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 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하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기형도 (1960∼1989) 1960년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 출생. 연세대 정외과 졸업.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 당선. <중앙일보> 기자. 1989년 뇌졸중 사망.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을 비롯해,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1994), 『기형도 전집』(1999) 등이 사후 출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