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너머 가을 들판의 벼 베는 꼴을 보다가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냐 물으니 그냥 대충대충 살아요 한다 그래 그 말이 맞겠다 싶다가도 남들은 저렇게 가지런히 벼를 베는데 대충대충 살아도 되는가 싶어 다시 한 번 물으니 아이는 답답하다는 듯 내 얼굴을 올려다 보고는 돌아앉아 정성스럽게 크레파스를 칠한다
사흘 더 병치레를 하고 들판으로 나섰다 광화문 사무실로 전화를 하니 아내가 전화기에서 바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수첩을 펴고 논둑에 서서 이리저리 전화를 걸었다 호주 미국까지 호들갑을 떨며 김포벌판의 바람소리를 들려주었다 떠나가던 독감이 되돌아와 밤새 다시 신열을 앓았다 바람 소린 무슨 바람소리가 들려요 핸드폰 끊는 소리지 아내가 혀를 찬다 돌아누워 식은 땀을 흘리면서 이 몸살 떠나가지 않기를 빌었다 오늘밤 어느 벌판엔 또 찬바람이 일까 논길 위에 쿨럭이며 움켜쥐는 손으로 늦은 가을의 전설을 전하며
- 출처: 『내일을 여는 작가』, 2002년 겨울호
▶ 시인 박철 약력
1960년 경기 김포(현 서울) 출생. 단국대 국문과 졸업. 1987년 『창작과비평』에 「김포」외 14편 시 발표, 문단 데뷔. 시집으로 『김포행 막차』(1990), 『밤거리의 갑과 을』(1993), 『새의 全部』(1995), 『너무 멀리 걸어왔다』(1996),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2001)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