간에게 그것은 ‘물’로 ‘풀’로 ‘벌레’로 ‘생성’되는 과정이다. 어떠한 종교적 압력도 없이 진솔한 ‘목격’만으로 완성되어 더 큰 공명을 얻는 이 표현들은 다음 구절에 이르러 상승을 시작한다. 그 육신이 ‘아버지’라는 관계 지표를 얻을 때 “걸어야 할 길”이 남은 “다리”와 “짓는 데 십수 년”이라는 인생론이 개입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육신과 육탈의 현장에 대한 목격이 단순치 않은 시적 서정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버지의 ‘몸’을 통해 획득한 ‘몸’ 자체에 대한 각성과 그에서 번져 나온 ‘나의 몸’의 행로에 있다. 즉, 이 시는 ‘묘의 개장’을 싸고 발생하는 ‘발견의 미학’이나 소극적이고 미시적인 창작방법인 ‘깨달음의 미학’을 넘어 인간의 존재론적 의문에 도전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저 혼자 생성되고 무화되는” ‘완강한 몸’이라는 견고한 상상력의 토대로 인해 관념을 배제하고 탐침의 예각을 더욱 날카롭게 세운다. 시인은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산등성이 부근” “발진처럼 돋아”난 것이 “진달래”만이 아님을 우연인 듯 우리 앞에 펼쳐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본질적인 파문은, 시 바깥을 에워싸고 있는 단 하나의 물음에 있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썩어가는 육신을 이토록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지난 주말, 벌초를 다녀왔다. 꺾이면서 마지막 제 생명을 냄새로 퍼뜨리는 풀들을 깔고 앉아 벌 안과 벌 밖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 그마저 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