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오후 - 천상병
나뭇잎은 오후, 멀리서 한복의 여자가 손을 들어 귀를 만진다.
그 귀밑볼에 검은 혹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섬들에 떨어진 작은 꽃이파리
그늘이 된다.
구름은 떠 있다가
중화전의 파풍에 걸리더니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다.
이 잔디 위와 사도
다시는 못 볼 광명이 되어
덤덤히 섰는 솔나무에 미안한 나의 병
내가 모르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
어리석음에 취하여 술도 못 마신다.
연못가로 가서 들을 주워 물에 던지면
끝없이 떨어져간다.
솔나무 그늘 아래 벤치
나는 거기로 가서 않는다.
그러면 졸음이 와 눈을 감으면
덕수궁 전체가 돌이 되어 맑은 연못 속으로 떨어진다.