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야, 네가 앉아 있는 푸른 풀밭에 나도 동그마니 앉아 있을 때, 네 조그만 발자국이 찍힌 하얀 모래밭을 맨발로 거닐 때 나도 문득 한 마리 새가 되는 느낌이란다. 오늘은 꽃향기 가득한 언덕길을 오르다가 네가 떨어뜨린 고운 깃털 한 개를 주우며 미움이 없는 네 눈길을 생각했다. 지금은 네가 어느 하늘을 날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주운 따스하고 보드라운 깃털 한 개로 넌 어느새 내 그리운 친구가 되었구나. 넌 이해할 수 있니? 늘 가까이 만나 오던 이들도 어느 순간 왠지 서먹해지고, 처음 대하는 이도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것처럼 정답게 느껴질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말이야. 네가 무심히 흘리고 간 한개의 깃털이 나의 시집 갈피에서 푸드득 날개소리를 내듯이 내가 이 땅에 흘려 놓은 시의 조각들이 어디선가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니? 아니 하늘로 영원히 오르기 전에 사랑하는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이미 새가 될 수 있다면... 너를 조용히 생각하는 오늘밤은 나의 삶도 더욱 경이롭게 느껴져 잠이 오질 않는구나. 내 삶의 숲에는 아직도 숨어 있는 보물들이 너무 많아 나는 내내 콩새가슴으로 설레이는구나.
2
해질녘, 수녀원의 언덕길과 돌층계 위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 내 마음에 새가 되어 날아드는 어린 시절의 동무들. “나하고 놀자” “소꼽놀이 하자”고 불러내던 눈매 고운 소녀도, 학교 갈 때면 내가 보고 싶어 목을 길게 빼고 우리 동네 쪽을 바라보며 걷는다고 얘기했던 마음 어진 소년도 수평으로 앉아 있다가 파도 모양을 그리며 천천히 날아오네. 깊은 뜻도 잘 모르고 전에 자주 되풀이했던 그립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이젠 너무 오래 안 듣고, 안하고 살았더니 문득 어린 시절의 동무들이 날아와 나를 부르네.
3
친구야, 네가 너무 바빠 하늘은 볼 수 없을 때 나는 잠시 네가슴에 내려앉아 하늘냄새를 파닥이는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사는 일의 무게로 네가 기쁨을 잃었을 때 나는 잠시 너의 창가에 앉아 노랫소리로 훼방을 놓은 고운 새가 되고 싶다. 모든 이를 다 불러모을 넓은 집은 내게 없어도 문득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다시 짓는 나의 집은 부서져도 행복할 것 같은 자유의 빈집이다.
4
10년 가까이 사회와 격리된 높은 담장 안에서 자유를 그리며 라면 박스로 만든 서가에 <꽃삽>이란 나의 책도 꽂아 두고 본다는 대철의 글을 약간은 슬프게 새소리를 들으며 읽었다. `오늘은 한 주일 동안 쌓인 빨래는 하는 날. 우중충한 세면장에 덩그라니 혼자 앉아 양말을 빨고 있는데 창 밖에 웬 참새소리가 그리 요란한지. 재잘재잘재잘... 하도 시끄럽길래 일어나서 내다보았더니 잎이 파란 삼나무 한 그루 외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도 놈들이 그 안에 숨어서 지절거리는 것이겠지요. 갑자기 한 놈이 후두둑하고 튀어나오더니 십여 마리가 뒤따라 나와 저쪽 취사장 쪽으로 날아가 버리데요. 재잘재잘하는 여운만 남겨 놓은 채. 문득 `살아갈수록 가볍고 싶은데 살아갈수록 내가 무겁구나` 하는 수녀님의 .새에 대한 단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렇게 새처럼 가볍게 지절거려 본 일이 또 지절거림을 들어 본 일이 얼마나 되었던가요? 밖에서였더라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핀잔이나 받았을 조잘거림이 왜 이리 그리운지요. 기분같아서는 누군가 옆에서 하루 종일 조잘거린다 해도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꽤 무거운 저는 오랜 격리생활 때문에 더욱 무거워진 것 같습니다. 아, 새처럼 공기처럼 가벼울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