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 김수영
심연은 나의 붓끝에서 퍼져가고
나는 멀리 세계의 노예들을 바라본다
녹개와 분뇨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심연보다도 더 무서운 자기상실에 꽃을 피우는 것은 신이고
나는 오늘도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한다
도야지우리에 새가 날고
국화꽃은 밤이면 더한층 아름답게 이슬에 젖는데
올 겨울에도 산 위의 초라한 나무들을 뿌리만 간신히 남기고 살살이 갈라갈 동네아이들.....
손도 안 씻고
쥐똥도 제멋대로 내버려두고
닭에는 발 등을 물린 채
나의 숙제는 미소이다
밤과 낮을 건너서 도회의 저편에
영영 저물어 사라져버린 미소이다
<195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