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보다 빈 지게 위의 허공이 더 무거운 날 고난처럼 후미진 청계천 뒷길 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거기 춘심이네 집 마치 둥지처럼 아늑한 불빛이 고여 있었지 막아선 담벼락엔 지게 서로 몸 포개 기대어 있었고 그 지게를 닮은 사람들, 노가리를 대가리 째 씹으며 술청인 좁은 부엌에 서서 막걸리를 마실 때 춘심이는 부뚜막에 앉아 바느질을 하곤 했었지 잔술을 팔며, 찢겨지고 해진 막벌이꾼들의 작업복을 기워주고 있는 흰 솜털 보송송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연탄불 위의 노가리처럼 검게 타며 오그라들었고 뼈 하나 남김없이 나를 씹어먹고 싶어져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면 시커먼 매연의 하늘 가슴 가득 차오르는 어스름 속, 잔광이듯 그 티 없이 맑은 미소의 바늘이 한 올 한 올 허망과 알 수 없는 분노로 터진 자리를 밟아올 때마다 아무리 땀 흘려도 내 몸뚱이 하나도 채 적시지 못하는 나의 땀방울들이 어느새 무거운 짐이 되어 짓눌러와 나를 더욱 남루의 노가리로 여위게 하곤 했지 바깥은 찬바람이 제 가고 싶은 데로 불고 있었고 담 밑의 지게들은 서로 온몸 오그려 추위를 견디고 있었지만 노상 비틀거리는 것은 가난의 앙상한 形骸, 그림자뿐인 귀로, 아무리 갈아도 자꾸만 돋아나는 쥐의 이빨처럼 취기가 하루의 발뒤꿈치를 야금야금 갉고 있을 때 그 가녀린 풀씨 같은 손길이 여며 준 작업복은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풀잎으로 떠올려주곤 했지 그래, 거리 곳곳에 피어오르는 모닥불로 관절염을 앓고 있던 청계천의 그 해 겨울
김신용 1945년 부산 출생으로, 1988년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 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외 여섯 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버려진 사람들』, 『개같은 날들의 기록』, 장편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 등이 있다.
김신용의 시편들을 박노해 시편들과 함께 나란히 위치시켜 읽으면 더욱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 같이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시의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둘은 닮은 점이 있으나 대상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시작 방법론에서는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노동 현실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생긴 시적 결과이리라. 김신용의 시편들 속에는 각성된 노동자 의식이 드러나지 않는다. 또 외적 억압 세력에 대한 분노(더러 분노가 있기도 하나 그것조차도 이 시의 시행에도 나와 있듯이 박노해와는 다르게 구체적 대상이 없는 “알 수 없는 분노”인 경우가 많다)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의 시편들 속의 시적 주체들은 개별 인자로서 행위하고 사고하는 존재들이다. 즉 조직화된 집단으로서의 의식이 부재한 대신 생활의 변방으로 내몰린 따라지 인생들의 구차한 일상의 소묘가 매우 섬세한 필치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박노해가 다루고 있는 시의 인물들에 정규직 노동자가 많고 목표 달성을 위한 집단의 행동과 의지 관철이 철저하게 진행된다면 김신용 시의 인물들은 비정규직 일용 잡부들이 대부분이고 부당한 억압 현실의 극복을 위한 의지와 행동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서로의 처지를 연민하며 갓 지은 밥처럼 따뜻한 사랑과 연대로 사회적 모멸과 냉대로 인해 차갑게 식어 가는 서로의 육체를 쓰다듬고 보듬을 뿐이다. 그들 소외된 약자들은 다름 아닌 냉혹한 자본 현실 논리가 버린 이방인들이며 사고무친 고아들이다. 따라서 이들 국외의 존재들은 그들끼리 가족을 이뤄 작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 바로 이러한 참다운 사랑의 힘이 김신용 시의 매력이며 힘이다. <청계천 시편 3>에서 보여지고 있는 시의 진실도 다름 아닌, 이 끈끈한 ‘사랑’이다. 사랑의 연대 의식이라 명명할 수 있는 이 시에는 서사의 충동으로 가득 차 있다. “짐보다 빈 지게 위의 허공이 더 무겁”라는 시행은 나날의 일상이 더할 수 없이 막다른 궁핍한 지경에 내몰려 있음을 말한다. 더 이상 내려앉을 생의 바닥이 없는 시적 주체에게 유일하게 위안을 주는 여인이 있다. 시적 주체와 짝패를 이루는 ‘춘심’이 바로 그 여인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여인 ‘춘심’ 역시도 궁벽한 처지에 내몰려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여인은 다르다. 타고난 성녀의 성정으로 막벌이꾼들의 삶의 고달픔을 달래고 품어준다. 이들 막벌이꾼들에게 춘심은 다름 아닌 손 위 누이이고 어머니인 것이다. “그(그녀의) 티없이 맑은 미소의 바늘이 한 올 한 올/ 허망과 알 수 없는 분노로 터진 자리를/ 밟아올 때마다” “나의 땀방울들이/ 어느새 무거운 짐이 되어 짓눌러와 나를 더욱/ 남루의 노가리로 여위게 하”는 것은 그녀가 시적 주체에게 자기 성찰의 계기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또 “그(그녀의) 가녀린 풀씨 같은 손길이 여며 준 작업복은/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풀잎으로 떠올려주곤” 등등의 시행으로 보아 시적 주체는 그녀에게서 위안뿐만이 아니라 절망을 딛고 일어서고자 하는, 강력한 생의 에너지를 부여받기도 한다. 요컨대 이 시는 궁핍과 소외와 모멸과 냉대의 나날의 일상을 살 수 밖에 없는, 이 시대 가장 천대받는 밑바닥 계층에게도 맑고 투명한 그리고 진실한 사랑의 길과 힘이 있다는 것을 울림이 큰 서정성을 통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