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날 때 할머니는 합장을 하곤 했다. 어린 내가 천식을 앓을 때에도 그녀에게 데리고 가곤 했다. 정한 물과 숨결로 우리 손주 낫게 해줍소. 그러면 나무는 솨아, 솨아아 소금내 나는 바람을 일으키며 내 목덜미를 만져주곤 하였다.
오래된 은행나무. 노란 은행잎이 꽃비 내리는 나무 아래 할머니가 오줌을 누고 계셨다. 반가워 달려가니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엄마로 변해 있었다. 참 이상한 꿈길이지. 오줌 방울에 젖은, 반짝거리는 은행잎이 대관령 고갯마루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죽었다고, 시름시름 앓더니 어느날 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그 땅에 새 길이 포장될 거라고, 길이 나면 땅값이 오를 거라고 은근히 힘주어 한 사내가 말하였다.
이상도 하지, 자살이란 말이 떠오른 건. 꿈 없는 길, 인간에 절망한 그녀의 자살의지가 낙뢰를 불러들였는지도 몰라. 부러진 가지, 그녀가 매달았던 열매 속에서 피흘리는 엄마들이 걸어나왔다.
대관령을 넘으며 내가 꾼 낮꿈은 엄마가 나를 가질 때 꾸었다는 태몽과 닮이 있었지만, 오래된 은행나무, 그녀를 몸삼아 산보하던 따뜻한 허공의 틈새로 절룩거리며 걸어오는 늙은 오후가 보였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대기의 주름살 속으로 반짝거리며 사라져가는 태앗적 내가 보였다.
김선우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96년『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등 10편의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도화 아래 잠들다』가 있다. 현재 '시힘'동인으로 활동하고있다.
페미니즘의 여러 유형 가운데 김선우의 시들은 에코 페미니즘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시 <어미木의 자살 1>도 마찬가지다. 또한 그녀의 시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버린 애니미즘이 들어 있다. 자연 사물에 영혼이 살아있다는 생명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의 전언은 다음과 같다. 시적 화자가 살던 마을에 오래 된 수령의 은행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어찌나 신령스러운지 약의 효험마저 지니고 있다. 시적 화자의 추억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은행나무를 단순한 객관 사물이 아니라 신령스런 존재로 여긴다. 어릴 적 시적 화자가 천식을 앓으면 할머니는 은행나무로 화자를 데리고 가 손주가 낫게 해달라고 빈다. 말하자면 할머니는 근대 이전의, 자연 사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신화적 세계에 속한 인물이다. 그리고 여기서 ‘은행나무’는 인간과 대립하는 객관 사물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숨쉬며 사는 근원동일성의 우주적 존재로 표상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화적 존재로서의 ‘은행나무’가 어느 날 벼락을 맞고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하지만 시인은 은행나무의 죽음을 그녀의 자살로 인식한다. “그녀의 자살의지가 낙뢰를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3 연에 등장하는 사내의 발언 때문이다. 사내는 근대인의 전형이다. 모든 사물의 이치를 환금성의 차원에서 재고 평가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죽어버린 은행나무는 이제 그녀의 꿈길에서나 찾아온다. 할머니의 모습으로 또는 엄마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은행나무(사물)를 여성의 정체성과 육체적인 여성으로 보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른바 에코 페미니즘인 것이다. 근대화(남성)에 의해 수난 당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자연(여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과 자연은 동일한 의미의 존재로서 남성과 근대화에 의해 억압과 수난의 대상이 된다. 또 이 시에서 주목할 대목은 2연과 마지막 연의 진술이다. 이 두 연에는 시간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들어있다. 시인은 생태적 패러다임의 시간관인 순환론적 시간관에 입각해서 자연 사물과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죽은 은행나무에서 할머니와 엄마를 동시에 보는 태도라든가, “순식간에 늙어버린 대기의 주름살 속으로 반짝거리며 사라져가는 태앗적 내가 보”이는 것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