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기도를 끝내고 나의 긴 그림자를 끌고 오는 밤의 숲길에서 나무들이 나를 부르는 침묵의 소리. 짙은 향기를 남기며 사라지는 백합들의 마지막 노랫소리. 나무층계를 오르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의 별. 나는 그만 황홀하여 갈 길을 잃고 말았네.
2
젊은 날 사랑의 뜨거움이 불볕 더위의 여름과 같을까. 여름 속에 가만히 실눈 뜨고 나를 내려다보던 가을이 속삭인다. 불볕처럼 타오르던 사랑도 끝내는 서늘하고 담담한 바람이 되어야 한다고 - 눈먼 열정에서 풀려나야 무엇이든 제대로 볼 수 있고. 욕심을 버려야 참으로 맑고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 어서 바람 부는 가을숲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3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들도 기도의 말들도 모두 너무 투명해서 두려운 가을빛이다. 들국화와 억새풀이 바람 속에 그리움을 풀어헤친 언덕길에서 우린 모두 말을 아끼며 깊어지고 싶다. 가을 하늘에 조용히 떠다니는 한 조각의 구름이고 싶다.
4
바람 부는 소리가 하루 종일 내 마음을 흔들던 날. 코스모스와 국화가 없으면 가을은 얼마나 쓸쓸할까. 이 가을에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길들여야지.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좋은 책을 읽는 즐거움도 행복한 것이지만 홀로 듣는 음악. 홀로 읽는 책을 좋아하는 것 못지않게 함께 일하는 이들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어야겠다. 때로는 나늘 힘들게 하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실수나 잘못을.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세심하게 읽어낼 수 있는 지혜를 지녀야겠다. 나이 들수록 온유와 겸손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창 밖의 나무들을 바라본다.
5
`나무에선 돌이나 쇠붙이에서 느낄 수 없는 생명과 정서를 느낀다. 나무향기를 맡고 싶다. 나무향기를 내는 벗을 갖고 싶다. 나무향기로 남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정목일님의 <나무향기>라는 수필을 읽은 날. 나는 뜻밖에도 언니가 보내 준 향나무 원목 한 토막을 선물로 받았다. `이건 향나무 조각인데 책상에 두고 상본이나 십자고상 같은 것을 올려 놓으면 어떨까? 시상이 떠오를지도 모르지` 하는 메모와 함께. 그러고 보니 내 방 안에는 향나무 묵주, 향나무 필통, 향나무 연필들로 이미 향기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